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화 〉 #125 vs 흑린 (2)
* * *
늑대의 의식이 가라앉은 때 세계에는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진작에 느려졌던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늘어나기 시작한다.
더, 더욱더.
여섯 절의 영창은 서로 다른 빛을 흩뿌리며 육망성으로 화해 퍼져가기 시작했다. 종말에 포식당해 엉망이 된 별들이 하나둘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비록 사라진 영혼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텅 비어있는 세계는 분명 끝을 맞이하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진작 스러졌던 세계에 깃든 빛은 문자 그대로 기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끝이 오지 않기를 바랐던,언젠가부터 마모돼 맹목적인 집착만이 남기 이전의 누군가의 소망이었다.
그렇게, 빛과 세계는 영원을 품었다.
***
꿈을 꾸었다.
그건 아주 기나긴 꿈이었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기나긴 시간이 꿈의 형태로 흘러갔다. 그것이 누군가의 기억임을 늑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비슷한 일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기억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주마등처럼 이어진 덧없는 기억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
……….
………….
……그래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심경의 변화 같은 게 생길 리 없다. 삶의 궤적을 지켜보았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이 싸움이 끝난 뒤에 만상의 주인을 물어뜯으리란 건 변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삶의 궤적인 영원을 보았을 때, 서서히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별과 세계. 희미한 빛무리가 영원을 품고서 자신에게 스며들었다. 권능의 힘에 당해 치유되지 않을 상처가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영겁의 시간속에 검은 불길마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한 거였다.
"……."
멈춘 심장이 새로이 생겨나 두근거린다. 있을 리 없는 기적이 스며들어 의식이 부상하고 정신이 또렷해졌다.
고개를 흔든 늑대는 자신이 현실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상처는 나아있었고 몸은 이전보다 온전해졌다. 오히려, 혼무의 힘이 더 익숙해졌을 만큼이나.
흑린의 말마따나 권능을 다룸에 있어 발목을 잡던 미숙함은영원의 기억 속을 떠도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숙련돼있었다.
지켜보았다는 간접적 체험이 혼무를 다룸에 있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거였다.그건 그 자체만으로 기적이라고 부를 만하나 고작 이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이 흑린을 막아섰던 건 시간을 벌어달라는 말 때문이었으니까.
그리하여,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붕괴한 던전 안으로 몰래 들어갔을 때 느낀 점은 역시 텅텅 비어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만큼 쏟아져나왔는데 안에 더 남아있다는 게 이상할 테니까. 미궁의 외길을 따라 안으로 걸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치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열려있는 커다란 문을 볼 수 있었다.
그건 미궁과 미로의 경계. 역시나 강훈이 여기까지 왔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마 승부를 낼 심산이라면 바로 이곳. 감각을 교란하는 안개가 자욱하게 펼쳐진 미로에서이리라.
"거, 뭐 유인하고 있구만."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인 의도다. 동시에 올 수 있겠냐는 도발이기도 했다. 콧바람을 거세게 뿜어낸 강태호는 성큼 나아가 경계선에 섰다.
딱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미로. 뒤를 돌아본 그가 일행에게 물었다.
"안 갈 거요?"
"……."
대답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이전 네버랜드 공략대에서 미로에서 강훈에게 당했던 이가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는 미로의 안개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없이 불리하다. 감각이 교란된 상태에서 하나둘 사냥당하고 말리라.
"던전 안으로 들어왔을 땐 설마 했지만…"
그 설마가 사실이었던 모양. 이대로 떠나간다면 강훈은 결국 다시 던전 바깥으로 나와 헌터들을 습격하게 될 거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여기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든 불의 거인을 상대할 방법을 마련해야만 하니까.
방법은 세 가지. 돌아가거나 여기에 남거나 혹은 미로로 들어가던가.어느 쪽이든 일장일단이 있다. 확실한 방법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시간에 쫓기는 건 자신들이 되리라. 분명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데도 외통수라 느껴지는 상황에 침음할 수밖에 없었다.
***
비슷한 시각, 타 클랜에서도 불의 거인을 발견했다. 그 커다란 덩치가 어디 숨어질 리도 없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대책을 세우는 건 쉽지 않다.
매 걸음마다 바닥을 울리는, 불을 두른 거인에겐 접근하는 것마저 쉽지 않은데 어떻게 쓰러뜨리라고?
"군의 화력을 집중하면…"
"화만 돋굴지도 모릅니다."
