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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91화 (291/407)

〈 291화 〉 #129 격돌

* * *

먹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피와 살을 받아들인다는 것. 비록 삼키고 있는 건 피와 살이 아닌 업이었고 먹어치우는 건 입이 아니라 혼무였지만, 사실 그렇게 크게 다르진 않다.

존재를 먹어치움에 따라 필연적으로 그녀의 기억과 감정이 자신에게로 스며들고 있었으니.

포식을 반복할 때마다 강렬하게 전해지는 기억과 감정.잃어버린 자들 모두의 것보다도 그녀에게서 스며든 것이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자아가 흐려진 잃어버린 자들보다도 더 오랫동안 바라고 바라왔기 때문에. 영겁과도 같은 시간 속에서 영원을 바라게 된 그러한 삶을, 시간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흑린의 변덕. 여왕의 창조. 온갖 우연이 겹친 결과가 지금의 만상의 주인이었고 그녀의 발버둥이 멸망으로부터 도망쳐 세계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무너질 듯한 좌절과 견디기 힘든 실패를 수도 없이 겪으며 마침내 여기까지 도달한 거다.

분명, 그녀가 없었더라면 이 모든 것은 시작되지 않았으리라. 여기까지 오지도 못한 채 멸망만이 끝없이 반복됐으리라.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

늑대는 그 방식을 용납하지 못했다.

자신의 자아를 어지럽힐 정도로 강렬하면서 끔찍한 기억들은 이게 정말로 생물의 정신 상태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그것들에 이를 악물고 저항했다.

다시금 기억이 스며든다. 자아의 경계가 흐릿해져 이것저것이 뒤섞이고 만다. 감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의 죽음을 목도했고 그만큼 많은 세계가 멸망한 것을 직접 보아야만 했다.

그 속에서 죽어간 이들의 원성이 자신에게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사무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탕아에 가담했던 비뚤어진 이은하의 조소, 마법에 대한 열망으로 인류에 등 돌렸던 홍유리의 광소, 마녀가 돼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백소율의 흐느낌. 바로 다른 세계의 자신이 아는 이들의 목소리였다.

늑대는 그것들에 있는 힘껏 저항했다.

타 세계의 이들이 자신이 아는 이들과 뒤섞여 기억에 혼선이 생긴다.

……또한, 무엇보다도 만상의 주인이 겪어온 모든 일이 뇌리를 셀 수 없을 만큼 스쳤다. 괴롭고 지독했던 영겁의 시간이 영원처럼 계속해 떠오르고 있다.

그래. 굳이 말하자면 만상의 주인이란 존재는 이 세계에 있어 필요악과도 같은 존재였다.

……동정하진 않는다.

그 비참함이야말로 그녀의 삶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니.

[업 743.6% → 755.6%]

이미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기억과 감정은 점점 더 강하게 스며들어 자아와 가치관까지 영향을 미치고 녹아든다.그럼에도 늑대는 망설이지 않았고 먹히는 와중에도 만상의 주인은 웃고있었다.

"어때?"

자신은 맛있느냐고 의미심장하게 물어온다. 그 짓궂은 물음에 늑대는 생각했다.

"역시 다르군."

"……뭐?"

만상의 주인과 이은하는 역시 다르다고.설령 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지금의 이은하가 그녀처럼 되지는 않으리라.

물론 그 시간 동안 그녀가 겪은 일들은 복잡한 것이었고 설령 알게 됐다 하더라도 자신이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게 있다면공감할 수 있다고 죄가 사라진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녀가 힘든 삶을 보낸 것처럼 반대로 영문도 모른 채 그녀의 손에 죽어 간 이들의 기억과 감정마저 가지고 있다.강렬한 감정에도 그들의 바람만큼은 빛바래지 않고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은 그대로다. 흑린을 쓰러뜨리고 만상의 주인마저 넘어서야 한다.

"……."

[업 917.6% → 929.4%]

무수한 반복 속에서 마침내 충분한 업을 보유하게 된 순간, 늑대는 그 너머를 넘보았다.

초월의 영역. 이제서야 다다를 수 있게 된 그곳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공간이 갈라졌다.

"여기 숨어 있었네?"

***

생각보다 더 빠르게 나타난 흑린이 귀에 걸릴 듯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불꽃의 형상이 이글거리며 귀신의 모습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둘의 시선은 흑린이 아닌 그 손에 쥐어진 것에 향해 있었다.

칠흑의 불꽃으로 빚은 검과 그 손잡이에 매달려 길게 늘어진 붉은 해골. 불길한 그 검에 자연스레 시선이 가고 말았다.

