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00화 (300/407)

〈 300화 〉 #135 근원

* * *

늦은 시간이었기에 굳이 따라오겠다던 이은하를 내버려 두고 출발했지만, 페리도 놔두고 왔어야 했던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페리의 점멸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했지만.

하기야, 정작 뒤따라오고 있는 페리는 어두운 동굴임에도 방긋방긋 웃고 있으니 그럴 필요는 없을까.

그래. 동굴. 한시가 급하다는백록의 말에 따라 동굴을 찾았지만 그저 어두컴컴할 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여기 뭐가 있다고…"

그냥, 텅 빈 동굴.

하지만 어느 정도 들어온 이후엔 동굴 벽에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들러붙은 것처럼 느껴졌다.

"뭐야 이… uoară."

빛을 밝혀보아도 보이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 마력 감지로 가까스로 느껴지는 불쾌함이었다.

신발 밑창에 껌이 달라붙은 것처럼. 벌레가 천장에 붙어있는 것처럼 사소한 불쾌감은 동굴 안으로 전진할수록 점점 커져가더니,

"윽…"

토할 것 같은 역겨움으로 변했다. 그걸 더 강하게 느낀 건 마력에 민감한 환수인 백록이었다. 그나마 이미 한 번 느꼈기에 참을 수 있었다.

각오를 다지고 최심부에 도착했을 때, 홍유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속을 게워냈다.

독 내성도 가지고 있지만 이건 그런 종류가 아니다.

끔찍한 악의. 소름 돋을 정도의 두려움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건 여기에 없다는 거였다.그저 있었던 흔적만이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 그런데 이 정도라고?

대체 뭔…

"엘릭서라며?"

"……."

"엘릭서가 원래 이따위…"

보통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전설 속의 엘릭서와는 다르다. 부수적인 성과의 미완성품. 그걸 떠올리면 제대로 된 것도 정상일 리 없을 터. 오히려 더했으면 더했지……

최심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덩그러니 놓여진 유리병이었던 깨진 유리와 코를 찌르는 마른 피냄새만이 분명 무언가 있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이미 갔다 이거네."

"늦어버렸군."

안 그래도 하얀데 더 창백해진 안색으로 백록은 침음했다. 그렇다면 여왕께서는 이미…

머릿속으로 저도 모르게 최악의 사태를 가정하고 만다.

어떻게 살아계신데 그 목숨을 지키지 못했다……

"큿…"

속을 다 비워버린 홍유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아무것도 없다. 있는 거라고는 있었다는 흔적 뿐인데 머릿속이 어지러울 정도로 암울해진다. 이런 곳에 조금만 더 있다간 미쳐버리고 말리라.

얼른 나가야한다. 문득 떠오르는 걱정에 페리를 돌아봤지만,

"아…"

유일하게 멀쩡한 건 오히려 페리였다.

그뿐 아니라 악의가 페리에게 모여드는 듯 보인다.

그러고 보니 부정을 먹어치우는 게 요정용이라 했던가. 모습은 변했어도 그 힘을 간직하고 있다면 악의를 먹어치울 수 있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니 확실히 한결 편해진 기분이 들었다.

한쪽 구석에서 좌절하듯 비틀거리고 있는 백록의 모습에 입가를 닦아내리곤 침을 뱉었다.

"뭐 해? 구하러 가야지."

"……."

"따라와. 싫으면 요정용이나 더 불러오던가."

홍유리의 눈이 붉게 빛났다.

뒷감당이 가능한지는 차치하더라도 흔적은 남아있으니 쫓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

종말과 세계는 격렬히 부딪쳤다.

꼬리를 붙잡혀 내팽개쳐지는가하면 날갯죽지를 물어뜯고 힘겹게 견뎌낸다.

물어뜯었다고는 말했지만 이빨이 박히진 않는다.

상처 하나 없는 종말이 세계의 허리를 붙잡아 양단하려 했다. 그대로 뜯겨져 두동강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테지만 유려한 움직임으로 피해 물러난 세계는 발톱으로 종말을 할퀴었다.

하지만 송곳니가 박히지 않았는데 발톱이라고 다를까.

다르지 않았어야 한다.

피는 튀지 않았다. 의미 있는 상처도 아니다. 게다가 곧바로 아물었다. 하지만 분명 상처라고 부를 만한 것이 분명 일순간이나마 자리해 있었다.

"1."

진리가 뱉은 숫자는 무슨 뜻을 담고 있을까.

발톱에 서린 기운. 종말은 그것이 자신을 상처입히고 찢어발길 수 있는 자격을 가진 힘임을 알아차렸다.

세계의 모든 것조차 닿지 않더라도, 바깥으로 '초월'한 힘이라면 다르다.

그건 진리에 포함되지 않은 힘. 종말이 가지고 있지 않은 힘이었으니.세계가 가진 무수한 것들 중 유일하게 종말을 상처입힐 수 있는 힘이었다.

"……0.000000074%."

세계는 살의를 더했다…… 그리고 짓눌리고야 말았다.

만상의 주인이 무한에 가까운 무진장한 마력이라면 종말의 마력은 무한 그 자체. 만능에 가까운 마력 또한 진리의 일부일 뿐이니까.

여태까지 종말이 세계와 싸우며 사용한 거라고는 터무니없는 신체능력뿐. 마력과 스킬같은 이능은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던 거다.

짓눌린 세계는 자신에게 혼무를 덮어 견뎠으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유유히 내려다보는 종말을 보고서도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하여, 끝을 맞이해야 했을 터.

