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화 〉 #133 엘릭서 제조
* * *
나하니 국립공원. 진작에 출입 금지로 포기했던 땅에서 노인과 소녀가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Voal de flăcări."
주문이란 마력을 엮는 매개체. 짧은 엉창에 담긴 의지에 마력이 마법으로서 구현된다. 붉은 장막이 넓은 초원에 가득히 펼쳐졌다.
손을 휘젓자 출렁이는 파도처럼 흘러 산천초목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한번 번지기 시작한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고 금세 푸른 초원을 붉게 물들였다.
몬스터가 비명을 지르며 하나둘 쓰러지고 상황은 빠르게 정리돼 가고 있었지만 아직 멀었다. 국립 공원은 넓었고 몬스터는 널리 퍼져 있을 테니까. 몬스터를 처리하면서 느끼는 감정이라고는 고작 이거냐하는 정도였지만.
"이제 얼마 안 남았네요."
"그래. 마침 한국도 정리가 끝났다더구나."
"……네."
대답은 했지만 슬쩍 고개 돌린 도로시의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벌써?'
그것은 의심. 스퀘어의 마법사 신분으로 참전했던 경험이 있기에 알고 있다. 그곳의 몬스터가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구획 보스라는 괴물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이곳 또한 네버랜드와 함께 붕괴한 세계 각지의 던전 중 하나이자 난처한 던전이긴 하지만 그래 봤자 네버랜드와 비교할 순 없다.
그런데도 상황이 정리된 건 오히려 그쪽이 더 빠르다고? 스퀘어의 도움을 비롯해 여러 요소가 있긴 하더라도 최악의 던전인 네버랜드의 붕괴를 성공적으로 막아 냈단 건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도로시는 몸을 떨면서도 떠올렸다.
그 검은 마랑의 모습을. 인간을 이해할 만한 지능을 가지고 사람의 말을 뱉는 개의 가죽을 뒤집어쓴 괴물. 알파라는 그 마랑이라면 능히 쓰러뜨릴 수 있었겠지.
도대체 어떻게 그런 존재와 아무렇지도 않게 태평하게 지낼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몬스터잖아? 잠깐의 변덕으로 전부 끝내버릴 수 있는 괴물. 재앙을 쓰러뜨렸다는 건 언제든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는 괴물이라는 뜻인데.
그래. 그 괴물이라면 분명 네버랜드의 붕괴조차 태연하게 막아냈을 거다. 어쩌면 스퀘어의 도움마저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떠올리는 것마저 오싹해져 다시 생각을 전환하려는 순간,
"바포메트는 유리가 쓰러뜨렸다는구나."
"……?!"
믿기 어려운 말에 휘둥그레 눈이 떠졌다. 전부 다 마랑이 쓰러뜨린 게 아니었다고? 그리고 바포메트? 설마 구획 보스를 혼자 힘으로 쓰러뜨렸다는 말인가?
설마 스승님이 농담하시는 거겠지 하고 보았으나 진지한 기색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왈가닥에 고집불통인 홍유리가 혼자서 쓰러뜨렸노라고.
"……."
반사적으로 도로시는 자신을 투영해 떠올려다보았다. 만약 홍유리가 아니라 자신이라면? 바포메트를 상대로 제대로 싸울 수 있었을까?
'불가능.'
기껏 해야 2, 3분. 겨우 그 정도 시간 만에 죽어 버리고 말리라.
대마력을 얻음으로써 벌린 차이는 용이 되면서 좁혀지고 말았다. 질병과 싸우면서 역전당했다고 느끼고는 있었지만, 그 차이가 이렇게나 벌려졌다고?
의심 다음에 찾아온 건 분함이었다.
손톱이 깊게 파고들 정도로 주먹 쥔 도로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에서 비린 피 맛이 감도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불합리하다.
왜 하필이면 홍유리가? 헌터질이나 하면서 놀고 있을 때 자신은 마법을 파고들어 익혔다. 스퀘어 마스터의 자리만을 바라며 정진해 왔다.
그런데. 그것마저 뺏겨 버렸다.
