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화 〉 #134 거래
* * *
"여기구나."
드디어 찾았다.
깊은 동굴 속에서 울려퍼지는 소리에 여왕은 흰 사슴의 목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이제 돌아가도 괜찮아."
"여왕이시여."
"위험하단다."
백록은 고개를 흔들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혼자 보낼 수 없다. 환계의 주인이자 환수들의 창조주인 그녀의 안위는 자신의 모든 것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
진실을 알게 된 건 아니었지만, 이미 백록은 거기에 근접한 진실을 추측하고 있었다.
먼젓번의 세계에서 죽어간 이들이 살린 목숨을 위험하게 할 수는 없다.
최선의 방법은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 않는 것이었겠지만 그렇게 한다 해도 여왕은 제발로 찾아왔을 터. 그렇기에 차라리 그녀를 데리고서 오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자신이 있다고 뭔가가 달라지기는 할까.
아직 제대로 회복조차 하지 못한 여왕과 나약한 자신.
"!"
무수한 비명이 들려온다. 수백? 수천? 아니, 수억이나 수조를 넘어서는 아득한 숫자였다. 그것들이 한데 모여 비명지르고 있다.
자신에게 향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에 적의를, 악의를, 살의를 드러내고 있다.
끔찍한 의지에 백록은 비틀거리고 말았다. 정신 고갈과는 다른 싫은 기분이었다. 맞서야하는 건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부들부들 떨리는 거대한 악의. 그럼에도 여왕의 의지는 여전했다.
"……들어오지 말렴."
견딜 수 없을 테니까.어두컴컴한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말이 잔상처럼 귓가에 맴돌았지만백록으로선 알 수 없었다.
저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발자국 소리를 발굽 소리가 뒤따르기 시작했다.
***
"……?"
지끈거리는 머리가 당장에라도 깨질 것만 같다. 왜 이런 곳에 쓰러져있는가 떠올려봐도 떠올릴 수 없었다. 어느 부분부터 머릿속이 깔끔하게 지워지기라도 했다는 듯이.
하지만 홍유리는 당황하지 않았다. 마법사에게 있어 기억 상실은 그리 대단치도 않은 일. 정신 고갈이 심해지면 기억을 잃는 일도 얼마든지 있다.
당연 대처법도 알고 있다. 기억이란 이어져있는 법. 어딘가 지워졌다고 떠올릴 수 없는 게 아니다. 지워진 기억은 거기서부터 더듬어가면 된다.
기억나는 부분은 네버랜드 사태를 종식시킨 지점.
강태호와 강태준을 만난 이후부터 여기까지 도착하는 데 까지의 과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면 그 이후. 원래 자신은 무얼 하려 했는가. 그걸 추측해 떠올리기만 하면 날아간 기억은 자연스레 떠오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떠오르지 않는다.
왜 여길 왔지? 뭘 하려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하다. 위화감은 느껴지는데…
예를 들어서, 3구획과 4구획의 보스는 어떻게 쓰러뜨렸는가 혹은 환계라는 세계는 누가 만들었는가. 지리산에 환수가 거주하는 이유는 누구 때문이었는가. 또 어렴풋이 백록을 만난 것도 같지만 그 등에 타고 있었던 건……
어렴풋한 위화감에 실루엣이 보이는가 싶었을 때,
"……?"
곧 홍유리는 그 모든 사실을 잊어버렸다.
깊은 구멍이 생겨서 그 부분에 생각이 미치려고 하면 이것도 저것도 지워버리고 만다.
그건 그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본능. 인간의 조그마한 뇌로는 떠올릴 생각조차 해선 안 되는 아득한 무언가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그 매개체가 된 존재마저 잊어버리고 만.
"근데 이것들은 왜 옆에서 쳐 자고 지랄이야?"
전부 잊어버린 홍유리는 이맛살을 찌푸리곤 아직 잠들어있는 백소율과 이은하를 번갈아 걷어차기 시작했다.
"이 씹, 일어나라고!"
