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화 〉 # 2 멸망의 굴레
* * *
"다 돌아본 것 같구나."
전부 둘러보고 돌아온 수리공이 그렇게 말했다.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지하에 남은 사람은 없다. 더 정확히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무래도 정말 둘만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이은하 또한 그럴 거라 예상했기에 힘겹게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수리공은 그녀에게 둘러보는 걸 권하지 않았다. 아무리 신비로운 힘이 있다 해도 아직 어린애였으니까. 참상을 보는 게 좋을 리 없다.
사체를 불태우는 데 걸린 시간은 사흘 남짓이었다.
지하 아래는 다시 한번 커다란 변화를 맞았고 살아남은 둘은 평온을 되찾았다.
"……."
잔뜩 있는 식량을 볼 때마다 이은하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나 많은데. 평생 먹고도 남을 만큼 차고 넘치는데 왜 엄마랑 나는… 그리고 우리는 왜 다퉈야만 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그걸 물을 때마다 수리공 할아버지는 씁쓸하게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그러지… 아니, 그럴 수도 없겠구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이제 더는 벙커의 뚜껑이 열리는 일은 없었고 이은하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렇게 3년이 더 흘렀을 때, 원래 노인이었던 수리공은 자신의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알았다.
그는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이 다 죽었다는 건 일손이 부족해졌단 뜻이다. 이 지하 벙커는 잘 지어진 시설이었지만 아무 노동도 없이 유지되는 유토피아 같은 게 아니다.
몇 사람 몫의 노동을 홀로 했으니 지칠 만도 하다.
심지어… 수리공은 고개를 흔들었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죽음이 두렵진 않다. 하지만 그 시기가 너무 빠르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긴 숨을 뱉었다.
저 어린아이에게 가르칠 게 아직 많은데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다못해 한 명만 더 사람이 있었더라면. 이미 몇 년이나 지났는데 체념하지 못했던 모양.
얼추 나마 혼자 살아가는 법은 알려줬다. 혹시 몰라 매뉴얼도 더 자세하게 작성해뒀다. 만약 잊어버리더라도 다시 방법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하지만 혼자서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타인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가족이건 친구건 사회이건 간에. 그러나… 이 아이는 정말로 혼자 남을 테고 누구도 곁에 있어 줄 순 없다.
시간은 더 빠르게 흘러갔고 수리공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더 엄격하게 혼자 살아갈 방법을 가르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생각보다 더 빠르게 찾아왔다.
***
이은하가 열다섯이 된 날, 노인은 이제 거동할 수 없게 돼버렸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품지 않았다. 기력을 잃고 쇠한 노인이 다시 일어날 리 없으니까. 하물며 의사도 없고 제대로 된 의료 시설도 없음에야. 결국 이때가 올 거란 걸 알고 있었기에 이은하는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걱정하며 떠나갔다. 여태 일러준 것들을 다시 확인하고 심지어 시체는 전염병이 퍼질 수도 있으니 곧바로 태우라고 신신당부하면서. 마지막에 머리카락에 남은 온기를 기억한다. 그래.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그는 분명히 자신의 가족이었던 거다.
눈을 감은 채 평온히 떠나간 수리공 할아버지는 다신 일어나지 못하리라.
홀로 남은 이은하는 묵묵히 그의 시체를 수레에 옮겨 간이 소각로에 집어넣었다. 옷은 벗기지 않았다. 그는 이대로 태우라고 말했으니까.
화르륵
근처에 있기만 해도 땀이 뻘뻘 흐르는 연기가 흘러나온다. 백골을 건지는 게 장례의 풍습이라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불 속에 타들어 가는 그를 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사실 알고 있었는데."
그는 단 하루도 장갑을 벗지 않았다. 이대로 태워버리라고 말한 것도 사실 어떻게든 손등을 숨기려한 거겠지.
이은하로서는 일의 전말을 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말해주지 않았다는 건 역시 그 또한 파벌의 사람이었다는 거겠지.
어렸을 땐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군의 높은 사람이었다던 그가 어찌면 이 벙커의 주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자초지종은 모르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었을 거다.
이은하는 답답한 숨을 들이켰다. 그가 홀로 남은 자신이 의문과 배신감을 느끼지 않도록 시체는 불태우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은하는 그가 근심 걱정 없이 떠나갈 수 있도록 그를 배려했다.
