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화 〉 #126 토사구팽
* * *
"!"
울분에 찬 그녀의 말소리가 짓눌려 사라졌다. 이미 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지척까지 도착한 달에 흑린의 모습이 완전히 가려져 사라졌다.
투시로도 꿰뚫어볼 수 없을 만큼 지독한 질량 덩어리.
그 모습을 보며 늑대는 이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수백만 톤에 달하는 바다의 재앙에게 심해 깊은 곳까지 끌려갔던 과거. 그러나 아무리 바다의 재앙이라고 해도 감히 달과는 비교할 수는 없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어땠을까. 그야 손쓸 방법도 없다. 달이 움직이는 기적에 도대체 어떻게 대항한다는 말인가. 그건 흑린도 마찬가지였을거다.
그 증거로 마지막에 도망치려 했으니까.
그러나 흑린은 달에 치였음에도 죽지 않았다. 검은 불길이 달의 극히 일부를 불사르고 조금이나마 몸을 둘 공간을 만든 거였다.
우주는 진공상태. 받아줄 벽이 없다면 밀려날 뿐이지 흑린을 죽이기는 힘들다. 상당한 충격을 받긴 했어도 숨은 붙어있다. 그러자조소가 울려퍼졌다. 고작 이깟걸로 자신을 죽일 셈이었느냐며 비웃는 목소리는 이내 딱딱하게 굳어 사라졌다.
그래. 만상의 주인, 그녀 또한 당연히 알고 있었던 거다. 그리하여 이마에 한 줄기 땀방울이 흐르는 순간, 화성의 위성인 포보스와 데이모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바윗덩어리. 달에 비하자면 턱없이 작은 크기였지만 충분한 질량병기였다. 애초에 달에 짓눌려 밀리고 있는 상태에서 저 두 위성에 부딪친다면 제아무리 초월자일지라도 견디지 못할 건 분명하다.
그런데도 흑린은 그것마저도 견뎌냈다. 아니, 극복했다
달의 중력과 속도, 질량에서 벗어날 순 없다. 응축된 검과 날개가 풀려나기 시작했다. 달이 아니라 포보스와 데이모스를 향해. 그러자지름 12km와 22km의 돌덩이가 산산이 조각 나 부서져내렸다.
터무니없다.보고도 믿기 힘든 위력이다. 달에 짓눌린 채로 두 위성을 없앨 수 있는 이는 달리 없으리라. 그뿐만 아니라 영원의 방해까지 받고 있음에도 흑린은 쉽게 당하지 않았다.
이 자리의 그녀는 분명한 절대자였다.
그러나, 기적의 마법은 좀 더 지독한 것이었다.
가까스로 두 위성을 격파했지만 달보다 훨씬 거대한 붉은 구체가 다가오고 있었다.화성. 달보다도 거대한 행성이 기어코 지척까지 다가오는 것에는 제아무리 흑린이라한들 뾰족한 수가 없었는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실제로 소리로 들린 게 아니라 그 의지가 넓게 퍼져 알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달과 화성의 거리는 점점 좁아져 결국 부딪치고 말았다.
…….
진공 상태의 우주에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거대한 두 별이 부딪쳤는데도 세계는 여전히 고요했다.
우주의 먼지가 흩날린다. 화성과 충돌한 달은 산산이 부서져 파편으로 변했고 진공상태의 우주에 휘날린 파편들은 마치 의지라도 가진 것처럼 어딘가로 향했다.
"."
낮은 울음 소리와 함께 일어난혼무가 그 파편의 대부분을 단번에 먹어치웠다.
멸망한 세계의 달이 부서짐으로써 우주가 어수선해진 듯하지만, 실제론 그리 변하지 않았으리라.
무엇보다 문제는 달이 부서졌다는 게 아니라 흑린. 마지막에 차원의 틈새로 도망치려는 걸 막아내긴 했지만 이걸로 죽었을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다른 이도 아닌 흑린에 한해서는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만상의 주인이 그랬듯 무언가 숨겨놓은 힘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
하지만 그것도 늦기 전에 사용했어야 한다.
색적을 넓게 펼쳐 흑린의 흔적을 찾아보았으나 어디에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개 돌린 늑대는 만상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마법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쩌면 흑린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어설펐던 거다.
역시나 아까 파편이 자신을 향했던 건 우연도 뭣도 아니었던 거다. 부서진 달의 파편은 부서진 소행성의 파편과 뒤섞여 하나의 군집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게 뜻하는 건 분명하다.
토사구팽. 사냥이 끝났다면 사냥개는 삶아먹는다.
***
나비들이 나풀거리는가 싶더니 무식하게 커다란 구덩이가 순식간에 파여지고 깊은 고랑이 생겼다.분명한 마법이고 환상을 현실로 구현하는 힘이었다.
"……와."
상상하는 모든 것을 구현할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만능의 힘이다.물론 어디까지나 마력이 받쳐줘야 가능한 일이었지만, 적어도 이은하에게 있어 그건 자신이 마력을 구현하는 것보다 더 나은, 상위호환격인 힘으로 여겨졌다.
퍼플 스퀘어의 마법과 A등급 스킬 구현화의 연계. 지금의 이은하가 보기에 아득해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럴수록 자신의 모자람이 새삼 눈에 밟히는 듯하다.
"……."