지금이야 걷고 있지만 그걸 계기로 놈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게 되면 막을 방법이 없다.
1, 2구획의 보스를 비롯한 몬스터는 처리했고 3, 4구획의 몬스터 또한 어떤 의문의 여인이 쓰러뜨렸다는 믿기 어려운 보고가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불의 거인에게만 집중하면 될 일이다.
생각보다 더 빠르게 수습되는 상황. 분명한 호재였다.
"……."
불의 거인을 막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일단 여명 클랜장의 귀환부터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외부에 지원도…"
"어디에 지원을 요청한단 말입니까? 네버랜드만 붕괴한 것도 아닌데."
네버랜드만큼 끔찍하지는 않아도 수준 높은 던전은 죄다 붕괴했다. 오히려 한국이 안정된 편이었을 정도로. 그 이면에는 진작에 던전이란 던전은 죄다 휩쓸고 다녔던 늑대의 존재가 있었지만, 그걸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어느샌가 전국의 클랜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지만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답답했는지 누군가 마랑의 이름을 거론했고 다른 의미로 언쟁이 거세졌다.
인간도 아닌 이에게 어디까지 도움을 청할 거냐고 자존심도 없냐는 이들과 현실을 바라보라는 이들.오랜 시간 동안 최전방에서 싸워왔던 헌터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고 긍지였다.
'그래도…'
하연의 옆에 선 이은하는 답답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알파는 오지 못한다. 십중팔구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다른 차원에서 하고 있을 거다. 물론 그걸 그들이 알 리는 없지만, 이렇게 성토하는 걸 보면 알게 모르게 알파에게 기대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뜻.
어쩐지 속이 답답했다. 가슴이 꽉 막히고 커다란 돌에 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 쉬는 게 어렵다.
당사자도 아닌 자신이 이럴진대 알파 본인은 어떨까.
기대를 건다는 건 반대로 부담이 되기도 한다. 하물며 인간이 아니라고 배척받고 있기까지 하다. 그 모순을 어떻게 견디고 있는 걸까.
어쩌면 자신의 마음조차 부담 되는 건 아닐까.이럴 때가 아닌데도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해져 도통 떠나질 않았다.
회의의 답은 도통 나오질 않았다. 불의 거인이 다가오며 조금씩 열기가 느껴지고 있다 하는데도. 엇갈린 의견에 목소리가 커져갈 때, 자색 나비들이 날갯짓하며 천막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건 누군가의 상징. 그녀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기에 헌터들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진작 한국을 떠났다고 알려진 그녀가 구두 굽 소리와 함께 지휘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
시간이 어긋나고 늘어지며 퍼즐처럼 조각난다.
이미 한 번 당했지만 금세 벗어났던 기술. 고작해야 시간 벌이에 불과했던 귀찮을 뿐인 능력이었다.권능이 아닌 마법으로 펼쳐낸 건 다소 의아했지만 그래봤자다.
그렇게 생각한 건 찰나였다.
망가진 별들이 어느새 본래의 형상을 되찾아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미 끝나버린 세계가 기적을 부르는 마법에 소생해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단언컨대, 그건 고작 마력 따위로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흑린은 실소했다. 저 마법을 위해 대가로 바친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냥 포기하고 넘어가면 될 텐데 이렇게까지 필사적일 이유가 있을까.
'여섯 절이라…'
다섯 절의 영창이 마법의 한계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무수한 세계가 끝나가는 동안 단 한 번도 대마법 이상의 마법은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지레짐작하고 말았다.
마법이란, 다른 이들도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끔 만상의 주인이 만들어낸 체계에 불과하다고. 대마법? 나름 재밌었지만 고작 인간들이 사용하는 것 따위에 그 이상의 관심은 불필요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끝의 끝까지 숨겨둔 여섯 절의 영창. 대마법을 아득히 넘어서는 마법은 분명 존재했었던 거다. 괘씸하게도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여태 숨기고 있었을 뿐.
그건 마법의 영역이 아닌 기적으로 향하는 발돋움.
세계마저 영원을 품고 빛을 흩뿌린다. 일시적으로나마 숨을 거뒀던 늑대 또한 명부의 얕은 곳에서 강을 건너기 전에 돌아오고야 말았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도 사자소생.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걸 가능케 했으니 그걸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무어라 할까.
반짝이는 별과 되살아난 세계가 재잘거리듯 속삭여온다.
별의 속삭임이 한없이 되풀이되고 있을 때, 흑린은 자신의 불길마저 밝힐 정도로 뜨겁고 밝은 빛을 목도했다.