어차피 이미 너무 늦어버렸으니까. 그런 걸로 다퉈봤자 감정이 갈 곳은 없다. 또한 파벌의 사람들도 괴물에게 전부 먹혀버렸으니 복수도 하지 못하게 됐다.
멍하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이은하는 혼자가 되고 말았다.
***
며칠간은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수리공 할아버지가 걱정했던 대로 지하 벙커의 시설을 유지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잠자는 시간마저 줄여가며 쳇바퀴를 돌리는 듯한 나날이 이어졌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 없이 시설의 유지보수에만 신경을 기울여도 하루가 짧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을 때, 이은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더 살아봐야 의미가 있을까. 자신이 알던 사람들은 이미 진작에 전부 다 죽어버려서 평생 이렇게 혼자 살아가게 될 거다.
……톱니바퀴처럼 굴러갈 뿐인 삶에도 의미가 있을까.
자신의 안에서 의문이 휘몰아친다. 애써 신경 쓰지 않기로 했던 것들이 고개를 쳐들어 의문을 물어왔지만 이은하는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일은 손에 익어 수면도 충분히 취할 수 있었고 효율적인 작업 덕분에 여분의 시간이 생겨났다. 처음엔 아무 의미도 없다고 여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어느샌가 책을 읽고 지하에 있는 서적을 탐독하고 있었다. 그들의 흔적이, 생각이 적힌 책을 읽을 때만큼은 전부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다음은 오락이었다. 혼자서 체스를 두거나 보드게임을 하고는 했다. 아무 의미도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발악과도 같은 행위가 끝나는 데는 걸리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3년 정도는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며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이룰 것도 없고 이루고 싶은 것도 없다. 무너진 세계에 홀로 남아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게 점점 싫어졌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른 누군가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지하 벙커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지만 바깥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자신들이 그랬듯 다른 누군가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헛된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거기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굳게 닫힌 문은 그날, 수리공 할아버지가 닫아둔 그대로였다. 그리고 다신 열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바깥에는 온갖 무서운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을 터.
그런데도 가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먼저 마음이 부서질 것만 같아서.
***
바닥을 구른 이은하는 재빨리 힘을 모았다. 미지의 힘이 한데 모여 휘감기자 있는 힘껏 뻗어낸다. 초록색 피부의 이름 모를 괴물이 쓰러지는 데는 고작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저번에 벙커에서 보았던 그 괴물에 비하자면 초라할 정도로 약하다. 어쩌면 이 알 수 없는 힘을 쓰지 않더라도 이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역시 괴물이라고 전부 다 강하지는 않다. 개체별로 능력에 큰 차이가 있다.
분명 워그… 라고 했던가? 수리공 할아버지는 그 몬스터 정도면 귀여운 축에 속하는 거라고 했다.
어둠에 눈이 익었을 때, 이은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하와는 다른 의미로 어두운 세상. 알고 있다. 이런 걸 밤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곳곳에 널린 유골과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가 가득하다.
사람을 찾으러 나왔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멀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바닥에 앉은 이은하는 라이터로 불을 지피고 가져온 식량을 꺼내먹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엄마가 그렇게나 말했던 천장이 아닌 하늘. 어느샌가 태양은 저물고 은은한 밝은 달이 떠 있다. 처음엔 그게 그리도 신기했는데 이젠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힘들어도 싫지는 않다.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을 때, 이은하의 손 위로 알 수 없는 힘이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수리공 할아버지는 이 힘을 신비로운 것이라고 불렀지만 이은하는 알 수 있었다.
이건 신비하지도 희소하지도 않다고. 그도 그럴 것이 곳곳에 널린 게 이 힘이었으니까. 어디에도 있는 게 신비로울 리 없다.
왜 자신에게만 이런 게 보이는 걸까. 단순히 재능이라는 말로 설명해버려도 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걸까.
"……."
한숨이 나왔다. 결국 모든 의문은 자신이 풀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럴 자신은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 미쳐버린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까.
[암시(F)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종종 머릿속에 들려오는 목소리. 이은하는 차라리 자신이 미쳤기를 바랐다. 그게 아니라면 무언가 알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뜻일 테니까…….
***
지상의 생활은 지하의 그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지만 그래도 견딜 수 있었던 건 희망을 품고 있어서였다.
