〈 283화 〉 #125 vs 흑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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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차원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한편 현계에서는 네버랜드의 마지막 5구획의 보스일 거라 추측하는 거인이 이것도 저것도 모조리 짓밟으며 날뛰고 있었다.
그건 마치 신화 속 불의 거인 수르트를 연상케했다.
거인의 발자국이 대지를 흔드는 와중에 홍유리는 조심스레 물었다.
"계속할까요?"
은신의 장막이 유지되고 있는 한 어지간해서 발각될 일은 없으리라. 그러나 여기 있는 여명의 정예들이 빠진 상태에서 과연 저 불의 거인을 막을 수 있을까. 홍유리는 회의적이었다.
다른 클랜이 합세하더라도 마찬가지. 놈을 쓰러뜨리는 건 요원한 일이리라. 그런데도 강훈을 쫓아야 하는가… 아니, 이런 상황일수록 쫓아야만 한다.
만약 거인과 싸우는 도중에 뒤통수를 맞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예를 들어 강훈이 3, 4구획의 보스를 쓰러뜨릴 순 없더라도 일부러 주의를 끌어 데려오는 정도는 가능할 거다.
불의 거인만 해도 벅찬데 벤시나 아우라우네. 최악의 경우에는 셋을 한 번에 상대해야 한다. 전국의 클랜이 모조리 집결해도 손도 발도 쓰지 못한 채 당하고 말리라.
역시 알파가 있어야겠지만… 아프리카에서 돌아오는 데 꽤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알파를 부를 방법은 없나?"
강태준이 묻자 홍유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좀 더 다른 이유에서였다. 갑작스레 타 차원이라는 소리를 해도 믿기 어려울 터… 잠깐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할 방법을 생각하던 홍유리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돌아올 수 없습니다. 지금은요."
알파가 뭘 하고 있는지는 자신도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딴 일이 벌어진 것과 연관이 있다면 거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으리라.
알파에게 의지할 수는 없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스스로 극복해야만 한다. 제아무리 재앙에 가까운 괴물이더라도 토벌해야 한다.
"……알겠다."
이유를 몰라도 불가능하다는데 납득할 수밖에 없다. 안 된다는 걸 억지로 강요할 순 없으니까.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들으면 된다. 계속해 추격을 이어나가는 와중 홍유리는 아직도 쏟아져나오는 몬스터들을 바라보았다.
오크처럼 낮은 수준의 몬스터가 있는가 하면 골렘이나 용종의 강한 몬스터도 있었다. 테마가 없는 게 테마. 불의 거인에 아래서 모여든 온갖 몬스터들이 줄지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 그게 가능한 일이기는 한 걸까. 지금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생각보다 더 암울한 상황이군."
그렇기에 반드시 강훈을 처단해야만 한다. 불의 거인이 가능한 한 멀리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빠르게. 추적을 이어나가던 일행은 머지않아 흔적이 가까워졌음을 알게 되었다.
멀지 않은 곳에 그가 있다. 그리고 그 흔적은 붕괴한 네버랜드의 안쪽으로 이어져있었다.
***
뚜껑이 열렸단 것처럼 분노를 터뜨리는 흑린.
여전히 검게 불타오르는 형상에서 검과 날개가 피어오르자 늑대는 긴장이 고조되는 걸 느꼈다. 여태까지의 기세조차 장난에 불과했다는 듯이 표홀했던 살기가 한데 모여 쿡쿡 찔러오고 그 살기를 뒤따르듯 흑염이 이글거린다.
어쩌면 진리를 제외하고 모든 세계를 통틀어 가장 강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는 그랬다.
"……긴장해."
만상의 주인이 자신에게 경고한다. 그러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기에 늑대는 끄덕였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흑린에게 종말을 막을 의지는 없다는 것. 최악보다는 차악을 택하는 게 낫다. 여기서 흑린을 막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건 분명한 타협이나 지금은 타협할 수밖에 없다. 거절의 말을 삼키고 늑대는 스스로에게 눈을 감았다.
…만상의 주인을 쓰러뜨리는 건 이다음에 할 일이다.
흑린의 검이 허공어 휘둘러지자 차원이 갈라졌다.
단순히 불을 검의 형태로 빚은 데서 끝나는 게 아니다. 한데 응축한 힘은 본래의 것보다 더 끔찍한 위력을 발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저것에 닿는 순간, 고작 재생 따위로는 어쩔 도리도 없을 거라고. 가지고 있는 모든 스킬이 덧없다. 단 한 번만 공격을 허용하더라도 치명상이다.
