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화 〉 #1 만상의 주인
* * *
세 번째 세계에 도착했다. 다소 오차가 있긴 했지만 기쁜 오산이었다. 2020년이 아니라 더 이전으로 돌아왔으니까.
미리 준비했던 만큼 이번엔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반드시 성공하고 말리라.
가장 먼저 이은하가 한 일은 마력의 존재를 공표하고 마법을 퍼뜨리는 거였다. 이전 세계에서 실감했지만 막상 닥쳐오는 순간에는 항상 늦고 만다. 그 이전부터 준비하고 알려야만 한다.
그렇게 이은하는 던전과 몬스터가 세상에 나타나기 전부터 마력과 마법을 전파했다. 처음엔 부정하던 이들도 하나둘 실증해가는 이들이 늘어나자 믿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혹시 이 시점에는 마력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번에는 가능할 거라고 여겼다. 멸망을 막을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었다. 그러면서도 실패할 때를 위해 대비했다.
거울 같던 세계에서 자신에게 스며들었던 알 수 없는 힘과 검은 불꽃이 보여주었던 그 힘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속삭이고 힘을 주는 이 목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헤치려 노력했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피곤과 피로에 절여진 삶이었다. 그래도 희망이 있었기에 이은하는 멈추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다.
뛰어난 이들을 직접 가르치고 선별했다. 몸이 날랜 이들에겐 싸움을 가르쳤고 두뇌가 명석한 이들에겐 마법을 알려주었다. 여태까지의 실패가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이번에야말로 멸망을 막고 평화가 찾아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3번째 세계에서의 멸망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순조로이 막아내는 듯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부르기를 역병과 질병이라는 두 재앙만큼은 어떻게 해도 막을 수 없었다.거기에 대항할 힘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아무리 싸워봤자 전선은 점점 밀려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이은하는 자신의 성장 곡선이 더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계속해 강해지고는 있지만 언젠가 멈추고 말리라.
……인간으로서는 결국 재앙을 이길 수 없는 걸까? 마법과 현대 무기를 결합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봤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마력의 영향으로 느리다고는 하지만 노화는 찾아온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은 점점 약해지고 말리라. 아직은 아니지만 분명 나중엔 그렇게 된다.
결국 이게 운명인 걸까?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인 걸까?
고개를 흔들고 자신을 분기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더라도 포기할 순 없다. 마지막에 홀로 남았던 세계가 어떠한지를 자신만큼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 쓸쓸함과 고독, 덧없는 희망이 저버리는 순간만큼은 다시 맛보고 싶지 않았다.
다음 기회가 필요하다 이은하는 거기에 집착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올바른 결과로 이끌어진 세계가 있으면 된다고. 그것을 바라고 바랐다. 그리고 세계가 완전히 멸망하기 직전, 이미 이번 세계를 포기한 그녀는 다음 세계로 갈 길을 찾기 시작했다.
흑린과 알 수 없는 세계에서 흘러나왔던 그 힘. 그 힘의 정체를 밝혀야만 한다.
***
이은하가 그 힘의 정체를 깨달은 건 정말 우연한 기회였다. 중앙아시아의 모든 국가가 사라지고 남은 인류의 숫자가 절반도 채 남지 않았을 때, 검은 불꽃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속삭여왔다. 그 힘의 정체를 알고 싶으냐고 물어왔다.
'어때?'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거냐고. 그럴 수 없지 않으냐고 말해왔다.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포기할 거라면 진작에 그만뒀을 터. 그럴 수 있을 리 없다. 그러자 즐겁다는 듯이 그것이 웃어젖혔다.
헛된 희망에 발버둥 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웃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거기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잘 봐.'
그렇게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낸 그것이 무언가를 먹어치웠다. 어떠한 상실감을 느꼈지만, 이은하는 자신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이 말해주었다.
이게 정수라고 불리는 것이라고. 육신보다도 더 근본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즉, 영혼이었다.
"아……"
그동안 찾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영혼? 그런 걸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분명히 여태 차원을 넘어왔던 힘의 원동력은 다름 아닌 영혼의 힘이었던 거다.
