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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88화 (288/407)

〈 288화 〉 # ­3 이은하

* * *

처음 이은하가 태어난 곳은 지하 벙커였다. 수십 미터 지하 아래서 나고 자란 그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바깥 풍경을 보지 못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때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많이 달랐으니까. 주로 나쁜 의미로.

"……."

커다란 발전기 뒤의 환풍기. 오직 거기서 들리는 소리만이 이은하의 친구였고 안식쳐였다.이 좁고 어둡고 칙칙한 지하만이 그녀의 세계요, 모든 것이었다.

항상 들리는 거라고는 언성을 높인 어른들이 다투는 소리. 그걸로 모자라는 날에는 주먹다짐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조금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라는 사람은 다툼에 휘말려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은하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있게 되기도 전에 세계에 대한 기대같은 것들을 모조리 접어버렸다.

그래서, 엄마가 얘기해주는 해와 달이나 하늘과 바다를 공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올려다보면 하늘 대신 천장이었고 끝없이 흐른다는 바다 대신 지하수로 매일매일을 연명했으니까. 그런 아름다운 게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게 불만스럽지는 않았다. 충족된 적이 없었으니 결여된 삶이 부족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으니.

매일같이 환풍구 속의 소리를 듣는 나날. 그렇게 아이답지 않은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어린 아이의 삶이 변하게 된 건 어떤 수리공 할아버지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원래는 군의 높은 계급에 있는 사람이었다지만 아직 어린 그녀가 군대라는 조직을 이해할 수 있을 리도 없었고그냥 주변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에서 막연히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는 종종 자신을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박식했던 그의 이야기는 이은하가 처음으로 제대로 배운 교육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로 인해서 이런저런 지식을 쌓았다. 엄마와는 달리 증거를 대며 이 지하 속에서도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그러나 지식은 호기심을 동반하게 되는 법.

환풍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무엇인지. 미미한 빛은 어디서 흘러들어오는지. 그리고 왜 우리는 여기서 살아가는지. 예전이었다면 바람직했을 아이의 궁금증은 어른들에게 쓴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글쎄다…"

엄마는 물론이고 수리공 할아버지도 답해주지 않았지만 이은하는 궁금해했다. 바깥이 어떻게 돼 있는지를 그리고 우린 왜 여기서 살아가는지.

그게 실수였다.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처럼 이은하는 벙커의 뚜껑을 열려는 시도를 하고 말았다. 물론 어린아이에 불과한 그녀가 열 수 있을만큼 간단하진 않았다.

그래서 실패했지만 아이의 시도는 어른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이은하는 자신의 엄마가 울면서 이리저리 머리 숙이고 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때때로는 밀쳐지기도 했고 뺨을 맞기도 했다.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냐면서. 이은하로서는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심한 욕설이 들리기도 했다.

"……!"

그렇게 이은하는 두 번 다시 벙커 바깥으로 나갈 시도를 하지 못하게 됐다. 그렇게 되면 엄마가 슬퍼할 테니까. 또 힘들어할 테니까.

그래. 그 날 죽은 건 고양이가 아니라 호기심이었다. 고양이는 호기심을 죽여야만 했다.

시간이 더 흘러 이은하는 열 살이 됐다. 그 때, 벙커에 남은 사람들은 더 적어졌다. 깊은 지하에 수십 년간 갇혀있다보니 체력은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다들 진작에 지쳐있었다. 그냥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고 가만 내버려둬도 죽을 날이 머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그 중에는 이은하의 엄마도 있었다.

"……엄마도 죽는 거야?"

얼마 전부터 엄마는 침상 위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됐다. 깨어있는 시간도 점차 줄어들었다. 힘겹게나마 그런 게 아니라고 부정은 했지만 거짓말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지치고 지친 사람들 사이에 끄집어내진 건 이기심이었다.

