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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94화 (294/407)

〈 294화 〉 #131 동화

* * *

울부짖는 악령이 배후에서 자신에게 깃들려 하자 빙의하려는 그것을 잡아 억지로 떼어내었다. 부작용이 없을 리 없지만 고통이 없는 지금이라면 괜찮다. 울부짖음이 단말마처럼 들려오는 가운데 강태준은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깔끔하게 대각선으로 갈라진 하얀 원령이 허깨비처럼 스러진다.

"앞으로 6마리…"

악귀ㆍ원령은 대부분 처리했다. 이제 강훈을 쓰러뜨리는 건 시간문제라 해도 좋다. 강태준은 날카로운 눈으로 전황을 살폈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모양. 이젠 교체할 시간이 된 거다.

어느새 부러졌는지 양손에 팔뼈를 하나씩 쥐고서 대항하고 있지만 대검을 쓰던 그가 쌍검을, 하물며 검도 아닌 것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리 없다.

"……!"

견해가 있어 마구잡이 식까지는 아니지만 어설픈 건 어쩔 수 없다. 차라리 저럴 거라면 하나는 버리는 게 나았을 터. 그 부러진 팔뼈마저 다시 동강 났다.

수가 적어졌지만 악귀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강태준의 명치를 꿰뚫었다… 그러나 거기 남은 건 잔상일 뿐. 이미 그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강태준은 검격 사이로 끼어들어 대검을 받아 비스듬하게 흘렸다.

팔뼈를 휘두르려던 강태호가 훌쩍 물러나고 시선을 교환한 순간 서로의 의사를 확인했다.

즉, 역할 교체. 허리를 꺾고 숨을 몰아쉰 강태호가 작게 투덜거렸다.

"망할. 기왕 올 거면 좀 더 빨리 올 것이지."

남은 것들은 고작 여섯. 까다로운 놈들일 텐데 잘도 처리했구나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지금 자신이 그 여섯 마리를 처치할 수 있겠냐는 것.

여기저기 베이고 부러져서 성한 곳이 없을 정도인데 마력만은 끓어올라서 좀 더 설치라고 소리치는 듯하다.

'죽기 싫으면 마력을 쓰라고 했던가?'

정말 그 말대로다. 정신 고갈의 반대. 자기 그릇의 한계를 넘은 마력이 좋을 리 없다. 뻐근하고 쑤시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더 움직여야 한다.

남은 악귀ㆍ원령을 모두 쓰러뜨리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속이 다 시원하네."

그야 여왕님이 알려준 거라 딱히 의심하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효과가 좋다. 편지를 전해줬던 페리가 어떠냐는 듯 까치발을 들어올리며 재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홍유리는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하여간에…"

불이니까 당연히 얼리거나 물로 꺼트리려 했다. 그리고 실제로 제법 잘 먹혔으니 틀린 방법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아니, 틀린 방법은 아니겠지. 단지 좀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뿐.

"Vânt puternic."

주문을 외자 돌풍이 불기 시작했고 휩쓸린 불꽃의 잔재는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혹여나 바람에 불이 붙는 게 아니었나 싶었지만 바람 자체도 마력이기에 그럴 일은 없다. 커다란 놈들은 힘들었지만 분열해 작아진 것들은 얼마든지 날려버릴 수 있었다.

"……."

만약 자신이 아니라 북풍의 주인이었다면 큰 것들까지 꺼트릴 수 있었으리라. 바람이 답이란 걸 깨닫고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기 시작했지만 그게 좀 더 빨랐어야 했다.

대부분 마법사는 이미 마력이 바닥나 있었으니까. 포션을 얼마나 들이켰는지 매스꺼운 속을 게워내면서 마법을 쓰는데 차마 불평할 순 없다.

아무래도 여긴 어떻게든 자신이 처리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홍유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헬기에서 낙하산도 없이 뛰어내리는 정신 나간 이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살 희망자가 아니라 그럴 만한 이들이었다. 추락하던 그네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둥둥 떠올라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스퀘어의 마법사들. 네버랜드의 붕괴 소식을 듣고 뒤늦게 찾아온 지원군들이었다.

"……뭐야."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환영의 나비가 있는데도 어쩐지 안 보인다 싶었더니. 아넬라와 백소율이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주문을 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도 느껴지는 꿍쳐 둔, 형태를 이룬 마력. 아마 주문 보류까지 더해서 이것저것 마법을 완성해두었으리라.

물론 남들은 있는 고생 없는 고생 다 하고 있는데 이제 왔다는 게 불만이기는 하지만… 이 싸움에 종지부를 고한 것이나 마찬가지. 이 소동이 멎는 것도 시간문제이리라.

