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화 〉 #128 제안
* * *
"먹겠다고…"
소녀는 그 말을 곱씹어보았다. 다른 의미 같은 게 아니라 정말 먹겠다는 뜻이리라. 배가 고프다거나 하는 의미는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아까 자신을 삼키며 무언가 변화가 생긴 것이리라.
정확히 어떤 변화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러겠다는 건 그만한 일일 터. 초월에 다다를 중요한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
새삼 먹히는 게 두렵다던가 그런 건 아니다.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고 통증이나 아픔 따위에 호들갑을 떨 리도 없다.
……다시 협력할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응해야만 한다.
딱 하나 걱정되는 거라면 희망이 과욕을 부리는 게 아닐까 하는 것. 모조 엘릭서의 효과가 있어도 권능으로 한 줌도 남기지 않고 단번에 자신을 집어삼키면 재생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일일이 그런 걸 조정할 시간이 없음은 알고 있다. 그 부분은 믿을 수밖에 없다.
천천히 끄덕인 순간, 천천히 걸어 다가오는 희망.
이런 순간에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게 아쉽게 느껴졌다. 이젠 전처럼 힘으로 눌러 머리를 쓰다듬긴 힘들 테니까.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손을 뻗었지만 정작 그 손이 사라져 소녀는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앞으로도 자신에게 그럴 기회는 없을 테니까.
"자, 어서 날 먹어 치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라는 듯 알 수 없는 기운이 널리 퍼져 자신을 덮었다.
소녀는 양팔을 벌리고 저항하지 않았다.
응. 받아들이자.
그가 만족할 때까지 자신을 먹어치우기를.
***
별안간 작렬한 대마법엔 불의 거인을 쓰러뜨릴 충분한 마력이 담겨있었지만 그건 제대로 적중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마력을 감지한 건지 위협을 느낀 건지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회전하며 주먹을 휘두른 불의 거인은 다소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다.
마법과 주먹이 부딪친다. 원래라면 도시 내에서 대마법을 쏘는 건 미친 짓이기에 사용하지 않았을 테지만, 놈의 체고가 워낙 높으니 피해가 확산할 일은 어지간해선 없을 터.
그리고 그렇게 되더라도 하연이나 환영의 나비님까지 있으니 어떻게든 막아주지 않겠냐는 다소의 안일함도 있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성공이었다. 그것도 대성공. 폭발한 대마법의 충격으로 불의 거인이 단번에 무너져 내렸으니까.
"뭐?"
분명 데미지는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한 방에 끝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이 그렇게 강한가…?
홍유리는 냉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놈은 분명 5구획의 보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쓰러뜨릴 수 있다고? 바포메트를 상대로도 목숨을 걸어야 했는데?
아귀가 맞지 않는다. 무슨 게임 속의 보너스 스테이지도 아니고서야. 아니면 애초에 구획 보스가 아니었던 걸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 이변이 벌어졌다.
산산이 무너져내린 불의 거인은 확실히 쓰러졌다. 그러나 용암처럼 진득하게 흘러내린 불길이 형상을 이루기 시작한 거였다.
작고 커다랗고. 온갖 형태로 변해가며 불의 거인이었던 잔해는 새로운 모습을 갖춰갔다.
"……?!"
그제야 홍유리를 비롯한 이들은 불의 거인이 사실은 거인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최초의 모습조차 단순히 형상을 갖추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 마치 네버랜드에 갇혀버렸던 저거노트처럼 거대한 거인의 형상을 말이다.
오크, 코볼트, 매머드에서 지옥사냥개 혹은 코아틀이나 드레이크와 같은 모습으로 변한 불덩이들. 거기에 공통점이 있다면 여태까지 네버랜드에서 볼 수 있었던 몬스터들이나 5구획의 몬스터라는 것뿐이다.
그리고 비록 크기는 달랐지만 결정적으로 탱크와 사람의 모습까지 흉내 냈을 때 모두가 확신했다.
거인이나 그런 게 아니었다고. 불덩이로 이루어진 괴물은 주변의 모습을 흉내 내는 슬라임과 도플갱어의 언저리에 있는 무언가의 집합체였다고.
***
모든 이야기를 듣고 강태호는 눈만 끔뻑였다.
전혀 다른 세상의 일 같아서 아예 실감 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평소에 하지도 않던 농담을 할 리도 없을 터.
