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2화 〉 #136 자아 (2)
* * *
있는 힘껏 저항해 버티고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럴 의지는 없더라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내리누르는 거대한 흐름에 저항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가까스로 자신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강하게 만드는 법. 담금질이 쇠를 붉고 튼튼하게 만들 듯이. 부러진 뼈가 더욱 단단하게 결합되듯이.
[극기 81 → 88]
흐려진 자아 속에서 극기는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흐름을 거부하기에는 너무나 머나먼 길.
분명 언젠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건, 지금 당장이 아니면 안 된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전부 종말에게 먹히고 말 테니까. 여태까지 해왔던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말 테니까.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건 무엇이었나.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헤집었지만, 머릿 속에 떠오르는 것들은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해 떠올릴 수 없었다. 세계 속에 혼재한 기억이 마구잡이로 섞여 있었다. 어느 기억이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어렴풋한 기억들조차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분명, 그것들마저 없었더라면 극기가 있었다고 한들 삼켜져 사라지고 말았으리라.
자타의 경계가 흐릿해져 자신을 잃고 말았으리라.
그런데.
그런데도, 떠올릴 수 없다.
'…….'
종말을 막아야만 한다.
하지만…… 왜?
왜 종말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하나의 세계가 멸망하고 나서야 새로운 세계는 탄생할 수 있다.
종말을 막는다는 건 탄생을 막는다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도 종말을 막아야 할까.
아니, 애초에 어째서 종말을 막아야한다고 생각했을까.
분명 이유가 있었을 텐데, 정작 그 이유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얼굴은 안개에 가려졌고 이름은 지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죽였어?'
당돌하게 들려왔던 말. 자신을 똑똑히 보라며 소리치고는 마주쳐왔던 붉은 눈.
그 눈동자는 누구의 것이었나.
'뀨우우…'
늘 곁에 있어주었던 목소리. 무너지는 자신을 지탱해주었던 버팀목.
그 목소리는 누구의 것이었나.
하나 둘 자신을 걱정했던 눈길과 목소리가 떠오르는데, 그들의 얼굴과 이름만큼은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었다.
'…….'
역설적이게도 여기까지 이르는 데 있었던 과정은 기억나는데도.
만상의 주인과 함께 흑린을 쓰러뜨렸던 건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데.
정작 그 이유를 떠올릴 수가 없다.
떠오르기는커녕 타인의 기억과 섞여버린 게 아닌가하고 의심이 들 정도로……
늑대는 계속해 떠올렸다.
어렴풋한 그것이나마 잊지 않기 위해서.
***
무수한 톱니바퀴는 끊임없이 회전해 돌아간다.
단순히 그뿐이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테지만, 토할 것만 같은 악의가 스멀거리고 있다.
마치 기계의 윤활유가 저 정체 모를 사념 덩어리라도 된다는 듯이.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건지 이해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 쓰러지지 않게끔 정신을 붙잡고 가까스로 견디는 것뿐이었으니까.
"……제법이네."
자신을 불렀던 목소리. 머릿속에 울리던 것과는 달리 거리가 가까워진 지금은 육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 되는 소녀. 막상 들었을 때는 몰랐지만 다가가서 본 모습은 익히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전 인류 중에서 가장 정체불명이며 의뭉스러운 인물을 꼽으라면 분명 그녀이리라.
마법의 시조이자 스퀘어를 설립한 장본인. 블랙 스퀘어 마스터이자 만상의 주인이라 불리며 탕아들의 수장이기도 한…
'수식어 존나 많네.'
홍유리는 혀를 찼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는지를 생각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으리라. 한 가지 확실한 건 알파는 그녀를 적이라고 규명했다는 것.
인류의 구원자인 동시에 변절자라는 모순.
원래라면 싸워야 하겠지만 당장 적대해봤자 손도 발도 쓰지 못하고 당하고 말리라.
그건 너무나도 멍청한 일. 실력의 격차는 그렇게나 뚜렷하다.
일단은, 어떻게든 맞춰주는 척하면서……
"걱정 안 해도 돼. 어차피 너희한테는 관심 없으니까."
뜻밖의 말에 눈이 마주쳤다. 스퀘어에서 지냈을 때, 몇 번인가 보았지만 언제나 뒷모습이나 옆모습이었을 뿐 정면에서 마주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낯설었다. 그 공허한 두 눈이. 공허. 그래. 그건 정말이지 공허한 눈이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듯한, 달관한 것처럼 느껴지는 눈. 살면서 처음 보았을 정도로. 그런데도 이상하게 무언가를 강하게 열망하는 듯 느껴진다는 게 모순이었다. 입과 눈이 따로 노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생물. 미소지으며 뱉는 독설에는 칼날이 섞여 있고 눈은 이쪽이 아닌 좀 더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한…
홍유리는 애써 속내를 숨기고 태연을 가장했다.
"관심없다… 무슨 뜻이죠?"
"아, 이번엔 제법 흥미롭긴 했어. 너는."
'……?'
"그래도 관심 가질 정도는 아냐."
뭐라는지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린다. 마치 무언가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들떠있었다.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부탁'을 말해오는 것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곧 있으면 늑대가 올 거야. 너희가…"
잠깐 무언가에 혼란스러워하며 머리를 짚은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을 이었다.
"너희가, 할 수 있다면 너희가 깨워봐."
'깨워보라고?'
잠들어있는 상태… 그런 걸까?
최악을 생각하던 홍유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건 오히려 바라던 바였으니까. 굴욕적이지만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분명 알파를 어떻게든 이용할 속셈이겠지만…
"깨우라고요?"
"응. 불가능하겠지만."
