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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99화 (299/407)

〈 299화 〉 #134 거래 (2)

* * *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포기하지 않고 장막을 물어뜯는 턱. 생물과 비생물을 막론하고 본래닿을 수 없어야 할 터인데 법칙을 무시하고 물어뜯고 있었다.

전해지는 것은 맹목적인 살의.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리라는 의지였다.그럼에도 많은 이름을 가진 불변의 존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것을 위협이라 느끼지 않았다.

설령 세계 하나가 그것에게 동화해있더라도 마찬가지.

자신을 물어뜯을 위험이 있더라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죽을 테니까.

여태껏 그런 시도가 없었던 게 아니다.

기록상 2789번째 시도이자 4,895,126,870년만의 도전.

그리고 그 전부가 실패.머잖아 저것 또한 혼돈에 잠식되어 사라질 터. 많은 이름을 가진 존재는 그렇게 여겼다.

별것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그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

"과연."

누구도 걸어보지 않은 길. 확신이 없어 불안 했지만 성공하는 듯 보인다. 격렬한 반응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무수한 악의에 맞서 저항하겠다고 스스로 말했던 건 역시 거짓말이 아니었던 셈. 약간의 감탄을 표하며 변해가는 색을 관찰했다.

짙은 검정은 점점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회색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까지 변색했다.

하지만… 이걸로 괜찮은 걸까.

여전히 악의는 남아있다. 제아무리 여신이었다한들 저 모든 악의를 잠재우기란 무리였겠지. 오히려 이 정도라도 해줬단 것에 감사할 정도였다.

'이 정도라면…'

시스템을 부활시켜도 될지 모른다.

그리고 그 전에 거래를 했었지. 분명, 희망을 되돌려달라고 했던가.

소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게 가능한지를. 그리고 과연 필요한 일인지를.

그렇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듣지 못했다. 황급히 동굴 밖으로 뛰쳐나가는 발굽 소리를.

***

"……더럽게 맛 없네."

커피를 들이켰지만 어쩐지 찜찜하게 느껴진다. 커피 맛이 변한 게 아니라 마치 마음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 같아서 뭘 하든 마찬가지였다.

네버랜드 붕괴도 이미 끝났고 사실상 위협은 없다고 봐도 좋다.그냥, 가만히 알파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고작 그것뿐인데……?

"팀장님. 파견 요청이…"

"뭔 파견."

톡톡,

보고하는 말을 잘라먹으며 홍유리는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중국. 몽골. 베트남. 태국. 미얀마. 방글라데시. 일본…"

끝도 없이 나열되는 국가명에 와짝 인상을 찌푸리곤 중지를 들어올렸다.

"제일 조건 좋은 건?"

"중국입니다."

톡톡,

그야 그렇겠지. 경제력이 다를 테니까. 하품한 홍유리는 대충 끄덕였다.

"그것부터 해. 다른 팀은?"

"중국입니다."

"잘 됐네. 빨리 끝내고 다른 데도 가면 되잖아."

할 말 다 했다는 듯 책상에 엎드려 손을 휘젓자 팀윈은 끄덕거렸다.

톡톡,

"그렇게 해두겠습니다…? 흐억!"

멍청한 비명 소리에 홍유리는 이게 미쳤나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이 창문에 고정돼있었다.

"……? 뭔."

아까부터 들려온 이상한 소리가 뭔지 뒤늦게 알게 됐다. 창문밖에 사슴이 있었다. 흰 사슴, 백록이 뿔로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미친."

여기 4층인데… 알파가 종종 그랬던 것처럼 태연하게 발판 위에 선 모습에 실소하고 말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거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

창문을 열었지만 아무래도 좁았는지 들어오지 못하고 난처해하던 백록이 위를 보았다.

……들어갈 수 없으니 탁 트인 옥상에서 말하자는 뜻이리라.

도착한 옥상에서 홍유리는 이미 기다리고 있던 백록을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뭔 일 있어?"

"……?"

"네가 찾아온 건 처음이잖아. 왜?"