구획 보스를 단신으로 쓰러뜨릴 가능성이 있는 건 전성기의 칠영웅과 스퀘어 마스터뿐이다. 그걸 해냈다는 건 홍유리 또한 같은 반열에 섰다는 것이리라. 또 뒤쳐지고 말았다는 사실이……!
'왜 또 네가 앞서가는 거야?!'
어떻게 앞질렀는데 왜 또 이런 차이가. 사람이길 그만두어서? 그러면 강해질 수 있는 걸까? 그럼 차라리 자신도 용혈을 삼키면…
"일단 집중하자꾸나."
스승의 말에 간신히 끄덕인 도로시는 감정을 누르고 어느새 마지막 남은 던전의 근거지로 파악되는 헤드리스 벨리를 바라보았다.
***
"넌 또 왜 따라오고 지랄이야?"
"피곤하실까봐요. 무리하셨으니까 쉬고 계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걱정하는 척만 하는 말에 홍유리는 중지를 들어올렸다.
"하, 네 새까만 속내를 모를까봐?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고 말지."
"……."
말없이 웃는 백소율에게 와짝 표정을 일그러뜨린 홍유리가 이를 갈았다.
"뭐?"
"아뇨. 그냥, 표현이 재밌어서요. '요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요. 속담도 잘 아시고 역시 박식하세요."
"……뭔 개소리야?"
"별로? 다른 뜻은 없어요. 곧 떠날 거라 기왕이면 가기 전에 만나고 싶을 뿐이니까요."
아무렇지 않은 말인 듯하지만 어쩐지 가시가 씹히는 것 같다. 홍유리가 알아채지 못한 뼈가 있는 말에 뒤에서 조용히 따라가던 이은하는 혀를 내둘렀다.
아하, 설전에서는 소율이가 위구나. 결국 떼어놓지 못한 홍유리는 투덜거리면서도 앞장서 걸었다.
"아, 귀 간지럽게…"
귀를 긁은 홍유리가 누가 자기 얘기를 하느냐고 투덜거리자 뒤따르던 이은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끌려가는 길. 여왕에게로 가는 길에 어쩌다 보니 동행하게 되긴 했지만……
'걱정되기는 하니까.'
알파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회색 하늘을 보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아는 것도 없고 근거도 없지만 이번만큼은 근본적으로 무언가 다르다.
그냥, 다른 차원이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어안이 벙벙해진다. 솔직한 말로는 잘 실감나지 않았다.
다른 차원이라고 해봤자 그런 머나먼 동떨어진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 머리로는 대강 이해하더라도 그 위기감을 실감하기가 어렵다는 거다.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걱정된다. 쫓아갈 생각은 없지만 전해 듣는 것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실감조차 못할 미지의 무언가와 조우해 싸우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돌아온 게 늑대가 아니라면 분명…
"다 왔다."
그 말마따나 저 앞에 있는 백록과 그 등 위에 타고 있는 여왕의 모습이 보였다. 당초의 목적은 바로 그녀에게 알파의 일을 묻는 것. 고민할 필요 없이 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
"여왕님!"
이은하는 힘껏 그녀를 불렀다.
***
만상의 주인을 찾으러 가는 길에 여왕은 자신을 찾아온 아이들을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나는 용의 피를 마시고 그 힘을 가지게 된 그 아이의 반려. 또 하나는 평행 세계에서 종종 마녀가 되었던 불쌍한 아이였다. 이번에는 다른 길을 걸은 듯하지만… 여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둘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만상의 주인과 같은, 그러나 절대 그녀가 될 순 없는 평행 세계의 아이였다.
얼굴도 분위기도 전혀 다르다. 갸웃거리는 표정은 천진난만함이 묻어 있을 정도여서 떠올리긴 힘들지만 그 재능은 분명 그녀와 같은 것. 같은 시간을 들인다면 같은 존재는 되지 않더라도 같은 반열에 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요정의 말을 태연하게 익히고 배우지도 않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이니까.
…….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물론 알고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분명 늑대는, 그 아이는 괜찮느냐고 물으러 온 것이리라.
적당히 대답해 넘기는 건 얼마든 가능하다. 하지만…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을 할 순 없다.
여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계와 동화해 종말과 싸우려 달리고 있었으니까. 사실, 이제 기억 속에만 남은 존재일 뿐 그 아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오는 듯하다.