혹자는 이런 상황일수록 서로를 위한다고 그럴 거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어느샌가 벙커에 남은 사람들이 하나 둘 줄어들더니 기어코 이 지하에 이상한 파벌이 생기고야 말았다.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어차피 전부 망할 거라면. 그 생각 아래 하나로 뭉친 손등에 뱀의 문신을 그린 방탕한 이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 거다. 어쩌면 하나 둘 쓰러지던 사람들도 그들이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엔 그래도 대립하던 이들이 있었다.파벌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 오래가진 못했다. 의견의 대립은 필연적인 결과로 싸움으로 번지게 됐으니까.

정확히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른다. 어린 이은하가 알 수 있는 거라고는 손등에 문신을 새긴 파벌이 지하를 장악했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날부터 이은하는 그들의 심부름을 하게 됐다. 처음으로 겪는 힘겨운 노동이었고 잠 잘 시간도 부족해졌다. 배급받은 식량은 이전보다 턱없이 적어서 배를 굶주려야만 했다.

누군가는 다시 저항하자고 말했지만, 벙커를 점령한 이들은 젊고 난폭했다. 그리고 머릿수조차 더 많았기에 현실적으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서로를 얼싸안고 견딜 수 있었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분명 방법이 생길 거라고. 어떻게든 될 거라고 믿었다.

매일이 힘들었지만그래도 이은하는 울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뭐라도 해야만 엄마 몫까지 먹을 걸 구할 수 있었으니까. 턱없이 적은 양이었지만, 자신의 것을 양보해서라도 견뎠다.

하지만 고된 삶에 지친 사람들은 점점 차가워졌고 서로를 지탱해주던 모습은 어딜 갔는지 무관심해지고 말았다. 엄마는 쓰러져있고 수리공 할아버지는 어디 갔는지도 모르겠다. 이젠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게 된 거다.

가끔은 파벌의 사람들보다 어른들의 차갑게 식은 눈동자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

……엄마…….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바뀐 잠자리. 차가운 바닥에 헤진 모포를 덮고 이은하는 팔다리를 주물러야만 했다. 그래야 내일도 일할 수 있을 테니까. 비록 여기저기가 저리고 머리도 지끈거렸지만 그래도 웃었다. 웃을 수 있었다. 쓸모없다고 걷어차여도 기침이 나와도 거기에 피가 섞여 있어도 배꼽시계가 울리지 않는 날이 없더라도 괜찮았다. 엄마가 살아있었으니까.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그러나, 그런이은하의 세계가 산산이 부서져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엄마는 편안하게 숨을 거뒀다…… 그랬다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고된 하루를 마치고 이은하가 본 것은 여럿에게 억눌려있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어린 이은하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만족스레 웃고 있었다. 자신 따위는 신경쓰지도 않고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며 엄마를 사용하고 있었다.

도구가 아닌데. 엄마는 물건이 아닌데……

멍하니 쓰러진 이은하는 귓가에 들려오는 그들의 웃음소리를 가만히 듣고있는 수밖에 없었다.

…무서워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이야기속에서나 들었던 무시무시한 짐승들이 마구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뭐야?…아, 시발. 기분 나쁘게."

무슨 일이었을까. 한참 즐기던 그들이 별안간 엄마를 내팽개치고선 바닥에 침을 뱉었다.그렇게 흥이 식은 그들이 사라졌을 땐, 엄마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

그 날, 이은하는 죽음이란 걸 이해하고 말았다.

***

이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돼버렸다. 힘들어도 움직일 수 있었는데… 심장이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걷어차이고 얻어맞으며 이은하는 차가운 독방에서 천천히 죽어가기 시작했다.

진작에 무관심해진 사람들은 조그마한 어린애가 죽건 말건 신경쓰지 않았다. 심지어는 조만간 치워야 할 시체가 하나 늘었다고 면전에서 중얼거리기도 했다.

……이런저런 말들을 들으면서 이은하는 태어난 걸 후회했다. 그냥 이대로 죽고 싶었다…그런데도 목은 말랐다. 이젠 눈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만큼 지쳐 메말라버렸다.

그렇게 죽어가던 어린 아이는 처음으로 원망을 품었다.

밉다. 밉다. 밉다.