자색 나비가 이리저리 흩날린다. 클랜 내에서 오고 가며 몇 번인가 얼굴을 마주한 적은 있었지만 그녀의 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
바로 저 사람이 소율이의 스승님이구나… 스퀘어 마스터라는 이름답게 과연 대단한 사람이었다. 찌릿한 시선이 각 클랜의 마법사들에게 향하자 얼른 주문을 외워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건 소율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못 본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마력이 일취월장해 있었다. 오죽하면 저런 게 재능이구나 싶었을 정도로.
팀장님이 말했듯 자신에게 부족한 건 마력량이다. 물론 남들에 비해 빠르게 오르는 거라고는 하지만…
이은하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잡생각은 떨쳐내야 한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그새 삼천포에 빠지려 한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환영의 나비가 만든 고랑에 물이 채워지며 작은 호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서로 다른 주문이었고 박자도 리듬도 각기 달랐지만 어딘가 그 사이를 관통하는 듯한 어떠한 선율. 가만히 영창의 말소리와 주문을 듣다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을 뿐인데.
"apa albastra…?"
들리는 말을 따라했을 뿐 아무 의미 없는 말소리여야만 했지만 어쩐지 손끝이 시원하다. 졸졸 물이 흘러나와 떨어지기 시작하자 이은하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이게 왜 되지?
의아해하는 순간엔 불의 거인이 이미 지척까지 당도해있었다.
***
"거, 그냥 가지 그랬소."
"너 혼자서 쓰러뜨릴 순 있고?"
강태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버랜드에서도 탕아들이 침공해왔을 때도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으니까. 하물며 무기까지 빼앗긴 지금에서야 말할 필요도 없다.
"……지미럴."
바닥에 침을 뱉은 강태호는 껄렁한 태도로 괜스레 자신의 뒷머리를 긁었다. 잠깐 찾아온 조용한 정적에 앞으로도 여유롭게 둘러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던 미궁의 내부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어떨 것 같소? 나올 것 같소?"
"글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 있는 이상 강훈이 움직이지 못할 거라는 것도 사실이다. 홍유리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돌려보냈으니 자신들만 당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정말 바깥으로 나올 확률은 적을 거다. 계속 미로 속에서 농성하는 게 고작일 터. 달리 숨겨둔 패가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거, 나는 아직도 모르겠소."
"뭘 말이냐."
"그래도 영감탱이는 영웅이었잖소."
칠영웅. 심지어는 창선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영웅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었다.
검을 맞대본 그는 제정신은 아니라도 미쳐있지는 않았다. 분명 모종의 신념을 품고서 움직이고 있었다.
"……."
강태준은 동생을 보고 생각을 곱씹었다. 그러고보니 아직 얘기해주지 않았던가. 혼란한 상태였으니 치료에 집중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여기까지 왔으니 알려두는 게 예의이리라.
어쩌면 바로 여기가 아버지였던 강훈의 무덤이 될지도 모르니까.
스틸 자이언트의 팔뼈 위에 걸터 앉은 강태준은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멸망과 종말. 그리고 재앙과 종말이 오는 시간이 앞당겨지는 것들에 대한 자신이 아는 모든 진실을.
***
무수히 날아오는 파편. 늑대를 꿰뚫으려는 파편들은 혼무에 삼켜져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다.
"……!"
그런데도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다. 소행성과 부서진 달의 파편. 언뜻 질병의 지신이 떠올랐지만 감히 이것과 비교할 수는 없다.
먼저 선수를 쳤어야만 했다. 그러지 못했던 건 확실하게 상황을 읽지 못한 자신의 실책이었고 안일함이다.
그러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황을 읽는 게 느려 한 차례 늦어버렸다.
어쩌면 알고도 그랬는지도 모른다. 기나긴 삶을 지켜보며 일말의 연민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아둔함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만상의 주인을 상대로는 조금의 방심도 금물인데도.
크게는 부유섬만한 크기였고 작게는 수십 미터에 달하는 파편들이 끝이 다듬어진 채 날아온다. 기적은 여전히 이행되고 있었으니까. 그걸 피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해 쉽지 않다.
흑린이라면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 불길을 일으킬 수 있겠지만 아직 자신은 그 정도로 혼무를 다루지 못한다.
다만, 영원 속에서 그녀의 삶을 지켜보며 권능에 조금 더 익숙해진 건 사실이었다.
늑대의 몸이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광폭화. 혼무와 함께 사용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아까까지 자신을 보조했던 영원의 지각이 사라진 빈 자리를 광폭화로 상승한 신체 능력이 메우고 있다.
날아오는 소행성. 그 파편을 밟고 뛰어오른 늑대는 몰아치는 파편 사이를 정신없이 달렸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본신을 드러낸 자신보다 몇백배는 거대한 파편을 완전히 피하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충돌에도 불구하고 구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화성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늑대는 그녀가 자신을 여기서 죽일 셈이란 걸 이해했다.그렇게 늑대는 다가오는 화성에 휩쓸리고야 말았다.
적어도 그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래. 이걸로 됐다. 전부 끝났다. 아직 마법은 유지되고 있으니 희망을 사로잡은 다음에 사자소생의 기적을 일으키면 될 일이다.
거기다 흑린도 쓰러뜨렸으니 그녀의 신혈을 취해 진리의 또 다른 이면이자 스킬의 주체인 시스템을 깨우면 된다.
마침내 목표를 이뤘다고.그게 전부 착각이란 걸 만상의 주인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끝났다고 안심한 순간, 차원을 찢어발기고 나타난 늑대의 턱이 기어코 자신을 물어뜯었다.
그리고 그 뒤로 더 큰 차원을 찢어발기고 나타난 흑색 검이 맹렬한 기세로 휘둘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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