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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03화 (303/407)

〈 303화 〉 #136 자아 (3)

* * *

길을 따라 걸어 고개를 내밀었을 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제대로 보내준 거 맞아?"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나? 아니면 그 반대?

"뭐 보이는 거라도 있는가?"

자신을 밀어내듯 통로 바깥으로 나온 백록이 두리번거렸지만 딱히 보이는 건 없는 듯했다.

설마 엿 먹으라고 일부러 엉뚱한 데로 보냈다던가?

'굳이?'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식으로 골탕 먹일 필요가 있었나.

그럼 알파는 어디에?

"뀨웃!"

마지막으로 차원 바깥에 나온 페리는 잠깐 두리번거리는가 싶더니, 두 팔을 벌리며 좋아라하고 있었다.

혹시 또 안 보이는 건가 하고서 이은하를 곁눈질했지만 모르는 눈치였다.

"…미치겠네. 돌아가자."

그렇게 말한 홍유리는 옷깃을 당기는 페리의 손길에 고개를 돌렸고 페리가 가리키는 손끝을 보았다.

"……."

이해하기 어렵게 마구잡이로 긋는 듯한. 그러나 머잖아 그것이 같은 모양을 반복해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거기까진 알겠는데, 무슨 의미가 담긴 건지 알 수가 없다. 눈살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백록이 탄성을 질렀다.

"그랬군!"

"뭐가?"

깊은 눈이 답을 알아채곤 마주쳐 온다. 재촉하는 눈치에 백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다는 걸세."

"……?"

"여기가, 그의 안이라는 거네."

홍유리는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별과 별이 이어진 커다란 우주. 그렇기에 볼 수 없었다.

아주 먼 거리에 있다면 모를까, 안이었으니까.

"망할, 너무 제대로 보냈잖아…"

더 정확히는 별과 별이 이어진, 늑대의 모습을 한 성운의 안이었다.

…….

별이 움직인다.

무수한 별은 늑대가 움직일 때마다 매번 위치를 바꿔간다. 행성과 같은 커다란 별만이 아니라 작디작은 소행성들도 무수히 많았다.

격렬하고 어지럽게 움직이는 그것들에 휩쓸렸다간 순식간에 쓰러지고 말 테니까.

이른바, 별의 폭풍과도 같다.

일행 중에서 가장 빠른 백록의 등 위에 올라타 달리고는 있지만 솔직히 역부족이었다.

여태 죽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기에. 소행성의 경로가 비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진 왔는데.'

알파를 깨우라고 했던가. 하지만 이걸 뭐 어쩌라는 건가.

알파란 걸 알고도 어디가 머리고 꼬리인지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데 이 내부에서 어디로 가라고? 애초에 갈 수 있기는 한가? 격렬한 소행성의 움직임에 더해 터무니없이 머나먼 거리.

도착하는 건 과연 언제가 될까.

'아니. 잘 생각해 보면…'

페리는 어떻게 알아챈 거지?

알파는커녕 별들밖에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그렇군."

그 의문을 깨달았다는 듯이 백록이 중얼거렸다.

***

"캔슬했다고요?"

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중상의 강태준을 대신해 클랜장의 업무를 대행하고 있는 그녀에게 돌아온 보고는 3팀에 배정된 파견 요청을 전부 무시했다는 거였다.

현 3팀장의 성격이 어떤지는 뼈저리게 잘 알고 있지만 일을 이렇게 처리할 리는 없는데……

눈살을 찌푸린 하연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고 돌아온 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간단한 자동응답뿐이었다.

"이렇게 멋대로 하면."

사리분별을 못 하는 사람은 아닌데 아무 말도 없이 출근 하지 않은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

"뭐 알아채기라도 했어?"

홍유리의 물음에 백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페리가 어떻게 이곳이 늑대의 내부임을 알아차렸는가 사실, 제법 간단한 거였다.

"가만히 들어 보게."

들어 보라하는 말. 하지만 소리라는 건 결국 진동. 따라서, 대기가 없는 우주에서 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다. 안 그래도 그냥 말하는 것마저도 마력을 매질로 사용하고 있는 거였으니까.

그러니까, 들릴 리 없어야 하는데.

'…….'

분명 어떠한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작고 낮고 흐릿하지만 분명 들려오고 있었다.

하나가 아니다.

무수히 많은 목소리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챌 수조차 없을 만큼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때, 그것이 바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염원, 소망, 바람.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그들은 분명 바라고 있었다.