그 희망이 꺾인 건 10년이 더 지나서.
이젠 몇 번째인지 모를 비어있는 벙커. 희망은 그 크기만큼 절망으로 변해 깊은 물 속으로 사람을 끌어들였다. 남은 기력은 없고 이제 슬슬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 말고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애써 무시하고 외면해왔지만 이렇게까지 돌아다녀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 밖에 다른 이유가 있을까.
엄마도 수리공 할아버지도 이제는 그 얼굴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기억이 희미해졌다. 마치 자신이 깎여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 슬슬 이 방랑을 끝낼 때가 왔다는 뜻이다. 이 여행은 더는 의미가 없다.
이제 어지간한 몬스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쓰러뜨릴 수 있게 됐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길 수 없는 괴물은 있었다. 그리고 설령 모든 몬스터를 죽인다고 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리라.
할 만큼 했고 하고 싶은 만큼 했다.
……이제는 지쳐버렸다. 어차피 무의미한 발버둥이라면 그만 포기하고 편해지고 싶다.
그렇게 이은하는 자살을 결심했다.
결심했을 때, 주변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밤이 찾아오기라도 한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더는 놀랄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어떻게…?
'정말 그걸로 만족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은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설마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있었던 걸까? 자신의 그런 행동에 목소리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듯했다.
마치 이리로 오라고 손짓하고 유혹하는 듯하다.
'이제 전부 놓아버릴 거야? 넌 만족했어? 정말로?'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어쩔 수 없다고 체념했을 뿐이다. 현실에 순응하고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 벽 앞에 지쳐버렸을 뿐이다.
애써 포기했는데 목소리는 너무나 간단하게 본심을 끄집어내고 말았다. 이은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설령 그렇다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세상은 멸망했고 그동안 보아온 거라고는 몬스터뿐이었으니까.
'다시 해볼래?'
그 말에 이은하는 고개를 쳐들었다. 찾을 수 없었던 존재가 빛을 모조리 먹어치우고 어둠을 흩뿌리고 있었다. 키득거리는 목소리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다시 말했다.
'다시 해볼래? 내가 도와줄게.'
책으로 읽었던 악마라는 존재가 이러할까. 외도 같은 목소리가 마음 깊이 파고들었다. 멈춘 심장이 다시 뛰는 것만 같다.
다시 할 수 있다고? 엄마와 할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야? 검은 불꽃은 살랑이듯 자신의 마음을 간질였다.
'훨~씬 이전부터 다시 하는 거야. 아, 그렇지. 아예 처음부터는 어때?'
그건 너무나도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달콤하고 달콤해서 듣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가능할 거라고 여겨졌다. 어쩐지 목소리에게 불가능은 없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런다고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다고?
선의로 도와주는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목소리는 달콤했지만 상냥하지는 않은 것 같아서.
'지루하거든.'
고작 그런 이유로? 아연하게 올려다봤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키득거릴 뿐이었다.
신? 악마? 아니,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대신 바라고 또 바랐다. 정말 그런 게 가능하다면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자신에게 기회를 달라고. 이 지하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발버둥 치리라.
'그래. 그래야지.'
만족했다는 듯 비음을 흘리는 목소리. 황홀함에 젖어 무언가를 먹어치우기라도 한 것처럼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 때,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슴 한 켠이 서늘해졌다.
마치 무언가 소중한 것을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검은 장막이 거둬졌을 때, 이은하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네온사인과 화려한 조명이 가득한 세상.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만큼 많은 사람이 있었다.
빵빵거리는 경적이 울려 퍼진다.
비키라고 소리치는 것에 이은하는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하얗고 긴 선이 잔뜩 그려져 있다.
그게 횡단보도란 걸 알게 된 건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였다. 서기 2020년. 몬스터 사태가 벌어지기 바로 전날이었다…….
***
결과부터 말하자면 실패했다.
몬스터 사태가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왔음에도 도저히 혼자선 막아낼 수 없었다.
수리공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때처럼 빠르게 멸망하진 않았지만 결국 결과는 같다. 2년에서 3년. 고작 그 정도밖에 변하지 않았다.
신비로운 힘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할 수 있는 만큼 애썼지만 결국 지하에 숨어 살게 된 건 변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렇게라도 살아남은 사람이 더 많아졌다는 걸까.