그러나 종말은 더 이상 세계 따위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것보다 더 빠르게 이변이 일어났으니까.

***

둥둥 떠다니는 근원.

거기까지 도달한 만상의 주인은 망설이지 않고 병의 마개를 열었다.

한층 옅어진 악의가 스멀스멀 흘러나오며 풀어진다.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 뭘 망설일 게 있으랴.

엘릭서를 들이부은 순간, 연기가 피어올랐다.

죽어있는 것조차 살리기 위해 만들어낸 피. 부활이 아니라 차라리 창조에 더 가까운 비약. 연금술과 마도의 극의라고 불렸지만 그 누구도 만들어내지 못한 기적.

상상 속의 산물은 근원과 함께 마침내 힘을 드러냈다.

근원이 꿈틀거리며 그 안에서 다시금 태동하기 시작한다.대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죽어 있었는지 모를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만상의 주인은 침을 삼켰다.

누구도 걷지 못한 길이기에 확신같은 건 없었다.

언제 실패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지만, 머릿속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떠올렸던가.

시뮬레이션은 수없이 해왔다.

성공 혹은 실패 어느 쪽이던 간에.

일그러진 빛은 조금씩 형상을 갖추어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완성된 모습은 기계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톱니바퀴가 엮인 생전 처음보는 기계였다.

아니, 과연 기계라고 부를 수 있기는 할까.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그것은 이해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도무지 통찰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도 모르고 이것이 설계에 의한 것인지 우연이 겹친 결과물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애시당초 살아있거나 죽어있다는 말은 기계에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받아들인다 혹은 종속시킨다고 했지만 이걸 무슨 수로?

만상의 주인은 기계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우연이었을까? 멈춰있던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돌던 톱니바퀴는 다른 톱니바퀴와 맞물리더니 더 거센 움직임을 보였다. 작은 것은 큰 것을 돌리고 큰 것은 작은 것을 여러개 돌린다.

그것의 반복. 결국에 모든 톱니바퀴가 굴러간다.

무언가 동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동력은 차고 넘칠 정도로 있었다.

'그래.'

스퀘어에서도 비슷한 일을 했었다. 비록 처음에는 실험의 일종이었지만 제법 성과도 있었다.

예를 들어, 강태준이 사용하는 안경. 감정 스킬이 담겼다고 말했지만 정말 스킬인 건 아니다. 단순히 마력으로 그것을 흉내냈을 뿐.

물론, 하고자 하려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자신이 가진 스킬을 쪼개어 부여하는 정도라면 가능하다.

아무튼, 그런 것과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건…

[미약한 재생]

[뛰어난 은신]

[가속]

[경화]

[강화]

[비행]

…그것들 하나하나가 정말로 스킬이라는 점이었다.

마력을 스킬로 빚어 만들어내는 모든 스킬의 근원. 그래서 근원. 지은 이름은 틀리지 않았다는 거다.

순식간에 쌓이기 시작하는 스킬에 만상의 주인은 웃어버렸다.

웃지 않을 수 없다. 받아들이거나 종속시킬 필요는 없다. 만들어지는 것은 스킬이라는 이름의 힘. 즉, 근원이 만들어내는 스킬을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하면 될 뿐이니까.

톱니바퀴가 맞물리는데도 소음 하나 들리지 않고 스킬은 계속해 만들어져간다.

……소음 대신 들려온 건 비명과 같은 어떠한 소리였으나 만상의 주인에겐 들리지 않았다.무수한 스킬을 받아들이며 죽어서도 울려퍼지던 근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으니까.

그 때문이기도 했다.

근원의 부활이라는 이변에 종말이 다가가기 시작한 것 또한.

***

우스운 모습이었다.

종말을 물어뜯고 늘어지는 늑대의 형상. 그러거나 말거나 날개를 펄럭이는 종말.

벌써 몇 개인가의 차원을 넘었다. 제법 시간이 흘렀다.

혼무를 더해 상처입히고 있지만 지금 종말은 그런 것 따윈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아니, 더한 이변에 세계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때문에 기적은 축적되어가고 있었다.

아직은 조금 더 시간이, 준비가 필요할 완성되지 않은 기적이.

***

추적의 마안으로 뒤쫓아 도착한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어딘가로 사라지기라도 했다는 듯이.

늑대의 비가시화가 그랬듯 찾을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

여기에 있었던 건 블랙 스퀘어 마스터, 만상의 주인.

탕아들의 정점이자 언젠가 알파조차 자신의 입으로 쓰러뜨릴 수 없다고 했던 별격의 괴물이었다.

그런 그녀라면 자신의 눈을 속이는 것따윈 그리 어렵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그래야 했을까?

누군가 쫓아와봤자 누구도 닿지 못할 괴물일 텐데.

그리고 악의. 자신은 숨긴다 하더라도 그 끔찍한 악의마저 감출 수 있는 것일까?

거기서 홍유리는 생각을 달리했다.숨긴 게 아니라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을 뿐인 게 아닌가 하고서.

그것은 한없이 정답에 가까워 있었지만, 홍유리로서는 볼 수 없었다.

바로 거기에 갈라진 공간을.

다만, 비슷한 경우를 겪었고 그걸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알고 있다.

"이은하… 그 년을 데려왔어야 했는데."

이딴 일이 있을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으랴. 괜히 놔두고 와 버렸다고 혀를 차며 핸드폰을 꺼냈지만, 그 때는 이미 조금 늦은 뒤였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