홍유리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신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분명 저 너머에는……

***

빛이 폭사한다.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흑린이 싸우고 있는 건 이 세계 그 자체였다.

별과 별이 이어진 곳에 늑대의 형상이 그려져 불꽃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늑대의 무리가 자신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배후에서 물어뜯긴 순간 흑린은 신경질적으로 날개를 펼쳤다.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사라져간 늑대 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날개를 물어뜯고 늘어진다. 또한, 이렇게 해봤자 크고 작은 늑대의 무리는 셀 수 없을 만큼이나 남아있다.

그것 하나하나가 전부 늑대. 무엇 하나 가짜가 아닌 분열체였다. 어디까지나 이 세계 자체가 늑대였기에 가능한 일. 권능이 퍼진 이 세계 어디에든 송곳니가 있는 셈이다.

"……!"

또, 또다. 배후에서 물어뜯긴 순간 흑린은 검을 휘둘렀지만 순식간에 사라진 무리는 어차피 이렇게 해봤자 곧바로 생겨난다.

그에 반해 검은 한 자루. 아무리 대단한 검일지라도 이 세계 전부를 없애기 전까진 계속해 갉아 먹히고 만다.

이른바, 둘 중 하나가 죽기 전까지 이어지는 소모전.

그중에서 가장 커다란 별과 별이 이어진 늑대가 달려든 순간, 흑린은 양손으로 검을 받치고 버텼지만 우주의 반대편 끝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힘겹게 밀쳐내고 검을 휘두르자 거대한 늑대는 사라졌지만 어느샌가 달려든 조그마한 늑대 무리가 팔을 물어뜯는다.

하나하나에 스며든 권능. 늑대의 뒷덜미를 잡고 들어 올려 칼을 찌른 흑린은 자신이 상당히 갉아 먹혔음을 인지하고는 일순간이나마 패배를 점쳤다.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다.

미래를 열어젖히고 가능성을 꺼내오는 예지 너머에 있는 흑린의 수읽기는 그 자체가 확정된 사실이나 마찬가지. 그 미래가 패색이 짙고 뚜렷해지고 있었다.

"휴…"

아무리 강한 검이라도 물을 베는 건 한계가 있다.

이 자리에서 가장 우위에 있는 건 늑대. 즉, 변수가 없다면 패하는 건 자신이다.

결과를 바꾸기 위해서는 전제와 상황을 바꿔야만 한다.

오직 이 한순간만을 위해 초월에 다다를 업을 전부 포기하고 촛불처럼 자신을 불태우고 있는 늑대. 그를 상대로 굳이 싸워 이길 필요는 없다. 도망칠 수만 있다면 어차피 스스로 자멸하게 될 테니까.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차원에 덧씌워진 영원의 장벽이 너무나도 거슬린다. 어느새 남은 해골의 숫자는 절반 가까이 줄어들고 말았다. 도망치려면 만상의 주인을 쓰러뜨리는 게 우선이나 저 너구리 같은 것이 쉽게 당해줄 것 같지는 않다.

"이…!"

외통수. 아무리 큰 대가를 바쳤다지만, 한시적인 힘에 불과하다 해도 이런 게 가능하다고?

기적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세계가 그 바람을 이루어주었던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세계 그 자체와 동화했다고?

단언컨대 불가능하다.

하지만 만약 그런 게 가능하다고 한다면… 도대체 그런 걸 어떻게 쓰러뜨리란 말인가?

***

기억과 감정이 끝없이 스며든다. 이미 자아는 흐려져 수없이 분열한 뒤였다.

경계선 너머로 도약한 늑대, 아니 늑대였던 세계.

지금은 자신 또한 끝을 맞은 여러 세계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나 '세계'는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분열한 자아와 의식은 점차 분산되어 자신이 기어코 흩어져 다른 색으로 물들어간다.

지금 이 순간, '세계'가 다다른 곳은 초월의 영역과도 다른 무언가였다.

그것은 개념. '세계'는 세계 속에 스며들어 하나의 개념으로 화한 것이다. 지금의 그와 세계를 구분하는 건 불가능하다.

늑대의 무리가 울부짖으며 흑린에게 달려든다.

아까처럼 여유를 보이진 않지만 흑린은 그것들을 되받아쳤다. 이미 날개는 찢어지고 형상을 이룬 흑염은 엉망이 됐다. 이대로 조금만 더 지나면 분명 패하는 건 자신이리라.

벗어날 수 없고 맞설 수도 없다. 세계 전체를 없애는 것보다 자신이 먹혀버리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세계마저 먹어치운 자신을 양분 삼아 회복되고 있다.