"……!"
순간, 시선이 향해오자 늑대는 빼앗은 흑린의 불로 자신을 코팅하듯 덮었다. 불의 털가죽을 두른 순간 이번에도 불타오른다.
시선이 향하는 것만으로 어디든 불태울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능력이 얼마나 악랄한지는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옆을 보니 만상의 주인은 역시나 재주껏 피해낸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보았을 때, 늑대는 흑린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미세하게 반응이 느렸다고 생각한 순간, 세계가 느려지며 모든 게 똑똑히 보였다.
육신이 빨라진 건 아니다. 다만 사고가 가속해 인지할 수 있게 된 것뿐이다. 늑대 자신이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만상의 주인의 능력이었다.
찰나를 영원으로 늘리는 권능이 흑린의 움직임을 인지할 수 있게끔 보조해주었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첫 일격을 피할 수 있었다.
첫 일격을 피했어도 그 뒤가 이어진다. 격정에 차 있음에도 검을 휘두르는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 강훈과 강태호를 포함해 여태 늑대가 싸워본 그 누구보다 우위에 있었다.
하기야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미래를 보는 수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는 데다가 무수한 시간을 보냈을 그녀가 마음 먹었다면 불가능한 일은 없을 테니까. 인간의 영역 밖에 다다른 검술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
반격의 타이밍을 잡은 순간, 불타는 검에서 가시처럼 뻗어진 흑염이 수 갈래로 나뉘어 노려왔다. 질병의 검은 숲을 연상케 하는 공격이 자신을 향하자 늑대는 혼무를 일으켰다.
응축된 검이라면 모르나 뻗어진 흑염은 다르다. 동등한 격에 마땅히 대항할 수 있는 힘임에는 틀림없다. 밀리는 건 사실이었지만 몸을 뺄 수 있는 일말의 시간은 벌 수 있었다.
"걸리적거려."
차가운 일갈과 함께 검을 휘두르자 혼무는 갈가리찢겨 사라졌다. 그렇게 엉망이 된 세계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흑린. 순간, 거대한 마력이 폭사했다.
그것은 흑린의 것이 아니다.
흑린의 농밀한 마력을 능히 밀어낸 칠흑의 마력. 이전에 보았던 편린만을 읽어 추측하건대 1300을 상회하는 수치는 감히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운 수준이었다.
"……너도 있었지."
떠올랐다는 듯 검을 휘두르자 그 마력조차 찢어발겨 진다. 범용성 같은 어설픈 걸 전부 내다 버리고 힘이라는 일점에 모든 것을 집중한 권능. 분명 파괴력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혼무는 물론 영원보다도 훨씬 높은 곳에 있다.
영원의 보조를 받아 어떻게든 싸움을 이어나갈 순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힘이 부족하다. 흑린이라는 건 그 권능과 그녀의 존재를 동시에 이르는 말. 검은 불길을 두른 흑린을 쓰러뜨리는 건 요원한 일이다.
설령 혼무의 힘으로 불꽃을 빼앗는다고 해봤자 충분한 양을 빼앗기 전에 분명 자신에게 먼저 한계가 찾아오게 된다. 흑린을 쓰러뜨릴 방법이 없다.
'시간을 벌어줘.'
그 생각을 부정하듯이 머릿속에 말소리가 들려왔다. 육성이 아닌 의지가 그 뜻을 전파해온다. 자신에게는 흑린을 쓰러뜨릴 방법이 없다. 하지만 만상의 주인이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시간을 벌어달라고 했던가. 지금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Trecând lumea interlopă pentru a ajunge aici."
그러자 귓가에 들려오는 건 주문의 영창이었다. 그것은 마법의 말이었고 그에 따라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만상의 주인은 분명 이은하가 맞을 터. 땅과 하늘만큼의 수준 차이가 있지만 그녀가 마력을 사용하는 방식은 분명 흡사하다. 그런 이은하는 마법을 배우지 않았기에 주문의 영창과 마법을 사용하진 못한다. 그러나 만상의 주인이라면 다르다.
"Sper din acest loc care a ajuns dincolo de nenumărate dimensiuni i timp."
달리 그녀를 부르는 이름은 마법의 시초. 이 세계에 만연한 마법을 퍼뜨린 건 다름 아닌 그녀였으니.