***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 깊은 동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전신에서 흐르는 땀. 벌벌 떨리는 다리. 무의식중에 흘러나오는 혼잣말. 끝까지 따라갈 셈이었지만 백록은 분명 여기까지가 한계임을 직감했다.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니."
여왕은 한숨 쉬었다. 하지만 사실 더 들어갈 필요는 없다. 어렴풋한 실루엣과 함께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여기까지 오시고 혹시 길이라도 잃었나요?"
그럴 리 없단 걸 알면서도 물어온다.
만상의 주인.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도 이질적으로 보였다. 이은하라는 아이와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녀의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하나가 된 건지 아니면 갖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다르다.
"무슨 일이…"
"그거 아세요?"
만상의 주인은 웃으며 자신의 말을 끊었다.
"이제 끝이라는 거. 왜냐면, 완성했거든요. 엘릭서."
"……."
"아, 사실 아직 완성은 아니지만 거의 다 됐어요. 한 번 보실래요?"
키득거리는 그녀가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여왕은 잠깐 쓰러진 백록을 바라보았지만, 그것을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엘릭서'라 부르는 이 거대한 악의의 정체를.
이윽고 동굴의 최심부에서 목격한 건 그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이게 대체……"
여왕은 자신을 잘 알고 있다. 오랜 시간과 높은 격은 자연스레 보는 것만으로 이것도 저것도 통찰해버리지만 저것만큼은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알 수는 있지만 너무나 방대하다.
바다의 깊이처럼 우주의 넓이처럼. 저 검은 무언가에 악의가 밀집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만약 지옥이란 게 있다면 바로 저것이리라.
"이것저것 피를 섞어서 만들었어요."
"……."
"존재하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존재할 수 없는 것."
그제야 여왕은 악의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었다.
피를 추출해 죽어갔을 이들. 동물 혹은 사람의 악의. 몇 개인가 세계를 넘으며 비슷한 살덩이들을 봐왔기에 알 수 있다.
그것과 같은, 그러나 훨씬 넘어서있는 악의라고.
"스킬의 근원을 부활시킬 거예요."
"……."
"그리고 그걸 종속시키면."
종말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세계는 구원받는다. 마지막 남은 이 세계만큼은 부서지지 않고 끝난다.
"그게 가능할 것 같니?"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보란 듯이 만상의 주인은 '엘릭서'를 가리켰다.
"그런데 보다시피 조금 문제가 있어요."
여왕은 실소했다. 저게 어딜 봐서 조금이란 말인가? 악의의 덩어리라고 불릴 만한 더 없이 끔찍한 것이거늘.
"찾아가려고 했어요. 조금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서."
여왕은 경계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게 쓸모없단 걸 알고 있었으니까. 정말 그녀가 원한다면 지금의 자신 따위는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을 테니.
"사실 당신의 피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거기서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희망이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어 흑호를 쓰러뜨린 것도 예상 밖이었지만 모조 엘릭서를 여왕에게 마시게 한 것도. 그리고 무리한 나머지 몰락해 초월자가 아니게 된 것도.
그 중 어느 하나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굳이 흑린과 싸울 필요는 없었을 거다.
무리에 우연이 겹쳐 기적을 일으킨 희망의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분명 엘릭서는 완성돼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 조금 부족하다.
"악의가 너무 심해요."
초월자의 피가 하필이면 흑린의 것이기 때문이리라. 완성해서 시스템을 깨우는 게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어쩌면 폭주할지도…
"그래서 조금 도와주셨으면 해요. 당신이라면 조금은 저항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육신의 격은 정신체에 머물러있으나 영혼의 격은 드높다. 그런 만큼 그녀를 저 안에 집어넣으면 악의도 조금은 사그라들리라.
부탁이라는 말은 했지만 사실 강요나 다름없다.
설령 거절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 게 뻔하니까.
터무니없는 악의에 몸을 던지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여왕은 겁먹는 대신,
"그럼 내 부탁도 들어주겠니?"