무엇보다 흑린에게 절망을 심어준 건 파괴하는 속도보다 팽창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거였다.

검과 송곳니가 몇 번이나 맞부딪친다. 그것은 찰나이기도 했으나 기나긴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싸움은 다소 허무한 결착을 맞이하고 말았다.

흑린은 한숨과 함께 천장 없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별과 별이 이어진 거대한 늑대가 울부짖는다.

"……."

그리고, 그 아래에 쓰러져 있는 자신.

더 이상 움직일 기력마저 남지 않았다.

존재의 대부분을 먹혀버리고 말았다. 수십에 달하던 붉은 해골은 이제 기껏해야 서넛밖에 남지 않았다. 양팔은 갈가리 찢겨져 사라졌고 하반신은 아예 찾아볼 수도 없다. 심지어 불꽃은 제대로 된 형상을 이루지 못하게 돼버렸다.

……가능성을 점쳤던 것처럼 변수 없이 늑대의 무리에 유린되고 말았다.

"……."

이렇게까지 몰렸던 게 도대체 얼마만이란 말인가. 지루함을 풀기 위해서 심심풀이로 종말에게 덤벼들었다가 죽기 직전까지 몰렸던 때를 제외하면 처음인 것 같다.

하지만…… 아무래도 자신을 죽이는 건 늑대가 아닌 모양.

왜냐하면, 늑대란 존재는 더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흑린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결과를 바꾸기 위해선 변수가 필요하다고 했던가? 하지만 사실 변수 같은 건 필요도 없었던 거다.

과분한 힘은 자신을 갉아먹는 법. 하물며 초월을 넘어선 영역에 있는 힘을 고작 일개 몬스터였던 늑대 따위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

정신체? 그깟 보잘것없는 격으로 다룰 만한 힘이 아니다. 자신이라 할지라도 확신할 수 없는데. 자신을 먹어치우겠다던 의지는 흐려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슬슬 들리지도 않겠지?"

안타깝게도 머리뼈를 수집하지는 못하게 됐지만… 좋은 걸 보았다. 이런 경험을 할 기회는 다신 없으리라.

이대로 도망쳐서 존재를 회복하면 끝이다.

그럴 수 있다면 말이다.

흑린은 자신에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았다.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나도 그래."

"축하해. 네 바람대로 됐네?"

마지막까지 흑린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다가 나올 리 없는 울혈을 토하자 실소하고 말았다.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성은 0에 가까우리라. 하지만 정말로 0은 아니다. 종말을 막는 데 있어 미미하게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충분히 걸어볼 만한 것이다.

"자, 어서 죽여."

검 끝에 매달린 붉은 해골이 하나씩 색을 되찾아간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회복하겠지만 그럴 수 있을 리 없다.

전신을 옥죄고 억누르는 사슬들. 그리고 무엇보다 커다란 말뚝이 자신의 가슴 정중앙을 노리자 흑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희망은 세계로 화했고 흑린은 쓰러졌다.

그 피를 온전히 취해 병에 담은 만상의 주인은 긴 숨을 뱉었다.

이제야, 이제야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걸로 모든 스킬의 근원인 시스템을 되살릴 수 있다.

기나긴 시간이었지만 이젠 정말로 끝.

붉은 해골은 바스라져 사라지고 만상의 주인은 아공간 속에 병을 집어넣었다.

종말이 찾아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 남짓.

엘릭서를 완성하고 시스템을 부활시킨다. 남은 일을 끝마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차원의 틈새를 열어젖힌 만상의 주인은 몇 걸음 가지 못하고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역시나. 대가로 바친 게 생각보다 컸던 모양.

마력의 근원인 심장을 바쳤으니까. 아마 그 때부터 흑린은 진작에 꿰뚫어 보고 있었으리라. 머잖아 재생할 수 있겠지만 당장 이 자리에선 힘들다.

심장은 사라지고 뇌엔 부하가 걸려 정신고갈의 영향이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만상의 주인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우주에서도 똑똑히 보이는 별과 별이 이어진 늑대의 형상을 이룬 성운. 세계 그 자체가 되어버린 희망이었다. 흑린을 포함해 그 누구도 지금의 그를 쓰러뜨릴 순 없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목적도 자아도 사라져버린 그는 덧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으니까. 망각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머잖아 그 흔적마저 사라져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겠지.

"……수고했어."

숭고하다면 숭고한 죽음 아닌 죽음이다.

촛불처럼 불타오르던 희망은 결국 자신을 태우고 세계와 동화해 사라졌고 자신은 목적을 이뤘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 하지만…… 그래. 그가 돌아올 일은 다시는 없으리라.

만상의 주인은 차원의 틈새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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