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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93화 (293/407)

〈 293화 〉 #130 세계

* * *

이미 끝난 싸움이나 마찬가지. 만상의 주인은 과분한 기적을 사용한 댓가로 지쳐 있었고 늑대는 그런 그녀의 권능에 기대어 자신의 공격을 피하는 게 고작이다.

물론, 의외였다.

자신의 불꽃을 빼앗긴 것도 의외였고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단 것도 생각지 못한 점이었다. 하기야, 이 검을 꺼내 들게 만들었단 것만 해도 칭찬해 마땅한 일이리라.

그러나 여기까지. 이제 둘에게 남은 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열심히 버티는 모양이지만 쓰러뜨리는 건 결국 시간문제에 불과하다.

그런데…

도대체 왜, 늑대의 눈은 아직까지 빛나고 있는가. 어째서 포기하지 않고 맞서려고 하는 거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까부터 뭘 중얼거리는 거야?!"

휘두른 검을 피해낸 늑대로부터 촉수와 그림자가 수백 수천 갈래가 되어 스멀스멀 뻗어온다. 그것들 자체는 우습지도 않았지만, 그 끝에 달린 이름 모를 권능만큼은 막지 않으면 안 된다.

불꽃을 일으키자 잠깐 맞서는가 싶더니, 금세 사그라진다. 일부를 빼앗기긴 했지만 어차피 오래 가진 않으리라.

하나를 끝내려 하면 다른 하나가 방해한다. 뒤에서 뻗쳐오는 사슬과 가시, 말뚝. 정말 단조로운 공격이지만 마찬가지로 한 번 허용했다간 틈을 내주고 만다.

어디까지나 맞았다는 결과가 있어야 가능한 일. 저 둘로써는 자신의 불꽃을 뚫는 건 불가능하다.

또한, 공간을 불사르며 도망칠 곳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기에 이제 피하는 것도 불가능해지리라.

하지만 반대로 그것이 자신에게도 통용되는 말임을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흑린은 인지하지 못했다.

***

준비는 모두 끝났다.

마침내 충분할 만큼 공간이 사라진 지금, 늑대는 준비했던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

그것은 자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받아들인 기억이 있었으니까. 마법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늑대는 만상의 주인이 가진 기억을 수습함으로써 마법이라는 학문에 누구보다 깊은 영역까지 발을 내딛게 됐다.

'대마법은 이념을 투영한다.'

그것은 마법을 사용자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드러내는 것. 또한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이뤄주는 것.

그에 따라 누군가는 종말을 흉내 낸 검은 태양을 만들었고 누군가는 얼어붙은 세계를 원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신이 바라는 건 무엇인가. 어째서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야만 했는가.

'끝을 막는 것.'

처음부터 오직 그것 하나만을 위해 달려왔다. 머잖아 찾아올 종말을 막고 올바른 결말로 이끄는 것. 그게, 오직 그것만이 자신이 원해왔던 바람이었다.

"……?"

흑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고작 5절. 인간들이라면 모를까, 이제 와선 하잘것없는 잔재주에 불과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거슬린다. 거슬리고 거슬려서 시선을 빼앗길 만큼이나. 없애버리자고 검을 휘두르려던 순간, 또 발목을 붙잡는 마력의 구현체들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가만있지 그래?"

흑린은 코웃음 쳤다. 그것들을 불태우는 건 고작 1초도 걸리지 않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린 순간, 이미 마법은 완성돼있었다.

손에 손을 얹는다.늑대의 바람에 손을 얹은 이들은 아무 의미도 없이 죽어간 영혼들. 잃어버린 자들이 거기에 손을 얹고 있었다.

[업 929% → 0%]

930%에가까웠던 업이 마법이라는 틀 안에 한데 녹아들어 간다.

[극기 71 → 0]

본래, 업과 극기로서 초월의 영역에 오를 수 있었던 대가를 늑대는 전부 놓아버렸다.

손에 손이 더해진다.

그들의 의지가 마법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그 너머를 보게끔 했다. 이미 자아를 잃어버렸을 단순한 힘의 덩어리가 이 좁은 세계를 가득 채울 듯 찬란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

마법이 위협적일 리 없다­ 아까까지의 생각을 집어치우고 흑린은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달그락거리는 붉은 해골. 이글거리는 흑염이 그것을 불태우기 전에, 늑대는 빛을 흩뿌리는 그것을 집어삼켰다.