왜 도와주지 않아? 왜 죽게 내버려뒀어? 엄마는 왜 죽어야만 했어?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져내리고 그들이 제멋대로 망쳐놓았다. 속은 원망으로 가득 찼고 꾀죄죄한 이은하의 얼굴엔 항상 흘러내린 눈물이 얇은 선을 그려놓았다.

그렇게 죽어가다가 예전에 수리공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밖은 이렇지 않다고. 정말 아름다운 하늘이나 바다같은 것들이 있다고. 물론 거짓말이겠지만 이은하는 기대를 품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밖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비틀거리며 바닥을 짚고 일어난 이은하는 벽에 기대어 벙커의 출구가 있는 곳까지 움직였다. 비록 그 때는 작고 어려 열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를 거야.

그 생각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감시가 있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방탕한 이들이라도 어린 아이가 생각하는 걸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어린 아이만큼도 성실하지 못했다.

드르렁, 시끄럽게 코를 골면서 졸아있는 모습에 이은하는 하얗게 웃었고 머잖아 그는 붉은 잠에 영원히 빠져들었고 이은하는 얼른 열쇠를 챙겼다.

그렇게 처음으로 본 바깥 세상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고 아름다웠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은하는 황홀에 빠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이제 남은 미련은 없다.

전부 떨쳐버리고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엄마와 아빠가 있는 곳으로. 웃고 있던 이은하는 별안간 닥친 충격에 바닥에 납작 엎드리게 됐다.

"이 미친 애새끼가!"

파벌의 사람. 그가 들고 있는 몽둥이에 피가 묻어 있었다. 아까 얻어맞은 충격으로 흘러나온 자신의 피였다.

아무리 그래도 문이 열리고 발각되지 않길 바라는 게 무리였던 거다. 심지어 한 사람 죽기까지 했으니. 씩씩거리며 소리친 그가 자신을 짓밟았다.

"어딜 기어나오고 있어?!"

밟히고 걷어차이고 심지어 머리채를 잡혀 들어올려졌다. 물론 발버둥쳤지만 아직 어린 아이가 어른의 힘에 제대로 반항할 수 있을 리 없다. 이제 다시 지하로 끌려가 그 지옥 같은 나날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끔찍한 기분이었다. 전부 포기하고 절망에 찬 표정을 보고 오히려 기껍다는 듯낄낄거리며 빰을 때린 그는,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지 보자고. 밑에서 죽은 네 엄마처럼 뒈질 때까지 교육해주마. 기분 나쁜 애새…?"

갑작스레 피를 흘리며 고꾸라졌다.

거기에 있는 건 커다란 괴물이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검고 커다랗고 무서운 그것이 파벌의 사람을 한번에 짓누르고 머리를 뼈째로 씹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은하는 몸을 끌며 뒷걸음질쳤다.

무섭다. 두렵다. 생전 처음보는 인간 외의 다른 동물이 인간을 먹고 있는 게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피처럼 번들거리는 눈을 보았을 때, 아까까지 죽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거짓말이란 것처럼 살고 싶어졌다. 그런 생각이 완전히 날아가버릴 정도로 무서웠다. 절대, 절대 저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두려움에 떨면서 이은하는 얼른 벙커 안으로 숨어들었고 문을 닫으려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빠르게 그것이 벙커의 뚜껑 사이에 주둥이를 쳐박고는 으르렁거렸다.

뚝뚝 떨어지는 피에 이은하는 겁에 질려 벙커의 문 손잡이를 놓고 도망치고 말았다.

***

문이 열렸단 사실은 금세 들통났다.

왜냐하면 그것이 쳐들어왔으니까. 어린 이은하는 몰랐지만 그게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이룩했던 위대한 문명을 버리고 이런 쥐구멍같은 지하에 숨어야했던 건 저런 몬스터들이 지상에 즐비하기 때문이었다.

괜히 이런 지하에 숨어있던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은하가 다시 지하로 도망친 것처럼 몬스터의 침입을 깨달은 사람들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기도 했으나 괴물은 그마저도 때려부쉈다.