멸망입네 종말입네 하는 것들이 진짜라는 말일 터.
그러니까 그 뭐야? 재앙이 사실은 멸망의 일부고 멸망은 또 종말의 일부고… 재앙을 때려잡으면 멸망이 끝나서 종말이 온댔나? 아니, 멸망이 종말보다 큰 거였나?
"어… 그것참……"
뒷머리를 긁은 강태호는 정말이지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는 인류를 멸망시켜서라도 종말을 늦추려 하고 있다는 거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
"더 궁금한 건 없나?"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별로 머리 아픈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면 변하는 건 없다. 그 독불장군 영감탱이를 때려 쥐어박아서라도 관에 못질 해야겠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주교 할멈을 시작으로 옥연의 로드와 거암의 아재까지 죄다 그 손에 목숨을 잃었다. 복수혈전 같은 건 아니지만 이대로 놔둘 수는 없다.
명예로웠던 영웅은, 아버지는 타락했다. 그러면 하다못해 아들 된 도리로서 죽여드리는 게 인지상정이다.
"잘 알고 있구나."
그 말은 강태준이 한 게 아니었다.
"누가 그 말을 해준 건지는 몰라도 달리 알고 있는 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간부 중에서도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아는 이는 달리 없다. 그 중에서 딱 한 명은 예외였지만 어떤 늑대에 의해 그 이름대로 아무 말도 못하고 침묵하게 되었으니.
"전부 알고도 생각이 바뀌지 않았더냐."
경계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음산한 저음이 미로 너머의 안개속에서 울려퍼진다.
"작은 것을 위해 큰 것을 버리겠느냐."
강태호는 바지를 털며 일어나고는 의자 대신 쓰고 있던 스틸 자이언트의 팔뼈를 들어 올렸다. 비정상적으로 커다란 뼈를 어깨에 짊어진 채 심드렁히 말했다.
"뭐가 작은 거고 뭐가 큰 거요?"
"……."
"어차피 뒈질 거 날짜 늦추겠다고 발버둥 친답시고 죄다 배때지에 칼빵 놓겠다는 건 잘하는 짓이요?"
"그 사이에 방법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 조직에 가담했다. 만상의 주인. 자신에게 종말을 보여준 그녀만이 이 세계를 구원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시간을 벌어 그녀에게 협력하는 것.
"명예란 하잘것없는 것."
부질없다고 그는 그렇게 말했다. 붉은 대검을 지닌 채 갑옷의 괴인은 타오르는 창염을 두르고 모습을 드러냈다.
"오직 이 길만이 종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를 위해서 손에 피가 묻더라도 상관없다. 굳건한 의지에 두 형제는 마주 무기를 들었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거라. 전부 죽어도 좋으냐?"
혼자서는 결국 손이 부족하다. 하지만 세간에 검성과 검공이라 불리는 둘을 설득할 수 있다면 인류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건 어렵지 않다. 종말이 찾아오는 건 기정사실이나 단 하루라도 시간을 늦출 수 있다면 후일 시체를 짓밟히고 묘지에 침을 뱉더라도 상관없다.
"그게 싫다면, 내게로 오거라."
그게 자신의 대의였으니. 서늘한 창염을 두른 그가 손짓하자 강태호는 실소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휘둘렀다. 스틸 자이언트의 팔뼈를.
"니미럴, 이거나 드쇼!"
***
불의 거인은 사라졌지만 뭐라 지칭하기 힘든 부정형의 불덩이들이 이런저런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환영의 나비는 고개를 주억였다.
거인인 모습 그대로였다면 까다로웠을 테지만 작아졌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의지에 따라 일어난 마력은 물로 뒤바뀐다. 뒤바뀐 물은 홍수처럼 넓고 아득한 양으로. 그리고 파도처럼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고 불덩이들은 너무나 간단하게 쓸려나갔다.
당연한 일. 비록 소속은 퍼플이라 하나 인디고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다. 스퀘어 마스터라는 건 그런 존재들. 누구보다 빠르게 그녀가 거기에 힘입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기엔 이은하 또한 포함돼있었다.
부정형의 불덩이가 매머드의 형상으로 머리를 흔들며 커다란 상아를 휘둘러온다. 비록 동작은 어색한 부분이 있었지만 마치 그 힘까지 카피하기라도 했다는 듯한 모습에 아연해 하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상아는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고 그러자 불똥이 튀었다. 이글거리는 열기만이 이것들이 정말 불덩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다.