***

끓어오르는 마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휘두른 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단 게 거짓말이었단 것처럼 샘솟는 마력.

용의 피를 마신 적은 없지만 이건 고작 그런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것저것 다 섞었다고 그랬지?'

여태 경험해보지 못한 파멸적인 맛이었지만 반대급부로 효과는 대단했다. 강태호는 몰랐지만, 늑대의 용혈에 더해 지리산에서 가져온 인삼과 그 밖에 하수오나 산삼 같은 영약이라 칭해지는 것들을 있는 대로 섞은 거였다.

이 한 병의 가격이 어지간한 도시의 예산에 맞먹을 터.

아무리 강태준이라 해도 부담될만한 금액을 쏟아부은 셈이다. 과연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확신할 수조차 없는 영약 덩어리의 액기스였지만 덕분에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차이를 메울 수 있었다.

고통은 사라지고 체력의 한계는 없어졌다. 솟구치는 마력은 당장 사용하지 않으면 몸속에서 터져버릴 듯 회오리친다.

도핑한 마력으로 악귀를 찢어발긴 강태호가 크게 외쳤다.

"32!"

"32!"

동시에 외친 숫자 32. 서로가 한 마리씩 죽였으니 31마리 남았다는 것. 승산 있다고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순간, 눈앞에 들이닥친 검의 궤적에 강태호는 맨손으로 검의 옆면을 때렸다. 주먹과 금속이 맞부딪쳤다고는 믿기 어려운 소리였다.

우두둑­ 손가락 뼈가 부러졌단 걸 알 수 있는데도 신경이 마비된 것처럼 아픔이 느껴지질 않는다. 물약의 효과는 대단했지만 마력을 제외하고 신체를 강화시켜준 건 아니다.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교훈을 얻은 강태호는 그 짧은 충돌에 완전히 얼어붙은 자신의 주먹을 보았다.

역시나. 아무리 마력이 남아돌아도 지금의 그와 맞붙는 건 무리라고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됐다. 얼음 알갱이를 떼어내고 계속 거리를 벌렸다.

투구와 경추를 감싸는 갑옷의 틈새에서 새어 나온 스산한 소리에 경계를 더한다. 어느새 악귀들도 사라져가고 있기는 한 모양인데 이렇게 된 이상 역할을 분담하는 수밖에.

칼도 없는데 반대가 맞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강태호는 있는 힘껏 팔뼈를 휘둘렀다.

부디 자신이 죽기 전에 악귀ㆍ원령을 모두 때려잡아 주길 바라면서.

***

홀연히, 늑대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까까지 있었던 게 거짓말이기라도 하다는 듯 사라지자 흑린은 늑대가 도망친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한 대가를 치르고도 도망치는 게 고작이었나.

실망감이 차올랐다. 누군가를 초월의 영역에 끌어올릴 만한 힘을 고작 그런 식으로밖에 사용하지 못했다는 게.

"……."

차라리 자신이었다면 이 검에 그 힘을 녹아들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언젠가 충분한 양의 업이 모인다면 종말과 진리마저 굴복 시켜 그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될 텐데. 그 발판이 될 만한 업이 사라졌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그래도 끝은 끝. 도망친 늑대는 나중에 잡으면 되고 지금은 우선…

"……큭."

만상의 주인부터 죽이면 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녀는 웃고 있었다. 참지 못한 실소가 새어 home나오고 있었다.

"드디어 실성이라도 했어?"

늑대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쳤단 것에? 아니면 이제 전부 끝이라고 생각해서? 만상의 주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뒤를 보라고 가리켰다.

거기에 있었다.

승리를 확신하고 의심하지 않았던 흑린의 배후에 세계의 모습이 거대한 늑대의 입으로 변하는 것을.

"!"

늑대가, 아니 늑대의 모습을 한 세계가 울부짖었다.

***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 잔재를 상대하던 홍유리는 날개를 파닥거리며 힘차게 날아오는 누군가의 모습에 두 눈을 부릅떴다.

왜 여기로 오는 거냐고 소리치려다가 주변을 정리하는 게 먼저라고 여기고는 마력을 폭발시켰다. 붉은 폭풍에 휘말린 몬스터는 전부 떠내려갔고 마침 눈앞에 나타난 페리가 자신에게 안겼다.