희망을 주는 듯하다가도 앗아가버린다.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정말 자신들이 어떻게 되든 간에 관심없다는 것.
길가의 돌멩이를 보는 듯한 무료한 눈이었다.
'불가능… 그러고 보면 없다고 했던가?'
백록의 말로는 떠올려서는 안 되는 어떤 누군가가 알파는 이제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터무니없는 말이다. 애초에 믿지도 않았으니까. 적어도 만상의 주인의 말은 알파가 존재하고는 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알파는, 알파는 어떻게 돼 있는 건가요?"
갸웃거린 만상의 주인은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
그렇게 부르는구나.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손을 저었다.
잠깐 기시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투영된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보게된 건 커다란 용이었다.
터무니없는 괴물이란 건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어지간한 별보다도 커다란 답도 없는 괴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걸 물어뜯고 있는 게…
"설마…"
"뀨?"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음했다.
알던 모습과는 한참이나 달랐지만 늑대의 형상이라고 한다면 떠오르는 건 알파밖에 없었으니까.
"……."
마냥 상상하던 것과는 동떨어져 있다. 매번 그래왔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을까.
일의 스케일이 너무 터무니없어서 실소가 흘러 나왔다. 아니, 대체 뭘 해야 이렇게까지 되는 건데? 다른 차원에 간다더니…
'잠깐 못 본 사이에…'
저번에 본능을 극복하니 마니 할 때도 그랬지만 역시 동떨어진 존재란 걸 실감하게 된다.
그래도. 그래도 분명 이번이 마지막이리라.
저 커다란 용만 어떻게든 쓰러뜨릴 수 있다면……!
"좋아요."
바랐던 답이라는 듯, 만상의 주인은 웃었고 공간이 열렸다.
***
일방적으로 얘기가 오고가는 와중에 이은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왜일까.
분명 처음보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째선지 낯설지가 않았다. 외모. 말투. 성격. 분위기에 이르기까지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게 분명한데 어째서?
저런 사람을 잊을 리 없다. 한 번이라도 만났다면 분명히.
"……."
그 위화감이 서서히 올라와 목을 죄어오는 듯하다.
"뭐해? 안 갈 거야?"
고개를 끄덕인 이은하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보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따랐지만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았다.
일단, 뭣 모를 위화감은 둘째 치더라도 도대체 어떻게?
수륙양용 스킬. 분명 우연히 얻은 게 아니라 스킬을 양도받았다.
"팀장님. 저 사람 지금 대체…"
뭘 한 거냐고. 어떻게 한 거냐고. 그리고 대체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천천히 고개저을 뿐이었다. 입가에 올린 검지 손가락이 묻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몰라."
당초의 목적은 '떠올릴 수 없는 사람'을 구하러 온 거였지만, 그것조차 알파를 구하기 위해서였으니 선결해서 할 수 있다면야.
걱정 섞인 백록의 표정은 보였지만, 분명 이해하고 있으리라.
뒤늦게 만상의 주인이 열어젖힌 통로 안으로 들어온 순간, 홍유리는 올라오는 토악질을 가까스로 눌러 버텼다.
끔찍한 악의의 근원. 그걸 참는 데 한계가 있었으니까.
"티, 팀장님?"
당황하는 목소리에 홍유리는 침을 뱉었다.
"시발, 뭐 저딴…"
백록과 페리는 환수라서 넘어간다지만, 오히려 다소 태연해보이기까지 하는 이은하가 이해가지 않을 정도였다.
"너 뭔데…!"
한참이나 자신과 실랑이하던 홍유리는 가까스로 정신 차리곤 백록에게 기대어 걷기 시작했다.
"괜찮겠나."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백록의 말에 홍유리는 슬쩍 눈을 돌렸다.
"……걱정하지 마."
"뀨웃."
옷깃을 잡는 페리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한숨을 쉬었다.
"문제는 오히려……"
알파였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길까지 열어줘 판을 깔아준 거다. 만상의 주인은 불가능이라 말했지만 그 불가능을 성공시켜야만 한다.
차라리 알파를 포기할 게 아니라면 그게 유일한 가능성일 테니까.
……하지만 어떻게 해야할까.
그냥 보더라도 알파에게 이성같은 건 남아있지 않아 보였다.
이젠 다가가는 것조차 힘들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무작정 다가갔다가는 손도 발도 쓰지 못한 채 죽어버리고 말 텐데.
'일단 방법부터 궁리해야 하는데…'
***
'불가능.'
감히 그렇게 단언할 수 있다.
지금의 희망을 깨우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왕은 그렇게 부탁했지만, 사실 자신에게도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혹시 모르지. 엘릭서를 그에게 사용했더라면 가능했을지도.
물론 그조차 가능성은 적었겠지만.
애초에 이미 근원은 엘릭서를 받아들여 물들었고 계속해 스킬을 뱉어내고 있었다.
따라서, 불가능. 저들이 어떻게 하더라도 희망을 깨울 순 없다.
'확인해보는 거야.'
분명 그러할 텐데 걸어보고 말았다. 그들을 본 순간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희망이었으니까. 여태 숫한 불가능을 넘어온 그였으니까. 이번에도 어쩌면 하는 기대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죽어도 상관없으니까."
그 때문에 저들이 희생되더라도 마찬가지.
고작 그런 것 따위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성공한다면.
이번에도 기적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 일어나서 희망이 깨어날 수 있다면. 그런 기적이 또 한번 벌어진다면. 그리고 그가 시간을 벌어줄 수만 있다면.
'종말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적을 바라는 한편, 만상의 주인은 실패했을 경우의 다음을 준비했다.
모든 걸 걸기에는 너무나도 희박한 확률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