"……!"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검이야말로 흑린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다고. 감히 측량할 수도 없을 만큼의 업이 거기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것은 흑린 본인이 가진 것보다도 더 많은 양. 아니, 자신을 포함해 이 자리의 전원을 합쳐도 저 검에는 비할 수 없다. 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오염되고 만다. 그뿐만 아니라 이 공간 전체의 중심이 저 검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러다 늑대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고 있단 걸 깨달았다.

"역시 보는 눈은 있구나."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자신을 비웃는 것일까. 아니, 그런 기색은 없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

검을 쓰다듬은 흑린은 가볍게 휘둘렀고 해골들이 부딪쳐 찰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변한 건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생각했지만 전혀 다른 장소에 있었다.차원의 틈새를 없애버리고 두 개의 세계를 강제로 이어 붙인 것이다.

"……."

터무니없다. 흑린이 숨기고 있던 건 기적 이상의 것.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허무맹랑한, 말도 안 되는 검을 만들어낸 건지 알고 싶을 정도였다. 차라리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진화한 이후에 싸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그럴 시간적 여유는 없다.

결국 이대로 싸울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래서, 준비는 끝났어?"

키득거리며 그것이 말해 왔다.

"어때? 제일 마음에 드는 것만 모은 건데."

손잡이 끝에 매달린 붉은 해골들을 말하는 것이다.

"넌 특별히 첫 번째로 걸어 줄게. 그런데… 동물 머리뼈는 걸어본 적이 없어서 잘 될지 모르겠네?"

늑대는 실소했다.

머리뼈를 걸기는커녕 스치기만 해도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할 텐데. 그렇게 일방적인 대화를 듣고 있는 와중에 길게 뻗은 사슬이 그녀를 속박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말뚝이 틀어박힌다.

미리 만들어둔 게 아니라 흑린이 있는 그 공간 자체에 투영한 마력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로 쓰러뜨릴 수 있을 리 없다.

흑린은 권능과 존재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하나였으니까. 오히려 말뚝이 불타오르며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제야 흑린은 만상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거래하자."

"거래?"

"네 피. 그것만 주면 순순히 돌아갈게."

그 말에 흑린은 콧소리를 냈다.

"돌아간다고? 돌려보내줄 생각이 없는데?"

"……내 목숨을 줄게."

의외라는 듯 흑린은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게 진심이란 걸 알 수 있었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종말을 막은 다음에 자신에게 그 목을 바치겠단 뜻이라는 걸.

그러나

"네 머리뼈는 이미 여기 있는데?"

해골 하나를 툭툭 건드린 흑린이 키득거렸다. 시선을 따라 불길이 타오른다. 영원의 영향으로 그 속도는 느렸기에 어렵잖게 피할 수 있는 정도였다.

아마 그건 이전 세계의 이은하 중 하나이리라.

"……."

협상의 여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애초에 저 검을 꺼내 든 이상 흑린은 물러나지 않으리라.

늑대는 이빨을 드러냈다.

결국 이 싸움을 피할 순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

불어 거인의 잔재와 같은 것들이 무수하게 꿈틀거린다.

그런 와중에 홍유리는 이것들이 증식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망할…"

기껏 하나를 쓰러뜨리면 분열해 둘이 된다. 징그럽다못해 끔찍하다. 심지어 그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

"apa albastra."

평소엔 사용하지 않았던 인디고 스퀘어의 마법. 특기인 불의 마법보다 이쪽이 더 효과적이란 건 알지만…

"역시 마음에 안 들어."

홍유리는 짧게 혀를 찼다. 역시 빙결계 마법은 성에 안 찬다. 차라리 시원하게 터뜨리는 거라면 모를까.

하기야 그렇게 되짚어보면 애초에 불의 거인을 쓰러뜨리지 않는 게 정답이었으리라. 슬라임같은 것들의 집합체라는 사실 자체를 몰랐으니 어쩔 수 없지만 어쩌면 자신이 아니라 하연의 대마법으로 꽁꽁 얼렸다면 생각보다 쉽게 끝났을지도 모른다.

증식하는 그것들에 헌터들이 밀려나고 꾸물거리는 불길에 군대가 후퇴하고 있었다. 세워진 빙벽이 그 자리를 가로막으나 빠르게 녹아내린다.

무식한 불꽃 몽둥이가 휘둘러지자 홍유리는 맨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그 힘에 조금 뻐근하긴 했지만 충분히 견딜만하다. 오우거의 몽둥이가 서서히 진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더니 펑 터져 버린다.

화려한 폭죽처럼 터졌지만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나 다를까 또 분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 조금 떨어진 곳에선 붉은 창을 낭창낭창 휘두르며 종횡무진 몬스터의 무리를 휘젓는 여인이 있었다. 냉기를 두른 창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인데 창술이 더해지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딱 한 마리를 제외하고서.

