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01화 (301/407)

〈 301화 〉 #136 자아

* * *

"아…"

자신이 변해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초월의 영역을 넘어 더욱더 머나먼 곳을 향해.

오죽하면 여태까지의 노력이 헛수고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근원이 만들어내는 스킬은 그만큼 많았고 무한했다.

끝없이 생성되는 스킬은 하나도 빠짐없이 자신에게 깃든다.

본래 몬스터와 인류의 구분을 막론하고 분배되어야 했을 힘을 독점하고 있는 것. 그건 분명한 이변이었다.

그 이상 현상을 깨닫고 자신을 척결하러 오는 종말의 존재. 진리의 이면인 동시에 의지의 대행자였으니.

마지막 세계를 무너뜨리는 것보다 자신을 죽이는 게 우선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만족스러웠다. 그건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알려주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이 행위가 진리에게 위협이 된다는 무엇보다 큰 증거였다.

즉,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종말이 올 때까지 더 많은 스킬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놈을 죽일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시간의 싸움이었다.

***

"이럴 거면 두고 가지나 마시지…"

아닌 밤에 홍두께라고어디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보냈으면서 얼른 오라는 호통에 뺨을 긁었다.

그렇게 깊은 새벽, 뜬금없는 곳으로 불려 나온 이은하는 곧 자신의 의문을 풀 만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왜. 뭣 좀 보여?"

"보이냐구요? 이건…"

깨진 하늘과 마찬가지로 일그러진 공간. 회색으로 변색된 공간이 확실하게 펼쳐져 있었다.어떻게이런 게 안 보일 수가 있느냐고 되묻고 싶었을 정도로.

"……그렇단 말이지."

이 너머가 어디로 연결된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가서는 안 될 곳이리라.

그만큼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주 조금 남아있는 불쾌함과 배시시 웃으며 배를 통통 두드리곤 만족스러워하는 페리를 보건대, 여기 있던 부정을 먹어치운 것이리라.

"뀨?"

하지만 그래 봤자 잔재는 잔재. 진짜에 비견할 순 없다.

꺼려하던 이은하는 손가락 끝으로 깨진 공간을 건드렸다.

알파는 아예 여기를 통과했으니 위험하진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너 뭔."

그것이 홍유리에겐 손가락의 첫마디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심호흡 한 이은하가 점점 더 깊은 곳까지 집어넣더니 기어코 손목까지 사라지고야 말았다.

"휴."

다시 손을 뺐을 땐, 역시 아무렇지도 않았다.

적어도 저편에 넘어간다고 당장 어떻게 되는 건 아니리라.

"야. 너 지금."

"잠깐만요."

각오를 다진 이은하는 기어코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 틈새는 마치 통로와 같다. 길게 이어져있는 공간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적어도 자신의 눈으론 볼 수 없을 만큼 길게.

"……!"

둘러보았지만 별 다른 건 없다. 어느정도 안전하단 걸 확인하고 바깥으로 나온 이은하는 홍유리를 보곤 끄덕였다.

"아마 들어갈 순 있을 것 같아요."

통로까지는. 그 너머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십중팔구 홍유리는 망설이지 않으리라.

알파가 위험하겠단 건 알겠지만, 정말 가야할까. 발목이나 붙잡지는 않을까하는 우려가 망설이게 하고 있었다.

다만, 정말로 위험한 거라면…

적어도 백록의 말에 따르면 '떠올려선 안 되는 사람'은 알파가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순 없진 않을까.

마음을 다진 이은하는 홍유리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방법은 알고 있다.

그리하여, 통로 안으로 들어오게 된 홍유리는 멍하니 그 공간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이은하가 어이없어 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이런 게 있는데 못 보고 있었단 게 제 딴엔 얼마나 황당했을까. 일견 네버랜드의 입구, 균열과도 비슷하지만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규모에서 차이가 나는 듯하다.

끝없이 펼쳐진 길. 기어이 통로 안으로 두 발을 디뎠을 때, 홍유리는 이곳이 불안정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더 정확히는 닫혀가고 있다. 아주 서서히 좁아지는 공간. 머지않아 완전히 닫히고 말리라.

하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니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망설일 필요는 없으리라.

자신을 뒤따라 백록과 이은하, 페리까지 들어오자 홍유리는 가장 선두에 서 걸었다.

***

세계와 동화한 늑대.

모두가 사라졌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없이 희미해진 자신이 넓디넓은 세계의 구성 요소로서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넓은 사막의 모래 한 알. 바닷속의 물 한 모금.

그게 지금의 자신이었다.

존재하지만 의미 없는 것. 잃어버린 자들의 감정과 기억을 받으면서도 여태 흐려지지 않았던 의지와 자아는 너무 과한 파도에 휩쓸려 돌아올 수 없는 깊은 심해속에 가라앉아버렸다.

하지만 의미 없더라도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엔 크나큰 차이가 있다.

모두가 늑대는 이젠 없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는.

[극기 71 → 74]

극기. 그건 스스로를 극복했다는 증표.

때로는 자신을 속이는 환상.

때로는 넘어서기 힘든 시련.

때로는 유혹하는 달콤한 말.

그 모든 것을 극복했기에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때로는 포기하고 싶었고.

때로는 쓰러지고 싶었고.

때로는 멈춰서고 싶었다.

그렇기에, 늑대는 멈추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다.

"."