"……!"
흑린의 시선이 오로지 만상의 주인을 향하자 늑대는 곧바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렇게 반응했다는 건 분명 그게 위협이 된다는 말일 테니까.
거슬린다고 소리치며 흑검을 휘두르자 늑대는 그림자를 펼쳤다. 사방 5km의 검은 장막이 혼무의 힘을 두르고 틈새 없는 그물이 흑린을 덮쳤다.
그리고 그건 너무나도 쉽게 파훼됐다. 혼무를 둘렀다고 해도 그 본질은 실체조차 없는 그림자였으니까. 그러나 눈속임으로 쓰기에는 충분하다.
어느샌가 뒤로 돌아온 늑대가 그 입속에서 빼앗은 불길을 토해냈다. 흑린의 날개와 맞닿아 이글거리는 불꽃이 그녀의 움직임을 억누르고 또 제한했다.
"감히!"
불길이 닿은 순간, 다시금 지배권을 빼앗겼다. 본래 흑린이 가지고 있던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서로가 지배권을 두고 팽팽하게 맞섰지만 밀린 건 역시나 자신이었다.
"Fie ca totul să nu se sfârească, ca sfâritul să nu vină pentru început."
마법에 문외한인 늑대였지만 어쩐지 아까부터 울려 퍼지는 영창의 주문이 뜻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수한 차원과 시간을 넘어 종말이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던 그녀의 소망이자,
"Răzvrătindumă împotriva Veritas, sunt eretic."
그러기 위해 진리에 반기를 든 이단이 되기로 한 의지를 드러내는 말이었다. 어느새 벌써 네 번째 영창. 그런데도 마력이 요동칠 뿐 무언가 현상이 일어날 기미는 없다.
자신을 떨쳐낸 흑린이 만상의 주인을 향해 달린다. 그럴 거라 예상했기에 혼무를 펼쳐두었다. 그것을 흑검은 아무렇지도 않게 찢어발긴다.
정면에서 흑린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단 걸 새삼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 그딴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
천에 달하는 마력을 일거에 끌어내자 아주 조금이나마 세계가 푸르게 물들었다. 단 한 번이라도 좋다. 이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서라도 딱 한 번의 기회만 가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푸르게 물든 늑대는 뒤에서부터 흑린을 짓눌렀다.
마력은 순식간에 녹아버린다. 다만, 힌트는 있다. 과거 침묵하는 입이 자신의 흑무에 대항해 그랬듯이 더한 출력이면 된다. 밀어낼 필요는 없다. 뚫어낼 필요는 없다. 쓰러뜨리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시간을 버는 걸로 만족한다.
흑린의 날개가 자신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침투하는 불길이 자신을 불태우는 가운데,
"Vreau să fiu o Eternitate eretică departe de apocalipsa care vine!"
다섯 번째 영창이 읊어졌다.
만상의 주인이 빚어낸 대마법. 그것이 이 세계에 자신의 의지를 흩뿌리고 시작한다. 그러나 흑린은 입술을 비틀었다. 여전한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깟 걸로."
대단한 마력이긴 하나 여기까지 와서 고작 대마법 따위로 뭘 할 수 있다고?
파고든 검은 날개가 살갗을 찢어발기자 늑대는 더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여태 빼앗은 흑린의 불길을 모조리 토해내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흑린에게서 떨어진 늑대는 혼무를 일으켜 불에 타오르는 견갑골을 뜯어내 먹어치웠다. 그런데도 새로 재생할 기미가 없다.
그것은 등급 바깥의 힘. 권능에 당한 이상 고작 재생 따위로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앞다리를 잃은 늑대는 촉수를 변이시켜 어떻게든 몸을 만들려 했으나 엎어져 주저앉고 말았다.
이미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심장 어림이 불타 숨 쉬는 게 어려워졌기에. 재생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싸울 수 없다…….
고작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는데. 마력을 다하고 낫지 않을 치명상을 입었다. 심장의 고동이 서서히 멎어간다. 거기에 더해 과하게 억지로 끌어낸 마력의 반동으로 인해 찾아오는 정신 고갈. 죽음이 성큼 다가오며 늑대의 의식이 깊은 곳으로 침잠해갔다.
그렇게까지 아주 잠깐의 시간을 더 벌었을 때, 의식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에 귓가에 스며들듯 들려온 건 영창의 주문이었다.
"Lumea, îmbrăiează eternita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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