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화 〉 #129 격돌 (2)
* * *
무식한 칼날에 부딪히자 전기가 통한 것처럼 손끝이 저릿저릿해지는 감각이 느껴진다. 힘과 힘의 충돌이 격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기의 질이 한참이나 부족하다.
제련되지도 않은 스틸 자이언트의 팔뼈와 화산각룡의 뿔을 가다듬은 일품. 견디고는 있지만 오래가지는 못하리라.
"망할 놈의 템빨…"
그게 원래 자신의 무기였다고 생각하니 더 열불이 치솟는 듯하다.
"아들래미 칼 뺏어서 쓰니 좋수?"
"좋은 칼이구나."
담담한 음성과 함께 창염 속에서 극한의 냉기가 피어오르자 강태호는 힘껏 주먹을 뻗었다. 두꺼운 얼음이 단번에 깨져나간 순간, 갑옷의 틈새를 단단히 쥐고서 메쳤다.
그가 멀리 날아가는 도중, 대검에 등을 긁히고 말았다. 상처 자체는 얕았지만 파고든 냉기가 지독하다.
인상을 찌푸린 강태호는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검성의 모습을 보았다. 마력을 힘껏 끌어올려 냉기를 털어버리고는 둘이 충돌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도 던진 게 아주 쓸모없지는 않았는지 그 틈을 노려 심장을 꿰뚫고 발로 차 밀어내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이번에도 죽지 않았다는 점. 아예 가루로 만드는 게 아니라면 소용없다는 걸까.
허공에 손을 뻗은 강태호는 그대로 힘을 주어 무언가를 쥐어짜듯 으스러뜨렸다. 단말마를 내지르며 원령이 소멸하자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분명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는데 조금 어지러운 게 사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생각을 떨쳐낸 강태호는 금세 거리를 좁히고 팔뼈를 휘둘렀다.
분명 강태준과 검격을 나누고 있음을 보았는데 보지도 않고 피해버린다.
그 사실 자체에 놀란 건 아니다. 뛰어난 헌터라면 보지 않고 피하는 것쯤이야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으니. 다만, 그가 피했다는 건 필연적으로 그 너머에 있는 이가 휘말리게 된다는 거였다.
"그대로!"
어떻게든 방향을 꺾으려던 강태호는 그가 하는 말에 에라 모르겠다 힘을 더했다.
마치 새가 착지하듯 사뿐한 동작으로 팔뼈 위에 올라탄 그가 가볍게 뛰어올랐다. 뒤늦게 그 생각을 읽은 강태호 또한 있는 힘껏 호응했다.
팔뼈의 끝부분을 밟고 다시 뛰어오른 강태준이 표적을 인지했다. 그러는 사이, 강태호는 공격을 피했던 그가 다시 자신을 노리는 걸 알 수 있었다.
뛰어난 헌터라면 굳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그건 강훈에게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었다.
피하는 대신 강태호는 바닥을 내리찍었다. 전력을 다해 마력까지 담긴 일격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위력을 발했다. 그 단단하기로 소문난 스틸레톤과 같은 재질의 미궁 바닥이건만 단번에 깨부숴진다.
파편이 시야를 가리자, 붉은 대검은 그 전부를 부서뜨렸다.
범상치 않은 속도였지만 검이 다가오는 방향만큼은 명확히 알 수 있었기에 팔뼈를 방패처럼 세우고는 검격을 막아냈다. 저 멀리까지 떨어져 나가 벽에 처박혔지만 덕분에 어찌어찌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곧바로 뒤쫓아오는 그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했다. 태세를 잡지 못한 강태호는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천장을 거꾸로 밟고 뛰어내린 강태준의 검이 쏜살같이 갑주를 꿰뚫었다. 배후에서 복부 앞까지 검날이 드러날 정도로 깊게 박혀 달려오던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지만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엎어진 그대로 팔이 제멋대로 꺾이더니 강태준의 검을 붙잡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반대쪽 팔은 무릎의 뒤쪽으로 파고들더니 무시무시한 악력으로 쓰러뜨리려 하고 있다.
일어서려는 것보다 붙잡는 힘이 더 강하다. 순수한 힘에서 밀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힘줄이 끊어지는 듯하자 강태준은 마력을 일으켰고 뒤따른 강훈의 마력이 퍼져나간다. 마력의 겨룸에서 우위를 차지한 건 이번에도 강훈이었다. 미세한 우위로 서서히 밀어내더니 악령이 타고 올라온다.
제법 죽인 것 같은데 도대체 몇 마리나 있는 건지. 무릎을 포기하면서까지 어쩔 수 없이 떨어지자 곧 일어난 강훈은 언제 다쳤냐는 듯이 태연한 모습 그대로였다.
"…16번째."