이은하는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멸망을 벗어날 수 있는지 그 굴레를 벗을 수 있는지를.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이 신비로운 힘을 마력이라 부르게 됐다.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널리 퍼뜨렸지만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무시하는 이가 더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익혀봤자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이는 적었다. 이런 걸 보면 마력이라는 힘은 정말로 재능에 좌지우지되는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재능이 있어도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다.
"……."
회한이 담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좀 더 많은 이가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끔 해야만 한다. 이은하는 접근 방법을 달리해야 함을 깨달았다. 좀 더 체계적이고 익히기 쉬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그렇게 마력을 다루는 방법을 새로이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머잖아 그것은 마법이라는 이름으로 아직 지하 아래에 있는 이들 사이에 널리 퍼져가기 시작했지만 이은하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결과를 낳았다.
이 지하에서마저 계급과 분쟁을 일으킨 거였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짓밟고 깎아내리기 시작한 거였다.
……왜?
밖에는 몬스터들이 잔뜩 있는데 이 좁은 벙커 안에서마저 서로 다투고 싸워야 할까? 왜? 어째서? 원망해야 마땅할 몬스터는 전부 밖에 있는데…?
현실이라는 이름의 커다란 벽이 가로막는 것만 같다. 자신의 이상을 비웃고 세워진 높디높은 벽…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애초에 이들을 한데 모아 멸망에서부터 벗어나는 게 정말로 가능하긴 한 걸까? 어쩌면 이거야말로 인류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이기심으로 가득 찬 그들의 모습이 도무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일순간, 그들의 모습에 괴물의 모습이 덧씌워졌다. 하지만 그러는 한편 머릿속엔 울며 죽어가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
그들 모두에게 죄가 있는 건 아니다. 약한 이들은 그저 강한 이들에게 짓눌릴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게 착각이란 걸 깨달은 건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이은하는 무너지지 않고 견뎠다. 홀로 남았던 그때와 비교하자면 오히려 과분한 상황이었으니까.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차별하는 이들을 억누르고 약자의 호소를 들어주었다.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이어나갔다. 누군가는 뒤에서 자신을 욕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가슴 속에 응어리지는 어떤 감정을 애써 무시하고 계속해 마법에 매진했다.
시간이 흘렀을 때, 이은하는 어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자신에겐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거였다. 그 이유는 십중팔구 마력 때문이리라. 더 많은 마력을 지닌 이가 노화에 더 저항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혼자 남게 되리란 건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두 번째 세계에서 홀로 남은 이은하는 결국 멸망을 막을 수 없었음에 한탄하며 찾아올 죽음을 기다렸다.
그리고 죽음이 찾아오기 전, 무언가를 느꼈다. 그건 마치 공간이 갈라지고 세계가 변하는 듯한 개벽. 마치 '거울과 같은' 어떤 또 다른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마치 '처음 해보는 것처럼' 시행착오를 겪으며 어색하게 만들어져가는 또 다른 세계. 이은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그 세계의 일부가 자신에게 스며들었다. 그것은 마력과는 전혀 다른 보다 근본적인 힘이었다. 그 미지와 비슷한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속삭였던 검은 불꽃. 조금 다르지만 그것과 흡사한 느낌이었다. 마력이라 생각했던 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거다.
새로이 만들어지는 거울과 같은 세계. 꿈결처럼 유혹을 속삭였던 검은 불꽃. 종종 머릿속에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말까지. 그래. 이 세계는 어느 순간부터 미지로 가득 차 완전히 변해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 발버둥 치는 것뿐이다.
이번에도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또 검은 불꽃이 속삭여올지는 확신할 수 없다. 기적이란 건 그렇게 몇 번씩이나 찾아오는 게 아니니까.
그래. 그렇다면…… 직접 해보도록 하자.
마치 꿈결처럼 사라진 거울과 같은 세계. 하지만 상관없다. 자신에게 깃들어있는 이 힘이라면. 한 번도 다뤄본 적 없지만 얼추나마 방법은 알고 있다. 이미 검은 불꽃이 보여 주었으니까.
그렇게, 이은하는 세 번째 세계를 향해 차원을 도약했다.
이번에야말로 이 멸망의 굴레에서 벗어나겠다고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