괴물은 막을 수 없기에 괴물이라는 걸 증명하듯이 비명 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출구에서 가까운 방에 숨은 이은하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얼른 이 사태가 끝나기만을 덜덜 떨면서 빌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러다가 문 고리가 세차게 삐걱이기 시작하자 깜짝 놀라 침을 삼켰다.

"……!"

괴물이 온 걸까? 아니, 아니었다. 잘 들리진 않았지만 어렴풋하게 말소리가 들렸으니까. 누군가 문을 열려고 애쓰고 있었던 거다.

…….

한참이 지나 정적이 찾아왔다.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소리에 조금 안정을 되찾은 이은하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방 안에는 이상한 상자와 자루로 가득했다.

이제 보니 이상할 정도로 넓은 방이기도 했다. 내용물이 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진득한 피냄새와 아까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며칠간 굶은 몸이 호소하고 있었다.

먹을 것들. 심지어가득가득 있어서 혼자 먹으면 몇 백년은 걸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굶주림을 참지 못한 이은하는 그것들을 마구 먹어치웠다.

***

한참동안 배가 부를 때까지 먹은 뒤에야 불안이 엄습했다. 여기서 나가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생각이었다. 지금쯤 밖은 어떻게 됐을까. 벙커의 문은 닫았을까? 괜히 성급한 행동으로 전부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머리로는 생각하는데 이상하게도 나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통쾌하고 속 시원했다.

뜻밖의 일이었지만 고작 문 하나를 열었다고 이렇게 달라질 줄은 몰랐다. 자신의 좁디 좁은 세계를 무너뜨리기에는 고작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거다.

그래. 고작 이거였는데……

이렇게나 쉽게 평생 살아왔던 곳과 파벌의 사람들이 끝났다고 생각하니까 허무해졌다. 그리고 슬슬 나가서 바깥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을 때, 화들짝 놀랐다.

타이밍좋게 누군가가 문고리를 마구 잡고 흔들고 있었기 때문에. 깜짝 놀라 얼어붙은 이은하는 어서 열라고 급하게 소리치는 목소리에 그가 누군지 알게 됐다.

……수리공 할아버지였다.

다른 이였더라면 열어주지 않았을 테지만 아직 어렸던 이은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문을 열고 말았다.

문이 열리자마자 자신을 보고 의아해하던 그는 이내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시 문을 잠궜다. 반가움에 무어라 말하려던 이은하는 그의 중얼거림을 듣고 얼어붙었다.

"시발…"

명백한 욕지거리. 거친 동작으로 품 속에서 담배를 꺼내 꼬나무는 그의 모습엔 과거의 모습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 괴리감에 얼어붙어있자 수리공 할아버지는 자신을 흘깃 보고는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나도 놀라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담배는 끄지 않았다. 마치 그게 진정제라도 된다는 듯이 조급함이 사라지고 천천히 가라앉아갔다.

차분함을 되찾은 그는 위아래로 자신을 훑더니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물었다.

"열쇠…갖고 있구나."

질책도 무엇도 아닌 그저 담담한 말이었다. 혼날까 싶어 찔끔했던 이은하는 아무 반응이 없자 이내 끄덕였다.

"이리 주거라."

말없이 열쇠를 건네자 품속에 집어넣은 그가 식사를 시작하자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이은하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해야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것 정도였다.

곧 배를 채운 그는 문에 귀를 가져다댔다. 바깥의 무언가를 살피는 듯하던 그는,

"!"

쿵쿵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소리가 아까와는 전혀 다르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는 정도가 아니라 이따금씩 들려오는 천둥소리처럼 커다란 소리였다.

그건 당장에라도 문을 부수려는 듯한 거센 움직임. 아까 그 괴물의 모습이 떠오르자 울상이 지어졌다.

"빨리!"

무어라 시끄럽게 소리치는 말. 당장에라도 뚫릴 것 같은 문. 뒤늦게 그가 바라는 걸 알아차린 이은하는 황급히 식량을 끌어다 문 앞에 쌓기 시작했다.

온 몸이 저린 것도 뒷전으로 그렇게 발버둥쳤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지만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했다.

그리고 소란스러운 바깥이 조용해진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

"이제 간 모양이다."