미세한 실력 차이를 숫자의 우위로 압도해 인간이었다면 치명상이었을 공격을 16번이나 성공시켰는데 아직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징그러울 정도로 끈질기다. 압도했다고는 하지만 막상 상황이 좋진 않았다. 16번이나 몰아붙였다는 건 그만큼 위험을 감수하기도 했다는 뜻이다.
아까의 충격으로 늑골이 폐를 찌르고 악귀ㆍ원령의 영향으로 머리가 지끈거려 시야가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반대로 16번 죽였다고는 했지만 눈앞의 그는 여전히 굳건했기에 꿈이라도 꾼 게 아닐까 싶은 지경이었다.
강훈은 가볍게 대검을 휘둘러보았다. 무게도 무게였지만 2m를 훌쩍 넘기는 거구인 강태호에게 맞춰진 크기 때문에 휘두르는 게 불편하다. 분명 좋은 검인 건 확실했지만 자신이 사용하려면 좀 더 개량이 필요하리라.
"아직도 생각이 바뀌지 않았느냐?"
마지막 최후통첩을 하듯 묻는 말. 지끈거리는 머리에 말할 기력도 없어 강태호는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이죽거렸다.
"그래. 그럼 끝내자꾸나."
끝까지 마음을 돌릴 생각은 없는 모양. 어차피 끝을 내기 전에 물어봤을 뿐이다. 애초부터 그럴 거라 생각했기에 새삼 아쉽게 느껴지진 않았다. 붉은 대검에 타오르는 창염이 더욱 커져가더니 거세게 휘몰아친다. 마치 푸른 회오리를 두르기라도 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검에만 머무르지 않고 아우라처럼 전신을 휘감자 여태까지와는 다른 위압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치 있을 자리를 뺏기기라도 한 것처럼 악귀와 원령이 비명을 지르며 뿜어져 나오더니 이리저리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그 전부가 33개체. 거기에 강태호는 실소했다.
"징그럽게도 모아놨구만."
분명 살아생전엔 보지 못했던 거니 분명 저 거슬리는 창염도 악귀와 원령을 두르는 것도 사후에 얻은 능력일 터.
"그쪽에 붙어서 재미 좀 봤구만?"
설마 아직까지 꿍쳐둔 게 있을 줄이야. 둘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여기가 묫자리가 될 듯하다.
자신도 자신이었지만 형님은 마력이 바닥난 모양이었으니. 티는 안 내더라도 숨길 수 없을 만큼 움직임이 둔해져 있다.
도망치는 게 정답. 혼자라면 모를까 둘 다 죽을 순 없으니까. 분명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아니더라도 탈출시켜야만 한다. 고원에 이어 여명까지 사라질 순 없으니까. 튀자고 말하려던 자신에게 들려온 말은 조금 뜻밖의 것이었다.
"보이나?"
"……?"
"연결돼있다."
연결됐다는 게 무슨 뜻일까. 갸웃거린 강태호는 눈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악귀ㆍ원령들과 갑주로 이어진 미세한 선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좀 알 것 같군."
정확한 방법은 모른다. 하지만 이어져 있단 점에서 뇌리에 어떤 생각이 번뜩이듯 스쳤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육감이 틀린 적은 거의 없기에 확신에 가까웠다.
"…여태까지 16번. 그리고 앞으로 33번 남았다는 거겠지."
강태호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저것들을 전부를 죽이지 않는 한 쓰러뜨릴 수 없다는 건가? 그게 무슨 개사기 같은… 무슨 게임 속의 보스 몬스터도 아니고.
"예리하구나."
그런데 그것을 시인하는, 굳이 숨길 것도 없다는 듯한 긍정이 돌아오자 강태호는 표정을 구겼다.
그 대답이 오히려 그나마 있었던 희망을 짓밟는 듯하다. 이제야 전력을 드러낸 적을 상대로 33번이나 죽여야 한다고? 16번 죽이는 동안 마력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데?
오히려 덕분에 마음이 굳어졌다.
"거, 튑시다."
"……?"
"뭘 그리 보쇼? 저딴 걸 어떻게 이기겠다고? 여기서 개죽음당해봤자 달라지는 게 뭐요?"
고작해야 시체가 둘 늘어날 뿐이겠지. 자신이 생각하기에 앞으로 죽일 수 있는 횟수는 잘해봐야 서너 번이다. 그래봤자 서른 번 더 남아있다는 거다.
여벌 목숨도 한두 개여야지. 50번 가까이 가지고 있으니 자꾸 동귀어진하려던 행동들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네버랜드까지 함께 왔던 인원들. 그들을 돌려보내서는 안 됐다. 전부 다 같이 둘러싸고 공격했어야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판단미스였다.
"그렇지만도 않아."
"……미쳤수?"
"저것들이 갑주 바깥으로 나왔다는 건 죽이긴 쉬워졌다는 뜻이다."
"대신 우리가 뒈지기도 쉽겠지!"