"거기 있어요?"
마찬가지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반룡의 소녀. 그 물음에 여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언제 돌아오느냐고. 괜찮냐고. 그런 질문들에 여전히 묵묵부답인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눈이 불안으로 물들어갔다.
적당히 속여넘기는 건 어렵지 않다.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기만 하면 되니까. 그러나,
"그 아이는 이제 없단다."
어째서인지 진실을 뱉고 말았다.
늑대 혹은 알파라 불리던 아이는 사라졌다고. 자신에게 살아달라고 말했던 그는 언젠가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종말을 막기 위해서…
"없다…고요?"
되묻는 말에 내친김이라 여긴 여왕은 끄덕였다. 그리고 진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
여왕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서 셋은 아연함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머리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갑작스레 다른 차원으로 떠나는가 싶었더니 세계와 동화해 종말이란 존재를 쓰러뜨리러 갔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
물론, 알파가 자신들로서는 상상도 못 할 만큼 강해졌다는 건 알고 있다. 구획 보스나 재앙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뜯을 수 있을 만큼.
하지만 종말?
알파의 말로만 전해 들었던…
그 순간, 여왕이 손을 들어 올리는 듯보였다.
일순 그러는가 싶더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변했다.
우주, 우주였다.
사진으로나 영상으로만 보았던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홍유리, 백소율, 이은하. 셋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꿈틀거리는 심장을 보았다. 도서관과 책을 보았다.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보았다. 빛을 보았다. 침이 없는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게 섞인 혼돈을 보았다.
이 이상은 넘어올 수 없다고 우주가 속삭이는 듯하다.
혼돈으로 빚은 커다란 벽이 서 있어서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장막 자체가 아니라 그 너머.
혼돈의 장막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아."
아주 잠깐이지만 그것을 인지한 순간, 전구의 필라멘트가 끊어진 것처럼 머릿속의 무언가가 어긋났다.
인간의 조그마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뇌가 허용하는 정보량을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모두 잊어 버리고 깔끔히 지워졌지만, 그 일순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신이라 불리기에 마땅한 존재라고. 우주의 질서요, 법칙이요, 창조자이자 진리.
그리고 그것의 반대쪽을 보았을 때, 번뜩이는 거대한 눈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래. 그렇겠지."
여왕은 거기에 의문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영상이나 비전으로 보여준 게 아니라 의식의 일부를 머나먼 차원으로 직접 전송한 것이니까. 모두 잊어버리고 정신을 잃은 채 쓰러졌고 기억하지도 못할 테지만 그걸로 됐다.
늑대 아니, 세계가 그곳에 도착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으리라.
그 전에 만상의 주인을 만나야만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지만 지금 자신에게 가능한 것이라고는 그것뿐이다.
***
불길한 검은 액체가 조용히 타오른다.
병의 안에서 바닥에 가라앉은 게 아니라 둥둥 떠 있는 그 모습은 일반적인 상식의 물리 법칙을 몇 개나 무시하고 있다.
그것은 상식 밖의 물건이고 상상 속의 물건이었다. 원래라면 존재하지 않을 진리의 법칙 바깥에 있는 초월자의 피.
즉, 신혈이었다.
이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던가.
흑린의 피를 얻은 이상, 엘릭서를 제조하는 건 어렵지 않다.
만상의 주인의 뒤로 무한에 가까운 아공간이 열리고 붉고 푸르고 하얀 생물의 피가 꿀렁이고 있었다.
하나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한 존재, 진리.
이 모든 것은 그 진리가 행한 일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되지 않을까하는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영겁의 세월과 세계를 넘나들며 당연히 그만한 재료는 가지고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의 피.
지구상에 존재할 리 없는 모든 몬스터의 피.
그리고 법칙 바깥에 있는 흑린의 피, 신혈.
오랜 시간의 염원에 마침내 도달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
그 모든 병들의 마개가 열리고 아공간 속에서 액체들이 이리저리 섞이기 시작했다.
섞일 리 없는 피가 한데 모여 섞인다. 몇 번이나 실패했고 가장 성공적이었던 결과마저 모조 엘릭서에 불과했지만 확신이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정말로 신의 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이.
그리고 그 결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