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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86화 (286/407)

〈 286화 〉 #127 멸절의 검

* * *

별이 자신에게 향하는 순간, 늑대는 저항했다.

흑린처럼 별을 부수는 터무니없는 짓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저항할 방법은 알고 있었다. 이미 흑린이 그 답을 보여주었고 자신이 막았으니까.

곧바로 허공을 물어뜯었다. 원래라면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을 테지만, 혼무를 가진 이상 무의미하지 않게 됐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분명히 집어삼켰다. 그것은 세계의 구성요소이자 차원 혹은 공간이라 불리는 것. 화성과 부딪치는 것보다 빠르게 차원의 틈을 만들어 그 속으로 숨어들었다.

전혀 다른 차원이 아니라 그 사이로 이어지는 길일 뿐이다. 그런데도 완전히 별개의 세계였기에 화성이 자신에게 닿을 일은 없다.

늑대는 머나먼 곳에 있는 만상의 주인에게로 질주했다. 원래라면 몇 시간은 걸렸을 테지만 공간을 접고 구멍을 뚫어 그사이를 통로로 이용하자 극적으로 단축할 수 있었다.

비약적으로 단축된 거리와 시간은 그 자체로 무기가 된다. 다른 차원에서 달려 새로이 공간을 찢어발기고 나타난 늑대가 한껏 턱을 벌렸다.

조그마한 소녀­ 그 위로 자신이 아는 누군가의 모습이 덧씌워진다. 그건 지금의 이은하이기도 했고 소녀의 과거의 모습이기도 했다.

평생을 더한 시간보다 아득한 시간을 영원이라는 이름 속에 숨겨진 그녀의 기억을 엿보고야 말았으니까. 그런데도 늑대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비극이었으나 동정심이나 안타까움 같은 걸 품을 생각은 없다. 또한 그럴 여유도 없다.

빠르게 느려져 가는 세계. 아까까지 자신을 보조하던 영원이 반대로 자신을 막아내려 하고 있었다.

영원의 범용성은 뛰어나다. 그러나 그 때문에 힘이라는 일면에선 다소 부족한 면이 있다. 영원을 혼무가 찢어발긴 순간, 마침내 이빨이 닿았다.

어깻죽지를 물어뜯고 찢어발긴다. 씹힌 쇄골이 으스러지며 그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건 환상도 무엇도 아닌 분명한 현실이다. 극기를 가지고 있는 이상 자신의 감각을 혼동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하물며 이빨로 씹어 닿고 있는 데 그걸 가짜라고 생각할 순 없다.

그리고 자신에게 물어뜯긴 그대로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렸고 미리 준비해두었던 무수한 사슬과 운석이 한 곳에 집결해 집중되었다.

무한에 가까운 터무니없는 마력이 살의를 띄기 시작했다.

***

고성의 옥좌처럼 붉은 해골이 주렁주렁 매달린 흑염의 검이 삐그덕거리며 휘둘러졌다.

"꺼낼 생각은 없었는데…"

만상의 주인이 그랬듯 끝까지 숨기고 있었던 힘. 기적의 마법처럼 권능만이 아니라 억겁의 세월 동안 거둬온 감정과 영혼으로 정련한 검이었다.

그것은 종말을 본떠 만든 검이기도 했다. 늑대에게 물어뜯기면서도 자신을 노리던 사슬과 운석을 모조리 불태우고 한참이나 여력이 남아 있다.

일격의 휘두름은 능히 기적을 깨부술 힘이 있다. 끝없는 흑염이 솟구치며 멸절의 이름을 가진 존재 자체를 불사르는 검은 기어코 화성 전체를 뒤덮어 불태우고야 말았다.

들릴 리 없는 이곳에서 어떤 이들의 비명이 가득 울려 퍼진다.

그러자, 마치 달래기라도 하는 것처럼 흑린은 손잡이에 길게 달린 붉은 해골들을 쓰다듬었다. 울음은 그쳤지만 그건 공포와 두려움에 억눌려졌을 뿐이다.

죽어서도 죽지 못하고 잔류해 부정적인 감정을 토해내며 울부짖을 뿐인 망령들. 누군가는 '잃어버린 자들'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었지만, 흑린은 그런 것 따위엔 전혀 관심 두질 않았다.

단지 자격 있는 이들의 영혼을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아 왔을 뿐. 원래라면 여기에 늑대 또한 포함돼 있어야 했을 테지만…

흑린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지막에 만상은 자신을 인지하고 움직였으니 어떻게든 도망쳤을 거다.