그것은 태양. 마찬가지로 종말에 스러진 별이 영원을 품고서 빛과 열을 뿜어냈다. 태양마저 되살아나자 별들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렸으나 언제까지 느리진 않다. 가속에 가속을 더해 가장 먼저 날아든 건 유성체였다. 고작 수십 미터짜리 바윗덩어리는 흑린의 곁에 닿기도 전에 검은 불길에 휩싸여 사라지고야 말았다.
다음은 혜성이었다. 스퀘어, 추락한 부유섬처럼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혜성들이 자신을 덮쳐왔다. 그러나 검을 휘두르자 샅샅이 흩어져 먼지가 되고야 말았다.
그리고는 소행성. 거기서 흑린은 느꼈다.
세계 자체가 영원을 품고 만상의 주인에게 동조하고 있다고. 진작에 끝나버린 이 세계가 자신을 배제해야 할 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쯧."
지독한 기적이다. 수십에서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소행성들이 떼를 지어 자신을 향해 날아든다. 아무리 그래도 저것들을 전부 막아내는 건 힘들다.종말이 직접 오는 게 아니라면야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터.
그런데 정작 이만한 마법을 구현한 만상의 주인은 지그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아, 물론 그러시겠지.
기적에 바친 대가는 마력뿐만이 아니니까. 정신 고갈은 물론이고 다른 것에도 시달리고 있을 거다. 그런 상태로 기적을 이끌어야 하니 오죽 지쳤을까.
그 당연한 사실에 흑린은 키득거렸다. 분명 자신을 죽일 가능성이 있는 마법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술자가 저렇게 무방비해서야.
시선을 따라 검은 불길이 그 자리에 이글거렸다. 불살라지는 만상의 주인이 한 줌 재조차 남기지 않게 되리란 게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마침내 검은 불길은 그녀를 완전히 뒤덮었다.
그런데도 마법은 멈추지 않는다. 눈을 크게 뜬 흑린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소행성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싸움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진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흑린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분명 자신의 권능은 발동했다. 원래대로라면 무방비한 만상의 주인은 지금쯤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야 한다.
그런데 방해가 끼어들었다.
질릴 것처럼 질기고, 사자소생의 기적에 힘입어 죽음에서조차 되돌아온 이. 늑대였다. 그것이 자신에게서 빼앗은 불길로 만상의 주인을 지켜낸 거다.
그렇기에 영원을 품은 별들은 여전히 그녀의 의지에 동조하고 있다. 늑대의 담담한 붉은 두 눈이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장난감 주제에. 미물이었던 주제에 어딜, 어딜 그따위로 쳐다본다는 말인가.
한 줌의 의심조차 없이 자신이 쓰러질 거라 믿는 듯한 눈이었다. 여기서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이다. 가까스로 소행성을 피하고 가르면서도 자신을 뒤흔드는 마력도 스킬도 이치도 뭣도 없는 단순한 물리적 충격을 극복하는 게 어려웠다.
어떻게든 소행성의 무리를 쳐냈을 때는 달이 다가오고 있었다.
까드득, 흑린은 이를 악물었다.
영원을 품은 세계가 자신을 적대한다. 세계에 의지를 투영해 별을 지배하에 둔다는 터무니없는 발상. 아까 부쉈던 소행성은 작은 유성체가 돼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설령 달을 막을 수 있다고 해도 그다음은 없다.
위성 다음은 행성.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그것만큼은 무리였다. 깊은 한숨을 몰아쉰 흑린은 천천히 끄덕였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저 둘을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쩌면 유유히 차원을 넘어 망가진 세계로 도주한 것도 계획된 일일지도 모른다…… 십중팔구 그러하리라.
늑대의 권능이 자신의 힘을 일부 빼앗아간 이상 거리를 두고 쓰러뜨릴 방법은 없다.달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흑린은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만상의 주인은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 권능은 가졌지만 초월에 오르지 못한 늑대는 미숙하디 미숙하다.
잠깐 물러났다가 다시 돌아오면 된다. 혹은 아예 훗날을 기약해도 되겠지. 감정을 억누르고 차원의 문을 열어젖힌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거대한 턱이 그것을 씹어 삼키고야 말았다.
혼무 거기에 깃든 힘은 빼앗는 게 전부가 아니다.
"이!"
뒤늦게 늑대를 노려보았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흑린은 아연한 눈으로 자신을 덮쳐오는 달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