불꽃으로 형상을 이룬 늪의 용. 원체도 강한 몬스터였지만 무기만 닿을 수 있단 점에서 더 까다롭다.

하물며 놈이 입을 벌린 순간, 독액 대신 불꽃이 뿜어져 나오자 은자림은 바닥을 굴렀다. 동시에 언제 그랬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창은 용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폭사하는 마력. 형상이 일그러지고 분열하려하자 은자림은 날카로운 눈으로 살피고는 그 하나하나를 다시 꿰뚫었다. 얼어붙은 그것들이 얼음 알갱이처럼 변하더니 산산이 부서졌다.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결국엔 작은 것들의 집합체였기에 한 번의 공격으로는 뭘 어떻게 하든지 쓰러뜨릴 수 없다.

슬슬 냉기가 약해진다고 생각할 때,

"încântare : Îngheaă. Multiplex."

차가운 목소리가 뇌까리자 창에 실린 냉기가 강해졌다. 비단 자신만이 아니라 맞서는 헌터 모두의 무기에 새로이 힘이 실린다.

과연 여명의 1팀 부팀장. 대단한 마법사라고 생각하며 은자림은 다시 불꽃의 용을 압박해 갔다.

***

강태호와 강태준. 검성과 검공의 협공을 받으면서도 창염은 계속해 타오르고 있었다.

실력 차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큰 차이는 아니다. 그런데도 쓰러뜨리지 못하는 건 2:1의 승부라기보단 둘과 수십의 싸움에 가까워서였다. 창염도 거슬렸지만 무엇보다 갑주에 깃든 악귀ㆍ원령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게 상대하기 힘들다.

"……!"

기회를 잡은 강태호가 4번 타자라도 됐다는 듯이 들고 있는 것을 힘차게 휘둘렀다. 검과 팔뼈의 충돌. 실제 스틸 자이언트가 직접 때리는 듯한 충격에 강훈이 밀려나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든다.

발바닥에 담은 마력을 터뜨린 강태준은 자신이 가는 길을 가로막은 붉은 대검을 보고 탄력 스킬을 이용해 그 아래로 파고들었다.

품속으로 들어온 순간, 갑주가 일그러지며 악귀의 얼굴이 드러난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한 행동에 마력을 가득 담아 검을 찔렀다.

갑주를 꿰뚫은 검이 깊게 파고들었지만 강훈은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둘이서 쓰러뜨릴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가 이것. 공격이 제대로 먹히질 않아서였다. 되려 검신을 붙잡은 그로부터 창염이 타고 넘어오자 발로 찼지만 고작 그 정도엔 꿈쩍하지 않겠다는 듯 굳건했다.

하지만 푸르고 커다란 궤적엔 결국 손을 놓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기어코 갑주에서 떨어진 악귀마저 비명을 지르며 소멸했다.

"괜찮수?"

동생이 묻는 안부에 강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는 사이에도 갑주는 재생된다.

"……어이가 없군."

"벌써 몇 번째요?"

여섯 번이었나 일곱 번이었나. 검을 털어 얼음 알갱이를 떼어낸 강태준은 혀를 찼다.이 세상에 불사같은 건 없다. 그 강한 재앙들마저 쓰러졌는데 강훈이라고 예외는 아니리라.

하지만 문제는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머리와 심장도 급소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여전하구나. 생각이 깊은 건."

"……?"

"그건 네 장점이었지."

싸우는 도중에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기에 동생과 함께 지금의 여명을 만들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적어도 이 싸움에는 불필요하다.

자신은 이미 죽어 이 혼만이 갑주와 시신에 깃들어 있을 뿐이니까. 오랜 옛날, 네버랜드에서 죽었던 자신을 데려와 만상의 주인이 주술로써 붙잡아두었을 뿐이다.

그 주술이란 영혼을 묶는 비술.

더 쉽게 말하자면 깃들어 있는 모든 영혼. 즉, 악귀ㆍ원령을 전부 죽이는 게 아니라면 쓰러질 일은 없다.

그래서 바다의 재앙 때는 놀라고 말았다. 아무리 재앙이라 하더라도 일격에 자신을 쓰러뜨릴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한 번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은 너무나도 격이 다른 재앙이었을 뿐이다. 시기적절하게 그녀가 오지 않았더라면 거기서 끝이었을 터.

달리 말하자면 아직은 자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단 하루라도 좋다. 종말이 찾아오는 걸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발버둥 치리라. 설령 그것이 두 아들을 베어넘기는 것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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