만상의 주인은 어깨에 고개를 붙였다. 마치 그럴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 듯한 행동이었다.
"저항하는 건 내 의지니까."
악의를 더하고 싶으냐고 말해오자 만상의 주인은 가볍게 끄덕였다. 설령 엘릭서 안에 넣어지더라도 저항하는 건 그녀의 의지니까.
"……응. 그러네. 그러네요. 거래할 가치는 있겠네요. 그래서, 부탁이라는 건 뭐죠?"
"그 아이를."
"……."
여왕이 보는 건 하늘이었다. 멀고 먼 그곳.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별이 이어진 늑대의 모습. 세계로 변하고 만 가여운 아이.
"그 아이를 구해주렴."
만상의 주인은 눈 사이를 좁혔다.
***
이상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단순히 액체가 아공간 안에서 섞이고 있을 뿐인데. 온갖 색이 섞이고 섞여 검고 진득하게 물들어 간다. 서로 다른 종의 피가 무한에 가까운 마력에 경계를 잃고 한데 모인 것이다.
이야기 속 마녀의 가마솥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직감적으로 이대로라면 성공하지 못하리라고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원한 것과는 다소 다른 결과가 되고 말리라. 비어있는 병. 흑린의 피는 분명 그 안에 쏟아부었다.
그런데 왜?
부족한 건 신혈이 아니었나? 뭔가, 뭔가 빠뜨린 요소가 있었나?
모조 엘릭서는 바라는 답은 아니었어도 그에 한없이 가까운 근삿값. 그렇기에 부족한 걸 채워넣으면 완성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것을 신혈이라 생각했다. 초월자의 피를 섞으면 될 거라 믿었다.
부족한 건 그걸로 채워졌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걸까?
'이건…'
이윽고 그것은 의지를 띄기 시작했다.
마치 모조 엘릭서의 미완성품을 먹인 것처럼. 무한히 재생해 이윽고 살덩이 괴물이 되는 것처럼. 마신 주체는 없었지만 분명 거기엔 의지가 있었다.
그러자 액체는 더 짙어져갔다.
불길한 검은색이 한데 모이고 모여 액체인지 고체인지 알 수 없는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되어간다.결국 만상의 주인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목소리가 들려왔기에.
환청일까? 악의가 원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검은 불꽃과도 같은 것을 언뜻 보았을 때, 흑린의 목소리마저 들리는 듯 했다.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만상의 주인은 그것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정말 섣부른 행동. 절대 하지 않았을 테지만 머릿속에 저것의 정체를 알아야한다는 강박과도 같은 생각이 가득해져서 벌인 우행이었다.
순간, 그것의 극히 일부가 스며들고 말았다.
온갖 환상과 환청이 정신을 갉아먹는다. 마치 강도 높은 마약을 신경으로 들이키기라도 한 것처럼. 고작 그런 것에 어떻게 될 리 없었기에 극복할 수 있었다.
환상과 환청에도 불구하고 불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엘릭서라 부르기에 합당한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이거라면 분명 시스템을 부활시킬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불안이 차올랐다.
너무 강한 악의를 품은 이것을 받아들인 시스템이 어떤 모습으로 되살아날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몇 번인가 그것과 접촉했고 반대로 자신을 집어넣어 보기도 했다.
피에 의식을 담아 조금 정도.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영겁의 시간 속에 손을 더럽힌 자신이 그것의 악의를 누르기엔 역부족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불가능핬지만 몰락한 여신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녀마저 안 된다면……
***
그렇기에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마저 실패했을 때 다음 번에 집어넣어서 악의를 누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희망일 테니까.
'구해달라고?'
어차피 보험.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미지수였지만 그가 있다고 나쁠 건 없으리라.이미 저렇게 되버린 이상 자아가 남아있을 것 같진 않지만 고작 시도해보는 정도로 자발적인 협력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야 얼마든지.
"자, 그럼 들어가주시겠어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검은 무언가. 만상의 주인은 엘릭서를 가리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