아마도 다른 차원으로. 하지만 놓칠 생각은 없다. 이걸 꺼내 들게 만든 이상 그만한 대가는 치러야 할 테니까. 한 명의 초월자와 그에 근접한 탐스러운 영혼. 값어치는 충분하리라.

***

어깻죽지에서 골반 아래까지. 몸의 절반 이상을 뜯어먹힌 만상의 주인은 곧바로 자신을 재구성했다. 미리 마셔둔 모조 엘릭서의 효능은 마력을 회복시키는 것만 아니라 불사에 가까운 재생을 부여하기도 했다.

한번 흑염에 불타올랐던 늑대는 손도 발도 쓰지 못한 채 죽어갔지만, 스킬과는 달리 모조 엘릭서는 존재 자체의 손실마저 재생한다. 온전한 육신으로 금세 돌아온 만상의 주인은 기다란 천을 만들어 덮었다.

"……신선한 기분이었어."

일순간이나마 죽음을 직감해야 했다. 늑대가 가진 권능에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하물며 영원마저 가볍게 깨부수고 다가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모조 엘릭서에 의존한 것. 틈을 찔려 사실상 한 번 죽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여전히 자신을 경계하는 희망. 붉게 타오르는 듯 증기가 끓어오르는 몸을 낮게 낮추며 으르렁거린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겠지. 협력을 깨부순 건 자신이었다. 설마 거기에 당하고도 흑린이 살아있을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래. 먼저 배신한 건 자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꾹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다.

"너도 알잖아? 흑린은 아직 살아있다는 거."

살아있기는 하지만 아무 상처도 없는 건 아니다. 화성과 달이 충돌하는 순간 뒤늦게라도 차원의 문을 열었거나 어떤 수를 쓴 모양. 데미지는 입었어도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회복할 만한 정도일 뿐. 그리 대단치 않다.

문제는 마지막에 꺼내 들었던 그 불길한 검. 흑린이 숨겨두고 있던 힘이다.

붉은 해골이 주렁주렁 매달린 그 검만큼은 조금도 읽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 검이라면 종말을 죽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여태껏 사용했던 흑염의 검은 어디까지나 저 검의 레플리카. 흉내에 불과했으리라. 둘 사이에는그만한 차이가 있었다.

'어쩐지 부족하다 싶었는데…'

여태껏 잃어버린 자들, 단세혁이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멸망과 종말 속에서 모여든 영혼이 고작 그것밖에 없을 리 없으니까.

그래서 희망이 초월의 영역에 발 디디기에 충분한 업을 가지고 있다고 지레짐작했다. 때가 되면 단세혁이 잃어버린 자들을 일깨워 마땅히 그래야 할 이에게 건넬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감정을 먹어치우는 검은 도깨비불이 탐욕스럽게 영혼을 축적하고 있었던 거다.

왜 깨닫지 못했을까. 눈치채지 못했을까.

어쩌면 희망이 생각보다 더 잘해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잃어버린 자들이 힘을 부여한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설프게 꿰뚫어 볼 수 없었기에 더더욱. 차라리 아예 볼 수 없는 거라면 모를까 내면과 심상 깊숙한 곳에 주의 깊게 숨어있는 잃어버린 자들을 어설프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봤자 전부 자신이 어설펐다는 거다.

그 검을 보았을 기적의 마법을 버리고 여기에 도망치는 게 고작이었는데…… 소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혼자선 싸울 수 없다.

환계에서 확실히 해야 했었다. 아니면 차라리 어떻게든 여신을 끌어들여 흑린과 맞서게 했었다면… 전부 늦고 덧없는 후회일 뿐이다. 누구도 시간을 되돌릴 순 없으니까.

그래. 행동한 건 자신이었고 그걸 여태껏 전부 막아낸 건 눈앞의 한 마리 늑대. 결국 그가 이런 결과를 이끌어냈다는 거다.

소녀는 깊은 감정을 토해내듯 숨을 뱉었다.

"이번에야말로 협력하자."

혼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그 또한 잘 알고 있을 거다. 자신의 뻔뻔한 말에 희망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기세는 오히려 더해져 간다.

모조 엘릭서의 힘은 절대적이나 그 시간은 한정돼있다.

"아니면 전부 빼앗겨도 좋아?"

따라서, 이 힘이 다하기 전에 흑린과 결판을 지어야만 한다. 셋 중에 하나. 마지막에 남게 될 이는 한 명이리라. 그리고 협력하지 않는다면 그 하나는 확실하게 흑린이 되리라. 철면피를 쓴 채 만상의 주인은 손을 뻗었다.