검은 불꽃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그라졌다. 마치 꿈결의 환상이었던 것처럼 밤은 물러가고 아침이 밝아 있었다.
***
업이란 것의 존재를 알게 된 뒤, 많은 실험을 했다.
주로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였고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서였다.
성과는 없다시피 했다. 결국 인류가 다시 지하로 숨어들 때까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왜? 어째서?
검은 불꽃은 그렇게나 간단히 영혼을 뽑아냈는데 왜 나는 그럴 수 없을까. 어쩌면 처음부터 사람에게 허락된 영역이 아닐지도 모른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어두컴컴한 길을 더듬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계속 걸었다.
포기하지 않겠다.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는…하지 않았다.
포기 하지는 않았지만 점점 조급해졌다. 인류는 계속해 궁지에 몰려갔으니까. 그럴수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됐다.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흑린의 이름을 부르짖고 신에게 빌기도 했다. 전부 무의미한 발버둥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실험은 계속 이어졌다. 처음에는 쥐처럼 작은 소동물로 실험했지만 점차 커다랗게, 몬스터까지도 그 대상이 됐다. 그리고는 인간의 시체를 써도 발견하지 못하자 결국엔.
"살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피가 튄 얼굴을 닦았다. 충혈된 그의 눈에 비치는 나는 아무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이를 묶은 그대로 실험을 강행했다. 단순하게 죽이는 것에서 시작해 흑린이 그랬듯 살려준다는 달콤한 유혹을 속삭이기도 했지만 모든 게 소용없었다.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게 손가락질했다.
더러운 마녀라고. 여태 자신을 마법의 시조라며 칭송하던 그들이 손가락질하며 욕하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보고서 이은하는 그냥 멍하니 있었다.
누군가가 던진 돌에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흘러내렸다.
포기하지 않고 다음 세계로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건 동시에 이번 세계를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름 악인을 구별했다지만 사람으로 실험했던 건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모르고 있던 게 아니다. 설령 이렇게 되더라도 했어야만 했다.
……포기하지 않았다.
정신 차리고 보니 이은하는 자신의 눈앞에 잔뜩 시체가 놓여 있는 걸 보았다. 서로에게 주어진 시간과 재능이 달랐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이은하는 또 한 번 무너졌다.
엄마가 죽었던 그때처럼. 하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심지어 불쾌하다고는 느끼고 있었지만 슬픔은 느끼지 못했다.
수리공 할아버지가 죽었을 때처럼 슬프지 않았다.
……마치 가슴 속 무언가가 도려내진 것처럼.
"아."
그제야 이은하는 영혼을 도려내는, 정수를 취하는방법을 알 수 있었다.
***
4, 5… 12… 26… 47… 111… 276……
덧없는 시간만이 계속해 흘러갔다. 277번째 멸망한 세계를 이은하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울적한 마음을 적시는 듯했다.
젖은 땅에 무릎 꿇은 채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드디어, 드디어 성공했다.
처음으로 재앙이란 존재를 죽이는 데 성공한 거다. 그건 이은하에게 있어 무엇보다 큰 도약이었다.
"아아…"
이제야 조금이나마 보답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이번 세계에서는 분명한 수확이 있었다.
모아둔 영혼의 힘으로 이은하는 다음 세계로 도약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이 영혼이라는 힘을 다루며 점점 자신이 변해가고 있음을. 한계라고 생각했던 지점을 몇 번이나 넘어설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수명의 한계나 노화마저 찾아오지 않았다. 이제 스스로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없게 됐다.
그래도 괜찮다.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의 반복에 따라역병에 이어 질병을 쓰러뜨릴 수 있게 된 건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네버랜드까지 공략한 이상, 바다를 포기하기만 한다면 이제 인류는 멸망하지 않을 터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
이은하는 눈물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메말랐던 감정의 둑이 터져 흘러넘치는 듯했다.
왜냐하면, 끝난 거니까. 이걸로 전부 끝났다. 아아, 그래. 기나긴 여정이 드디어 끝난 거다.