[극기 74 → 81]

이미 사라진 육신. 있을 리 없는 심장은 이 순간, 분명 맥동하고 있었다.

깊은 심해속에 갇혀 빠져나올 순 없다지만, 눈에 비치는 광경은 점점 또렷해진다.

별과 별을 이어 만들었을 만큼 커다래진 자신이 처음 보는 무언가를 물어뜯고 있었다.

그것은 용.

커다란 날개와 팔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파괴자이자 순환의 고리의 끝을 담당하는 존재. 달리 모든 것의 끝. 종말이라는 이름을 가진 용이었다.

압도적이고 격이 다르다.

초월의 영역에 있던 만상의 주인이 여태 그것을 쓰러뜨리지 못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격이니 결이니 하는 말들은 전부 필요 없다.

진리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그 진리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 낸 폭력의 결정체야말로 종말이었으니. 그 힘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언가였다.

그 무엇도 종말을 쓰러뜨릴 순 없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 작가에게 해를 끼칠 수 없듯이, 애초에 그런 식으로 세계를 창조했던 거다.

그런 존재를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종말은 물어뜯고 달려드는 자신을 무시하고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도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것의 아득함을,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해버렸으니까.

'…….'

절망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설령 자신이 돌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다.

흑린을 먹어치움으로써 가진 업을 승화시켜 초월의 영역에 다다르더라도 마찬가지다.

애당초 여기서 벗어나는 것부터가 자신에겐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

곧 종말은 이곳에 도착한다. 넘어야 할 차원은 이제 앞으로 서너개쯤 남았을까?

근원의 힘을 받아들이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만 한다…….

방법을 궁리하던 만상의 주인은 차원의 저편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음에 눈 사이를 좁혔다.

설마 종말일까?

걱정과는 달리 모습을 드러낸 건 보잘것없는 이들이었다.

환수 두 마리. 인간 둘.

초월은커녕 정신체의 영역에마저 닿지 못했을 정도로 덧없는, 신경쓸 가치조차 없을 만큼 아무 의미도 없는 이들이었다.

가만 내버려두면 우주의 티끌이 되어 미아가 돼 죽어가리라.

오히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단 게 의문이었지만, 자신이 건너온 길을 뒤따라왔을 뿐이다.

만상의 주인은 무시한 채 근원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

정작 그 근원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톱니바퀴의 움직임이 격렬해지며 맞물리는 모든 톱니바퀴가 더욱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왜? 종말이 다가와서? 아니면 이제야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걸까?

아니, 아니었다.

'그랬지…….'

근원, 시스템을 되살린 엘릭서의 안에는 몰락한 여신이 있다.

어쩌면 그건 그녀의 사념. 자식이나 마찬가지인 환수를 보고 무언가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오히려 호재였다. 근원을 이루는 기계들의 동작이 빨라지며 더 많은 스킬을 뱉어내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들로 하여금 근원을 자극할 수 있다면 시간을 벌 수는 없을지라도 단축할 순 있으리라.

***

우주였다.

통로 너머에는 광활한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에 어이없어 한 순간, 이곳의 모습이 조금 다르단 걸 깨달았다.

별은 부서져있었다.

둥그런 공 모양이어야했을 별은 부서지고 찢어져 파편이 돼 있었다.

달과 지구. 토성과 목성. 그리고 꺼진 태양마저도.

영상이나 사진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이질감마저 느껴진다.

"……여긴."

적어도 자신이 아는 우주는 아니다.

다른 차원이라고 했던가? 정말 그러했다. 이곳 자체가 이미 오래 전에 끝을 맞은 듯 보인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저건 도대체……'

처음엔 은색 덩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중해서 보니 기계였다.

저게 도대체 왜 여기에?

멸망하기 전에 남은 문명의 일부? 우주정거장이라거나…

하지만 그런 게 아니란 건 금세 알 수 있었다.

왜냐면, 작동하고 있었으니까.

무수한 톱니바퀴가 구르고 굴러 어떠한 결정을 토해내고 있었다.마력? 아니면 다른 무언가? 분명 처음 보는데도 묘하게 낯익은 모습이었다.

'궁금해?'

속삭이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홍유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가 그랬는가를 따지기 전에 이은하가 목을 붙잡고 괴로워하고 있는 게 보였다.

왜 그러냐고 생각했더니, 자신도 조금씩 괴로워졌다.

이곳은 우주. 숨을 쉴 수 없다면 괴로운 게 당연한 거였다.

환수인 둘은 괜찮은 모양이었지만 곧 자신도 마찬가지로 숨을 쉴 수 없게 되리라.

돌아가서 산소호흡기라도 구해봐야하나?

'도와줄게.'

장난기 서린 목소리와 함께 기계가 뱉어내던 결정이 무척 빠르게 다가와 심장을 꿰뚫었다.

지척에 다가올 때까지 인지하는 게 고작인 속도였기에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죽었다, 그리 여긴 순간 헛숨을 토해냈다.

[수륙양용(D)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물 속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스킬. 아예 자유로워진 건 아니지만 혈액 속에 녹아있는 산소를 재사용하며 당장은 편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래가진 못하겠지만.

'궁금한 게 있지?'

알려준다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홍유리는 다시 기계를 보았다.

여기까지 오며 느꼈던 끔찍한 악의.

의문투성이였지만, 적어도 그것이 저기에 스며들어있단 걸 알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