"대답은?"

***

미리 준비해 둔 고랑 속에 거인의 발이 잠겨 들었다. 물을 채우고 가려두기는 했지만 눈치채지 못한 걸로 보아 지능은 그리 높지 않은 모양.

뜨거운 열기가 가득 담긴 물을 증발시키고 치솟아 오르고 꿀렁거리며 마른 암석 같은 것이 고랑을 채운다. 한눈에 보아도 무거워진 걸음이지만 안타깝게도 넘어지지 않고 육중한 몸을 끌어올리려 한다.

"……."

지능과는 달리 힘은 상당하다는 증거였다. 그 전에 손을 휘젓자 마법과 폭격이 집중된다. 미리 준비해둔 군의 화력이 한데 집중해 조준하는 것에 누군가가 영창을 뱉었다.

"Explosion!"

폭발의 마법이 퍼부어지는 화력에 더한 불을 붙인다. 거센 힘이 터뜨려지자 거인이 잠깐 휘청거렸다. 그나마 효과가 커 보이긴 하지만 이렇다 할 충격은 없어보인다.

"……."

그래도 미약하게나마 효과를 보게 한 건 그녀가 유일했다. 역시 강해졌구나. 정말 많이 성장해있었다. 새삼스러운 감회를 느끼며 뒤늦게 도착한 은자림은 기다란 붉은 창을 쥐고 심호흡했다.

당연하게도 불의 거인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비록 이곳에 모인 헌터들이 많고 강하다지만 네버랜드의 최종 보스로 추정되는 몬스터. 단순히 크고 강한 게 끝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기어코 고랑에서 빠져나온 거인의 몸에서 무언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몬스터……?"

마치 알갱이 같은 것들. 불이 형태를 이룬 것 같았다. 거인의 진격으로부터 잠깐 시선을 돌린 은자림은 마구잡이로 나타나 진격하는 5구획의 몬스터들을 보았다.

열기와 위용에 불의 거인에 맞설 방법이 없다고 여겨진 헌터들은 무리를 막아 세우고 있었다. 거인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리가 침범하면 거인 토벌 자체에도 차질이 생긴다.

"화력 집중!"

고랑을 빠져나온 거인에게 다시금 화력이 집중된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은자림은 머리 뒤까지 팔을 젖혀 투창할 준비를 끝마쳤고 던지기 직전, 멀리서 돌아오고 있는 여명의 일행을 보고는 창을 거두었다.

***

"존나 크네…"

가까이서 본 불의 거인은 생각보다 더 커다랗다. 뒤늦게 따라오는 여명의 둘을 보며 홍유리는 코웃음 쳤다. 하여간에 굼벵이같이 느리기는.

다시 상황을 살피며 자신이 할 일을 확인했다.

튼튼한 괴물에게는 그만큼 특대로 준비한 걸 먹여줘야지. 물론 환영의 나비님이 돌아오긴 한 모양이지만 퍼플 스퀘어 자체는 몬스터와 싸우는데 적합하지 않으니까. 어지간한 정도라면 일도 아니겠지만 저 불의 거인은 언뜻 보기에도 재앙에 준하는 괴물. 게다가 음흉하게 뭘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

붉은 구름 위에서 홍유리는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선빵 필승. 이제 지척까지 닿은 순간,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아까부터 떨어지고 있던 불의 알갱이가 한데 뭉치면서 작은 사람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한 것을.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마치 조그마한 불의 거인을 보는 듯했다.

***

다시금 협력을 요청하는 뻔뻔한 말. 그런데도 거기에 의문이 생기진 않는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다음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머리로는 물론 이해하고 있다.

감정은 뒤로 미루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따라야만 한다.

"조건이 있다."

협력하는 건 찬성이다. 뒤통수를 맞았다지만 그건 차치해야 할 문제다.

그러나, 정말로 협력하겠다면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해야 한다.

"내게 먹히겠다면 기꺼이."

그렇기에 늑대는 새로운 제안을 꺼냈다.

[업 166.42% → 169.8%]

아까 만상의 주인을 먹어 치우며 여태까지 미동도 없던 업이 움직였으니까.

찰나를 영원으로 늘리는 그녀의 힘이 있다면 충분히 준비할 만한 시간을 만들 수 있을 터. 뒤바뀐 입장. 선택하라고 하는 말을 다시 되받아친 늑대는 외통수일 답을 기다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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