"왜 여기까지 왔어?"

혼내듯 묻는데도 방긋방긋 웃기만 하자 홍유리는 한숨 쉬었다. 물론 점멸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모양이니 어지간해선 다칠 일은 없겠지만 일단 안전한 곳으로 데려간 뒤에 싸우는 게…

"……?"

품속에서 쪽지를 꺼내 건네는 모습에 뜬금없다고 여기기는 했지만 페리가 이 정도로 사리 분별이 안 될 리가.그랬다면 알파와 함께하는 일도 없었으리라.

혹시 하는 심정에 편지를 연 홍유리는 거기에 쓰여진 단아한 글씨를 보고는 얼른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이건…"

거기엔 이 지긋지긋한 불덩이들을 쓸어버릴 방법이 적혀있었다.

***

이제쯤 편지를 건네받았을 터. 시종일관 밀리는 싸움의 형세도 뒤바뀌게 되리라. 또한, 환수를 비롯해 이곳으로 다가오는 마법사들의 기척에 여왕은 이제 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네버랜드라는 이 던전의 붕괴. 그 여파는 이제 곧 멎게 되리라.

하지만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이곳의 싸움이 아니라 저 너머에 있다. 어떤 형태로 승리를 거두든 간에 결국 늑대가 나아가지 못한다면 종말을 맞게 될 거란 건 변하지 않는다.

붉은 해골이 달린 검을 사용하는 흑린.

기적의 여파로 지쳐버린 만상의 주인.

그리고…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차원 너머를 볼 수 있는 존재인 여왕은 탄성을 질렀다.마침내 이 기나긴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으니까.

***

점점 흐려지더니 이내 육신이 사라지고야 말았다.

정신체가 됐을 때와는 다르다. 업과 극기를 비롯해 가진 모든 것을 내버릴 각오로 사용한 마법. 늑대는 자신이 변했지만 초월의 영역에 다다른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마법은 그저 포용할 틀이었고 형태였을 뿐이다.

자신이 바랐던 건 종말을 막는 것. 그 바람에 응해 실현된 대마법에 한참이나 부족했던 힘이 담긴 것이다.

일천을 넘는 마력 전부와 잃어버린 자들의 의지.

혼무의 권능과 그 권능으로 빼앗은 흑린의 불꽃.

영겁의 세월 동안 갈고닦은 마법과 그녀의 모든 지식.

개인이 가지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은 오직 이 한순간만을 위해 소모되었다.

흑린은 도망친 거라고 했다.

그건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

타 차원에마저 울려 퍼지는 포효. 그건 마치 별의 단말마와도 같았다. 자신의 행동에 삼라만상이 움직인다. 6절의 마법으로세계가 호응했던 만상의 주인과는 달리, 늑대는 세계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아……"

저도 모르게 얼빠진 탄성을 지른 흑린은 뒷걸음질 치며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어디로?

"……!"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자신이 이 검으로 직접 없애버린 공간엔 이제 도망칠 길마저 남아있지 않다.

별과 별이 이어지며 만들어낸 늑대의 형상이 한없이 커다란 입을 벌렸다. 타 차원으로 도망치려던 흑린은 영원의 권능이 자신을 가로막자 이를 악물었다.

"이깟 것!"

한 번 휘두르기만 해도 충분하다.하지만 어째서인지 영원의 장벽은 갈라지지 않았다. 어째서? 설마 또 숨겨둔 무언가가 있었나?

"내가 아니야."

만상의 주인은 실소했다.

무언가를 한 건 자신이 아니다.

세계 그 자체가 늑대가 됐다는 것은 달리 말해 이 세계 전역에 그의 권능이 만연한다는 뜻.

즉,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그의 권능이.

흑린은 검의 손잡이 끝에 달린 해골들이 색을 잃어가는 것을 보았다. 붉은 해골들이 본래의 색을 되찾아 티끌과 흙이 되어 허공에 스며들듯 사라져간다.

그래. 세계가 늑대라면 이 세계의 어디에 있든 벗어날 길 따위는 없다.점점 힘을 잃어가는 자신의 검. 하지만 아직은 충분하다. 아무리 한순간만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지만 이 검에 깃든 힘은 그보다 더한 것. 흑린은 전력으로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세계와 흑염의 검이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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