멸망을 피한 인류는 이은하를 칭송했다. 마법의 시조이자 가장 위대한 이라고 목청껏 소리쳤다. 비록 바다의 재앙은 남았지만 이걸로 만족했다.
드디어……!
처음으로 멸망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인류는 위축돼 있었지만 언젠가 다시 도약할 게 분명하다. 이 앞으로 펼쳐진 건 분명 찬란한 미래이리라.
……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흘러가진 않았다.
기대를 배신하듯 홀연히 나타난 그것이 멸망을 피한 자신을 비웃듯 세계를 먹어치우고 말았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차올랐던 기쁨은 한탄으로 뒤바뀌었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어째서 저런 불합리한 존재가 있는 걸까.
기껏 멸망을 피했건만, 더한 끝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그건 이은하가 처음으로 맞은 종말이었다.
***
무의미하게 세계는 반복된다.
멸망을 막아봤자 종말이 찾아온다. 종말만큼은 도저히 어쩔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구원을 부르짖었지만 이은하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구원을 바랐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정답을 알려달라고 빌었다. 이따금 무너진 정신은 몇 번인가 세계가 반복되면 다시 돌아오고는 했다.
거기서, 이은하는 발상을 달리했다.
종말을 피할 수 없다면 하다못해 이 시간 만이라도 반복하자고 진심으로 바랐다. 그렇게 이은하는 억겁의, 영원의 굴레 속에서 서서히 마모되어갔다.
그러다가, 몇 번인가 반복하다가 어떤 의문이 생겼다.어째서 종말이 찾아왔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왜냐하면 분명 자신의 세계에서는 종말이 오지 않았으니까.……어쩌면, 하는 생각에 이은하는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실험해보았다.
예상대로였다.
멸망을 막으면 막을수록 종말이 찾아오는 시간이 빨라지는 거였다. 즉, 무슨 짓을 해도 이 굴레는 벗어날 수 없다. 그 사실에 이은하는 또다시 절망했다.
포기하지 않았지만 계속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노력이 결국에는 종말을 앞당기는 꼴이었으니까.그런 무의미한 시간이 영겁처럼 흘렀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이은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절망하던 그녀는 누군가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한 번이 아니라 수십 수백 번이나 반복된 부르짖음이었다.종말이 찾아와도 대적할 수 있을 리 없는데도 끝까지 발버둥 치는 이들이 있었다. 무의미한 발악인 걸 모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런 반복 속에서 이은하는 더 나아갈 자신이 사라지고 말았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이젠 도무지 더 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
하지만 희망은 언제나 절망 속에서 피어오르는 법.
어느샌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을 깨닫게 됐다. 스킬과 마력이란 게 도대체 어디서 시작되는지 알 수 있다면… 어쩌면 그 근원을 취할 수 있다면 종말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실험이 이어졌다.
스킬에 관한 실험. 몬스터들이 스킬을 획득하는 그 순간을 확인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어린 용종이 언제부터 용린과 용혈을 얻는지 알기 위해 그들을 가두고 시험했다.
그걸로 부족하면 자르고 찔러서 재생을, 경화를 획득하는 순간을 포착하려 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겐 영원과도 같은 기나긴 시간과 기회가 있다. 무한한 반복 속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밝혀낼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마침내.
"……."
밝혀낸 진실은 어렴풋한 추측보다 더 참혹한 것이었다.
종말과 스킬의 근원은 되는 목소리는 서로 다르지만 다르지 않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를 더 절망에 빠뜨린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스킬의 근원이 되는 그 무언가는 죽어있었다. 그 말인즉, 자신이 근원을 취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여태까지 해왔던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듯했다. 자신에게 깃들어있는 스킬이라 명명된 힘이, 이 힘이 너무 가증스러웠다.
발버둥 쳐봤자 소용없다고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그래서 그냥 웃어버렸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색이 섞이고 소리가 섞이는 듯했다. 더 이상 뭘 해야 하는 걸지도 알 수 없다.
거기서 모든 걸 놓아버렸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대신 그 자리에 남은 건 끝없는 증오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길.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방황 속에서 최후의 일선을 넘어버리고 말았다.운명이 이렇게나 자신을 가로막는다면 더 이상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
그렇게, 이은하는 세계를 멸망시켰다.