마력을 구현해 송곳이나 말뚝으로 억누르려 했지만 먹히질 않는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리 당황스럽진 않다.
"Distort."
영창과 함께 이은하는 주먹을 쥐었다. 공간의 왜곡. 마력 구현이 통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하면 될 뿐이다. 모든 방향에서 짓눌려지는 압력에 애쓰던 불꽃 매머드는 점점 압축돼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머잖아 끝장낼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불덩이는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커다란 거인이 조각조각 나뉜 거였다. 그에 합당한 숫자와 물량. 오크와 코볼트같은 조그만 것들이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실체가 불덩이이기에 어쩔 수 없는 현상. 이곳저곳 불타오르기 시작하는 용인시. 배관이나 지하 펌프 같은 것들이 무너져 제멋대로 하수구의 물이나 지하수가 새어 나오고 있다.
불바다로 변해 엉망이 된 모습. 또 서울처럼 도시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덩이는 몬스터의 무리에 뒤섞여 헌터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정말 문제인 건 불덩이를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헌터가 생각보다 적다는 거였다. 쓰러뜨려도 쓰러뜨려도 곧바로 뭉쳐서 더 큰 무언가를 흉내내거나 혹은 잘게 나뉘어 더 작은 무언가를 흉내 내니 정말 상대하기 껄끄럽다.
좀 더 좋은 방법이 없나 궁리하던 이은하는 아까 환영의 나비가 했던 마법을 따라 해보기로 했다.
"O mare inundaie vine."
그러자 무언가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기력한 탈력이 적지 않은 양의 마력을 단번에 빼앗아간다. 정신고갈이 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지만 실패한 건 아니다. 마력이 사라진 만큼 그만한 대가가 돌아왔으니까. 비록 환영의 나비가 만든 것처럼 커다란 홍수는 아니었지만 근처의 불덩이를 쓸어버리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수증기가 일어나며 사라져간다. 저 끈질긴 녀석들이 사라지는 걸 보고 이은하는 반색했다. 역시 불을 끄는 데는 물이 제격이라면서.
하지만 그 실상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불덩이라거나 홍수라거나 그런 걸 차치하고서 환영의 나비를 따라 해 뱉은 주문은 본래 성립할 수 없는 것. 왜냐하면, 본래 3절의 영창이었던 마법을 앞줄의 영창을 생략하고 마지막 영창만 외운 것이었으니까.
환영의 나비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과 마법에 대한 지식이 있다. 그러나 마법에 입문하지조차 않은 이가 3절의 마법을 그것도 완전하지도 않은 마지막 주문만으로 완성했단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
만상의 주인을 먹는다는 건 사람을 먹는다는 것. 비록 그녀가 아직 사람인지는 따져봐야겠지만. 거기에 흔들림은 없다.
흑린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이상 한시라도 빨리. 더 서둘러 해야만 한다. 혼무를 일으킨 늑대는 예상외로 순순히 제안에 응한 만상의 주인을 뒤덮었다.
그녀의 모습이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얼빠진 누군가와 같지는 않다. 모종의 수단으로 모습을 바꾼 것일 터. 애당초 정신체 이상의 격에 올랐다면 외견에 큰 의미는 없다.
그렇기에, 여태 그 누구도 그녀의 정체가 이은하임을 깨닫지 못했다.
아마 여왕 정도가 아니었을까. 첫 만남에 이채를 띠었던 건 이제 와 생각해보면 이은하와 만상의 주인이 동일 인물이란 걸 알게 됐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비록 시작은 같더라도 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둘을 혼동할 필요는 없다.
…그래. 전혀 다르다.
찰나가 영원이 된 세계. 서서히 사라져가는 만상의 주인이 된 그녀가 살아온 영겁이 어떤 삶이었는지 이미 보아 알고 있었으니까.
한 번. 그리고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해 그녀를 먹어치움에 따라 스며드는 업이 필연적으로 점점 더 짙은 감정과 기억을 가져와 주마등처럼 펼쳐놓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늑대의 눈에 보이는 건 차원의 틈새가 아니라 지하 벙커였다. 바로 그녀의 처음이 시작되었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지독한 보금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