스산한 살기가 장내를 지배한다.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아까부터 몸이 떨리는 게 정상이 아니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 걸음엔 여유마저 묻어 있어 확실하게 자신들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엿보인다.
"그냥 튀고 다 같이 패버리는 게 맞다니까!"
강태호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하지만 강태준은 말없이 파우치에서 꺼낸 포션을 들이켰다. 한동안 강태준이 말이 없자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어깨를 잡으려 한 순간,
"진짜 미쳤소!"
멱살을 잡아서라도 튀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오히려 손목이 잡히고 말았다.
"승산은 있다. 애초에 도망칠 수는 있을 것 같나?"
정신 차리라는 듯한 말. 서로 마력도 바닥난 와중에 어떻게? 최소한 하나는 미끼가 되어야할 터.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강태호는 이를 악물었다.
"그럼 내가!"
"승산은 있다고 했잖나."
그럴 필요 없다며 강태준은 포션 하나를 더 건네더니 얼른 마시라고 부추겼다. 이딴 걸 마신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싶지만 언 발에 오줌이라도 눠야 할 상황이란 걸 인지하고 있기에 들이켰더니 목구멍에서부터 구역질이 치솟아 올랐다.
"……?!"
당장 뱉어버릴 뻔한 걸 삼킬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초인적인 인내심 하나뿐이었다. 이 음식물 쓰레기 같은 건 대체 뭐냐고 소리치기도 전에 전신을 휘감는 마력에 고양감이 커져갔다.
뒤늦게 포션 병을 보자 검붉은 색이 그득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힘겹게 입 모양으로 물어본 순간 돌아온 답은,
"포션에 산삼과 용혈을 섞었다."
"……."
"죽기 싫으면 마력을 전부 쏟아내야 할 거다."
덕분에 도망칠 생각은 못 하게 됐지 않느냐는 말에 강태호는 쌍심지를 켜며 눈을 부라렸다.
"염병, 악질이구만."
***
"여기면 됐단다."
여왕의 손이 흰 사슴의 목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가장 높은 건물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차원을 열고 넘어간 여파가 남아있어 깨져있는 모습이 똑똑히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너머. 머나먼 차원에서 여기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격변하고 있는 싸움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오슬오슬한 살기가 전해져오는 듯하다.
함께 싸우고 싶다는 마음은 있으나 이미 모든 힘을 소진해버린 자신이 끼어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저기로 갔다가는 단칼에 베이고 말리라. 답답한 마음에 한숨 쉰 여왕은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당장 이곳의 상황도 좋지 않으니까. 인간 아이들이 불꽃의 잔재를 막지 못해 죽어가고 있었다. 그 피해는 아직 그리 크진 않았지만 갈수록 더해져갈 터.
"전해주겠니?"
3, 4구획의 보스를 막느라 가진 힘을 소진해 한동안은 요양할 필요가 있다. 대신, 자신의 말을 전해 줄 이 아이가 있다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으리라.
아름다운 두 쌍의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는 어린아이의 모습에 여왕은 작게 끄덕였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면서.
***
위협적인 검이지만 볼 수 없는 건 아니다. 다시금 영원의 보조를 받아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한 번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하지만 그런 건 질리도록 경험해왔다. 흑린의 검이 자신의 옆을 가르자 풍경이 변했다. 거기에 있었던 공간이 소멸하고 멀리 있던 공간이 붙어버린 것이다.
"……."
저 검이 그런 위력을 가지고 있단 건 잘 알고 있다. 일대를 완전히 뒤덮은 가시와 사슬조차 가볍게 휘두른 검에 불타올라 사라지고 말았다. 기회를 잡은 늑대는 모아두었던 겁화를 폭풍과 함께 뱉어냈지만, 흑린은 가볍게 털어내는 것만으로 그 전부를 무위로 돌렸다.
"……."
오히려, 시선이 향하자 칠흑의 불꽃이 자신의 겁화를 집어삼키고 이글거리자 늑대는 혼무로 빼앗아두었던 흑린의 불꽃을 둘렀다.
"……."
겁화보다도 높은 차원에 있는 흑린의 불꽃은 동일 선상에 있는 힘이 아니라면 대항할 수 없다. 곧, 혼무는 격렬히 맞부딪치고 있는 불꽃을 삼키고 다시금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칠흑으로 타오르는 불꽃은 제법 여분이 있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
단 한 번도 공격을 허용하지 않는 것. 그리고 흑린에게 유효한 공격을 성공시키는 것. 중요한 건 그 두 가지였으니까. 점점 사라져가는 공간에 당장에라도 휘말릴 것만 같았다. 긴장을 놓으면 끝이라고 몇 번이고 되새기며 계속해 중얼거렸다.
"……."
분명, 이 힘이라면 흑린을 꿰뚫을 비수가 될 수 있으리라. 그것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알 리 없는, 늑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았던 힘이었으니까. 이 싸움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