오로지 업을 쌓기 위해서, 정수를 취하기 위해서.
어디선가 누군가의 조소가 들린 것 같지만 상관없다. 종말을 향해 부르짖던 외침이 자신에게 향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신에게 거스르는 게 이단이라면 기꺼이 그리하리라. 인류에게 등 돌린 변절자, 탕아라고 손가락질하더라도 상관없다.
설령 모든 이가 자신을 부정하더라도 꺾이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리라.
"나는 이단의 탕아가 되겠어."
남은 길은 오직 하나뿐. 반드시, 종말을 죽이고 말리라. 이 앞에 펼쳐진 외도를 기꺼이 걸으리라.
검은 희망을 품고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
어느샌가 다른 이들이 그녀를 만상의 주인이라 부르게 될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
이은하가 발버둥 칠 때마다 세계는 점점 안정돼갔다.
고작 2년 만에 멸망했던 세계는 이제 와서는 수십 년이나 이어지게 됐다. 결국 종말을 피할 순 없지만 멸망이 오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는 정도는 가능했다. 재앙을 죽이지 않고 묶어두면 되는 거였으니까. 지금의 이은하에겐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무언가 알고 싶은 것이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을 때마다 그렇게 해왔다.
스퀘어라는 체계를 만들었고 누구보다 두각을 드러낸 이를 찾아내고 가르쳤다. 그렇게 자신들의 세계를 지킬 수 있는지를 시험했다. 실의에 빠진 그녀는 답을 찾기 위해 고민했고 수많은 세계가 끝을 맞이하는 동안 계속해 외도를 걸었다.
그러는 와중에 이전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외도를 걷는 자신을 막아서는 이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 거였다. 단순히 군과 경찰뿐만이 아니라 분명 마력을 사용하는 이들이었다.
……이번 세계에서는 분명 마력과 마법에 관해 퍼뜨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명백한 이레귤러였다.분명 같은 절차를 밟았는데도 어째서인지 계속 그렇게 됐다. 그래봤자 대단치 않았지만 자꾸만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끼어드는 것만 같아 거슬렸다.
그것이 여태 멸망한 세계의 의지라는 걸 알게 된 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더 정확히는 끝을 맞은 세계의 주민들이요, 자신의 세상을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없애버릴 가치도 없는 덧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 덧없는 이들로부터 이은하는 마침내 답을 찾았다.죽은 이들의 의지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 거기서 근원에 대한 일을 떠올린 것이다.죽어서도 그 의지가 남아있다면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시스템이라 부르는 근원을 되살릴 수 있는 게 아닐까.
종말과 근원은 하나에서 비롯된 다르면서도 같은 존재. 종말과 근원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 하나로부터 비롯됐다.
그렇다면 반대로 모든 것을 취한다면 다시 하나가 되지 않을까. 뿌리까지 더듬어 갈 수 있지 않을까. 근원과 같은 존재가 되지 않을까……그리하여이은하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모으기 시작했다.그들의 피를 취해 하나의 병에 담았다.
그게 엘릭서를 만들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혼자 손으로 모든 걸 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조직을 설립하기로 했다.
조직에 끌어들인 이들은 매번 달랐다. 훗날 창선이라 불리게 될 주백운과 검성이라 불리게 될 강훈. 환영의 나비 아멜리아 모레스트. 진홍의 마법사 홍유리. 또는 이 세계의 자신이나 원래 세계에선 태어나지 않았던 동생까지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엘릭서를 만들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엘릭서가 아니라 거기에 한없이 근접한 것. 아쉽게도 자신이 원했던 것과는 좀 더 다른 부수적인 성과였다.
비록 엘릭서는 아니라지만 그에 한없이 근접한 그것을 이은하는 모조 엘릭서라 부르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수많은 세계가 끝을 맞이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무수한 세계조차 정말 영원같은 건 없다는 걸 알려주듯 끝이 도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흘러 그가 나타났다. 잃어버린 자들의 마지막 희망. 설령 도망치고 쓰러지면서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최후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그건 몬스터가 되어버린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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