이제 숨 좀 돌리겠다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얼어붙었던 이은하도 그 때쯤 돼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도대체 그게 무엇인지 왜 그런 게 바깥에 있는지. 여태 어른들은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저것들이 있기 때문에 이 지하에 숨어살 수밖에 없단 걸 알 수 있었다.

우리들의 적. 무섭고 무서운 괴물이 적이었던 거다.

"……나가봐야겠다. 좀 도와다오."

그가 하는 말에 이은하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는 품 속에 넣었던 열쇠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문을 닫지 않으면 더 크고 무서운 괴물이 올 거란다. 지금은 문에 식량을 받쳐서 견뎠지만 나중엔 그러지도 못할 거야."

"너도 나도 결국 전부 잡아먹힐 게다. 그래도 좋으냐?"

냉정한 말이었지만 이은하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 크고 무서운 괴물이 한껏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서.

잠깐 자신을 보던 그는 아무 말 없이 잔뜩 쌓아둔 식량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게 하나하나 옮겨질 때마다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어딘가 숨고 싶었지만 도대체 어디로? 식량만 가득한 여기서 도망칠 곳 따위는 없다.

그러는 동안 쌓아둔 걸 전부 치워버린 수리공 할아버지가 문고리를 쥐고 심호흡하는 게 보였다.

혼자 중얼거리더니 결국 정말로 문을 연 그가 바깥으로 나가자 이은하는 덜덜 떨면서 슬쩍 눈만 돌렸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하인데다가 이 방은 출구와 가까웠기에 드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조금 용기 낸 이은하는 천천히 문으로 다가가 빼꼼 고개만 내밀었다.

수리공 할아버지는 열쇠를 돌려 출구를 잠그고 있었다.

하지만 발소리는 숨겨도 이 지하에서 그 소리만은 숨길 수 없었는지 반대편에서 으르렁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수리공 할아버지는 아직 문을 닫으려하고 있었다.

알려야한다. 돌아오라고 그리고 도망치라고.

하지만 그랬다간 괴물이 노리는 게 자신이 될 것만 같아 그러지 못했다.

결국 문을 잠궜을 땐 이미 괴물은 머지 않은 곳에 있었다.

듣지 못한 게 아니라 듣고도 모른 채 한 거였다. 그가 사다리에서 뛰어내려 달리자 괴물도 마찬가지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분명 출구는 문에서 가까웠지만 괴물은 그 이상으로 빨랐다. 순식간에 달려든 괴물이 도약하자 둘은 엉키고 얽혀 바닥을 몇 바퀴나 굴렀다.

붙잡힌 수리공 할아버지는 기역자 모양의 무언가를 꺼내들어 조그만 방아쇠를 연신 당겼지만 시끄러운 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리 효과있어 보이진 않았다.

괴물의 턱이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씹었다. 철로 된 바닥일 텐데 음푹 들어가고 날카로운 발톱이 두꺼운 팔뚝에 깊게 파고들자 이은하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아득해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을 닫으려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비록 상황은 전혀 달랐지만 죽어가던 엄마의 모습이 오버랩된다.할아버지까지 죽고 이 지하 벙커에 자신과 괴물만이 남아서 며칠이고 두려움에 떨면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아아, 그래. 이미 자신의 세계는 무너져내렸다.

고작 문 하나를 두고 유지되던 세상은 처참히 무너져내려 앞으로는 혼자서… 이은하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기 싫다. 그러기 싫었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싫어!

저도 모르게 발이 움직여 달리고 있었다. 엄마가 죽은 날부터 품고 있었던 응어리가 끓어올랐다. 살고 싶다는 욕구와 살리고 싶다는 욕망이 한데 뭉쳤다.

강한 감정은 무언가의 방아쇠를 당겼고 그건 그대로 기적이 됐다.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다. 조막만한 손이 커다란 괴물의 몸에 닿은 순간, 거짓말처럼 나가떨어져 벽에 부딪치더니 힘없이 쓰러졌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일에 이은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자신의 손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

시간이 좀 더 흘러 둘은 서로 마주 앉은 채 식사했다.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표정이 어둡지는 않았다. 괴물은 쓰러졌으니까. 쓰러진 놈의 이마에 세 발이나 탄환을 박아뒀으니 이제 지하는 안전하리라.