왜 왔느냐고 묻는 말에 백록은 벙찐 듯 입을 벌리더니 양옆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잡념을 털어내고 설명하는 백록의 말은,

"여왕께서 위기에 내몰리셨네. 부디 도와주게."

"뭐?"

"그러니까, 여왕께서…!"

"뭔 개소리야? 여왕? 여왕이 대체 누군데?"

홍유리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태연한 반응에 백록은 아연해했다.

"갑자기 뜬구름잡는 소리하러 온 거라면…"

제법 긴 시간을 살아오며, 그리고 안목 스킬까지 더해 알고 있었으니까. 저 반응은 연기같은 게 아니라고.마치 여왕의 존재를 비롯해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잊어 버린 듯한 반응이었다.

***

장막을 물어뜯는다.

혼돈이라고밖에 불릴 수 없는 무언가의 장막은 맹렬한 늑대의 무리에 유린되는 듯 보였다.

흑린과 싸웠을 때보다 한참이나 더 많은. 힘의 총량은 날이 갈수록 증가해 갔다.

하나의 세계였을 '세계'가 종말을 향해 달리는 순간, 또 다른 세계가 그에 호응해 힘을 빌려주었기에.

힘의 총량은 하나의 세계를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끝을 맞은 잔재라고는 해도 여러 세계가 합쳐진 '세계'는 장막 너머에 도전할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장막은 송곳니에 유린되어 찢어지고 그 안에 있던 것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그 안에 존재하는 건 빛이되 빛이 아닌 것. 그저 존재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무언가였다.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뱉은 말 또한 언어가 아닌 어떠한 의지였다.

"2789. 2."

나열한 숫자가 뜻하는 건 무엇일까.

진리의 앞에서 '세계'는 가만히 멈추어섰다.

왜냐하면, 그 앞에 있는 건 종말이 아니었으니까. 세계와 하나되어 동화한 누군가의 기억에서 그 모습은 기억에 남아 있다.

"4,895,126,870. 1."

눈앞의 이것이야말로 진리.

진리이자 법칙이자 섭리이자 우주이고 하나이며 전부.

또한, 동시에 종말의 이면.

'세계'가 혼돈의 장막을 찢어발기고 마침내 그것에 도달한 순간, 오싹한 기척을 느꼈다.

'세계'는 알아차리고 몸을 돌렸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전 차원, 전 세계를 통틀어 단 한 번도 닿지 못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존재가.

"!"

이미 배후에 자리하고 있었다.

***

고민하던 사이 늦어 버렸음을 알게 됐다.

널리 퍼져 있는 마력이 요동친다. 본래 유유히 퍼져 있어야 할 그것들이 혼란을 겪듯 움직이고 있었다.

단순히 힘에 불과한 그것들이 세계와 차원을 넘은 파동에 이리저리 밀리며, 격류에 휩쓸리기라도 했다는 듯 파도치고 있었다.

다만 만상의 주인은 이곳이 아니라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이건 예상 밖인데."

도전한 적이 있었기에 알고 있다. 진리를 감싼 혼돈의 장막이 어떤 것인지를. 그것을 흩뿌리기만 해도 세계 하나를 만들 여력쯤은 가지고 있을 텐데…

자신으로선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대단하고 위대한 업적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결국…

"일이 꼬여버렸네."

약속하기는 했는데 이걸 어쩐다.

만상의 주인은 회색 액체를 흔들어 보였다. 어떻게든 희망을 살릴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늦어 버렸다.격렬한 충돌과 함께'세계'와 종말이 부딪치기 시작했으니까.

"아~ 이러면 어쩔 수 없네요."

순간, 병 안의 회색 액체가 꿈틀거렸다.

"그렇죠? 저건 제 잘못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게 돼 버렸으니까. 저 싸움에 끼어들었다간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리라.어떻게 할 방법이 사라진 이상 원래 하려던 일을 하는 수밖에.

어쩌다 보니 본의 아니게 약속을 어긴 셈이었지만… 정말 어쩔 수 없으니까.

***

그것의 일격에 늑대의 형상을 한 무리가 단숨에 와해되고 말았다.

그 흑린조차 압도했던, 아니 그 이상의 힘임에도 불구하고 종말은 아무렇지 않게 와해시켰다.

하지만 사라진 무리는 새로이 나타난다.

울부짖는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우주에 넓게 울려 퍼진다. 공명하는 하울링은 아주 먼 곳까지 닿았지만그렇다한들 바뀌는 건 없다.

새로이 생겨난 무리는 다시금 와해될 뿐이다.

터무니없는 차이.현격한 격의 차이가 거기에 있었다.

자그마한 무리로는 닿지 못함을 깨달은 '세계'는 우주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체격 따위는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동등한 크기를 가지고서 거대한 종말에 맞선 세계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우주를 내달렸다.

맹목적인 살의가 자신을 향함에 종말은 울부짖으며 몸을 비틀었다.

먼저 닿은 것은 세계의 송곳니.

우주를 밟으며 도약한 세계는 종말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별이 이어진 늑대의 형상은 이 순간, 더 강한 의지를 드러내며 뚜렷해져 있었으나.

"0."

종말은 끄떡하지 않았다.

변함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괴성을 토해낸다.

거기에 '세계'는 깨달았다.

진리의 이면이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이성의 덩어리가 진리라면, 본능의 덩어리야말로 종말이라고.

거대한 손이 벌레라도 잡듯 세계를 집어 던졌다.

***

제법 긴 설명이었다. 어느샌가 해가 져 있었으니까.

몇 번을 반복하면서도 정답에 가까워질 때마다 계속해 잊어 버리기를 반복한다.열 번을 넘었을 때부터 세지 않았지만 중요한 건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위화감을 느끼는 정도라면 모를까, 기억이 부상하려고 하면 매번 잊어버리니까.

여왕께서 무얼 보여주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평범한 것은 아니리라.

"……뭐야. 내가 왜 여기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싸매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에 이은하를 비롯한 이들은 순수한 놀람을 표했다.

마찬가지로 보고 있었으니까.

마치 기억에 혼선을 빚기라도 한 것처럼. 금제라도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

반대로 그건 이은하 또한 마찬가지였다.

백록은 이번엔 이은하의 기억을 자극했고 아까 홍유리가 그랬듯 비틀거리자 귀를 막고 있던 홍유리는 실소했다.

"설마 연기는 아니겠고."

핸드폰으로 찍혀 있기까지 한데 의심하긴 어렵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위험에 쳐했다는 것… 기억을 잃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건 겨우 그 정도뿐이었다.

"……그 사람을 구해야 알파가 돌아올 수 있다고?"

백록이 황급히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그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이런 것까지 보고서 의심하긴 어렵다.

"아으으…"

얼싸안고 비틀거리는 이은하를 대충 벤치에 밀어 버린 홍유리는 옥상 바닥에 침을 뱉었다.

곧 전화를 들고서는,

"야. 아까 파견 관련한 거."

[예. 메일로 보내뒀습니다]

"전부 취소해."

[예? 아니, 잠깐ㅁ…!]

수화기 너머로 누가 소리치건 말건 홍유리는 통화를 끊었다.

"그래서 어딘데? 거기가."

***

한참이나 머나먼 세계. 거기에 부유하는 무언가가 있었다.단세혁이나 잃어버린 자들 따위가 아니라 저것이야말로 본래 시스템이라 부르기에 합당한 존재.

"……찾았다."

죽어있음에도 찬란함을 잃지 않는다. 그 힘은 여전히 남아 스킬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부여되고 있었다.근원이자 진리의 또 다른 면.눈을 감은 만상의 주인은 마침내 그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무한한 힘이 맥동하는 듯한 덩어리.

원래부터 어디 있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부유하며 조금씩 멀어졌던 모양.저기까지 도착하고, 되살리고, 받아들이고, 돌아와 종말을 쓰러뜨리면 될 뿐인 일이다.

만상의 주인은 또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여태 없었을 격렬한 싸움은 머지않아 끝나리라.

바라건대, 조금이라도 좋으니 종말에게 상처 입힐 수 있기를.그래야 자신이 종말을 죽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늘어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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