"아무랴도 네겐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는 모양이다."

수리공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말로 설명하는 게 불가능하지만 이미 바깥 세상의 몬스터들이 그런 것들인데 무리해서 이해하는 것보단 그냥 받아들이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신비한?"

"그래. 아무도 너처럼 할 수는 없단다."

"……."

"저 놈은 워그라고 해서 늑대를 닮은 놈인데…"

수리공은 뒤늦게 혀를 찼다. 그림책같은 게 있지도 않은데 늑대라고 해봐야 알겠는가. 그냥 무서운 괴물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힘 센 사람이 와도 너처럼은 할 수 없을 게다."

"……."

칭찬의 말이었지만 이은하는 도리어 시무룩해졌다. 그러자 수리공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진작에 알았으면 엄마가 살아 있지 않았을까요?"

얻어맞고 배를 굶주릴 필요도 없었을 거다. 오히려 보란 듯이 때려 눕혔을지도 모른다. 왜 진작에 그러지 못했을까.그게 한스러웠다. 억울해서 뭔가, 잘 설명하기 힘들지만 뭔가 부글부글 끓는 듯했다.

고개 숙이고 있었기에 이은하는 수리공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알려주세요."

후회를 곱씹던 그는 이은하의 말에 눈길을 주었다. 그 어린 아이는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로 당당히 말했다.

"왜 저런 게 바깥에 있는 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를…"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아는 대로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지금으로부터 40년쯤 전이던가. 그것들의 출현은 갑작스러웠다. 도무지 동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것들을 인류는 괴물이라고 몬스터라고 불렀다. 이질적이고 강한 놈들에대항해 인류가 믿을 수 있는 거라고는 오로지 자신들의 무기뿐이었다. 실제로 현대 무기의 화력은 대단했다. 어지간한 몬스터는 재래식 무기만으로도 쓰러뜨릴 수 있었을 정도로.

그러나 대형 몬스터나 아예 손쓸 도리도 없는 괴물들은 어떻게 해도 막아내기 힘들었다. 심지어 유럽의 서쪽 끝에 난데없이 떨어진 커다란 쥐와 지네를 닮은 뱀같은 괴물을 막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했던가.

사실은, 그러고도 막지 못했다. 폭격을 퍼붓고 화력을 집중해도 그것들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듯이 살아남아 인류를 괴롭혔다. 유럽이 멸망하는 건 고작 반 년도 걸리지 않았다.

핵무기의 사용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제는 수십 발의 핵을 떨어뜨리고도 죽이지 못했다는 것. 유유히 벗어나거나 미리 뚫어놓은 지하에 숨어들기도 했다.

그렇게, 인류가 멸망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년 남짓이었다.

"그렇게 된 거란다."

찬란했던 문명은 순식간에 멸망의 길에 접어들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도 지하에 숨어들어 희망도 미래도 없이 비축해둔 물자를 소비할뿐.

그러고도 질병에게 들키지 않게 기도하고 역병의 오염이 대기중에 퍼지지 않기만을 바라야만 했다.

이젠 다른 벙커에라도 살아있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어쩌면 이 세상에 자신과 이 어린 것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끝마쳤지만 이 아이가 이해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정말 조금이나마 맥락이라도 파악했으면 그걸로 족하다.

아리송한 표정의 아이는 역시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기야 무슨 상관이 있으랴. 어차피 전부 끝났는데. 애초에 이 아이가 벙커 문을 열기 전부터 인류에게 희망같은 건 없었다. 늦든 빠르든 멸망할 운명이었단 거다.

차라리 요즘 지하의 꼴을 보자면 이렇게 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수리공은 깊은 회한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를 질책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자신에게 그럴 자격 따위는 없으니까.

그는 장갑 낀 손등을 숨겼다.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고민을 하면서 수리공은 어두운 지하에서 다시 아이가 잠에서 깰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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