종말을 죽여달라는 통일된 바람이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의지에 담겨 있었다.

"아."

여태 눈치채지 못한 게 거짓말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터무니없는 의지들이었다.

계속 귀를 기울이고 있다간 거기에 홀려서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

백록의 말마따나 이곳은 알파의 안.

처음부터 다른 곳으로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는 거다.

"하, 일 처리 존나 확실하네."

만상의 주인은 확실하게 자신들을 보내주었다.

바로 이곳이야말로 알파의 심장부이자 중심. 별과 별이 이어진 성운의, 세계의 심장부였으니까.

***

떠오르지 않는 얼굴. 흐려져 가는 기억.

그걸 잊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쳐야만 했다. 정말 그것마저 잊어 버렸다간 자신에게 아무 의미도 남지 않을 것만 같아서.

어쩌면 만상의 주인처럼 될지도 모른다.

감정과 인간성을 상실하고 오로지 종말을 죽인다는 것 하나만을 모든 것에 우선해 생각하는 그런.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떠올려야만 한다.

안개는 걷히지 않는다.

오히려 짙어져갈 뿐.

극기는 성장하고 있지만, 그보다 빠르게 많은 것들이 잊혀져간다.

왜냐하면, 지금도 계속해 지나치는 세계마다 자신에게 동조하고 있었으니까.

사막의 모래알은 대륙의 모래알 하나만큼. 그렇게 점점 자신이라는 존재는 퇴색하고 쌓여져가는 의지에 매몰돼 가고 있었다.

그리고 머잖아 이것마저도 잊어 버리고 말리라.

결국엔 자신이 무얼 잊었는지조차 모른 채 종말은 모든 것에 끝을 고하게 될 터.

실패했다.

실패하고 말았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음 기회가 있다면. 그 때는 실수하지 않을 텐데……

그 생각에 늑대는 흠칫거렸다.

그건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사고방식.

단 한 번의 성공을 위해 영겁의 세월을 버틴 누군가의 생각이었다.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이젠 더 이상 자신의 이름마저도 떠오르지 않는다.

알파라는 이름이 아니라, 이 세계에 오기 전의 자신이.

원래 세계의 기억마저도 짙은 안개는 가차없이 가려버리고 말았다.

극기는 빛을 발한다.

하지만 촛불이 동굴 전체를 밝힐 수 없듯이 그것만으로는 무리였다. 세계의 의지에 매몰되기 전, 늑대는 자신의 기억에 매달렸다.

없는 기억을 만들어서라도 떠올리고 싶었다.

떼놓을 수 없는 페리와 백록과 함께 보냈던 나날. 오해와 엇갈림이 있었던 이은하와의 기억. 악연으로 시작한 홍유리와의 인연. 이젠 일어날 리 없는 백소율의 악몽과도 같은 미래를.

'……?'

순간, 늑대는 의문을 표했다.

누구와 있었던 일이라고?

페리. 백록. 이은하. 홍유리. 백소율. 강태준. 강태호. 은자림……?

분명 잊혀졌던 기억들이 계속해 떠오르고 있었다.

부상하는 기억이 가라앉아가는 자신을 떠오르게 했다.

'어째서?'

동굴 속의 어둠은 촛불 하나로 밝힐 순 없다.

하지만 촛불이 새로운 촛대에 불을 건네고 있었다.

점점 더 밝아져가기 시작한다.

왜? 어째서? 이제 와서?

한번 되찾은 기억은 멈추지 않고 떠오른다.

지리산의 괴물 늑대. 하수도의 재앙. 숲의 던전과 악의 태동. 사각지대의 아가일. 용의 황무지. 마녀의 재앙. 인근 해역의 섬 정리. 화산지대의 던전. 홍유리와의 일전. 뒤집힌 마천루. 네버랜드에서 있었던 일.

촛불은 어느새 수십 수백 개로 늘어나 있었다.

여명에서의 일상. 환계의 동행. 서리 계곡과 화산각룡과의 일전. 환영의 나비와의 사투. 처음으로 만난 만상의 주인. 오래된 용과 스퀘어의 도움과 약속. 가까스로 쓰러뜨릴 수 있었던 역병과 질병.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건 언제나 자신에게 속삭이던 잃어버린 자들의 의지가 아니라 다른 이의 목소리였다.

돌아오라고 무작정 소리치고 있었다.

익숙한 붉은 마력이 넘실거리고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본능의 극복. 침공당한 서울. 환계의 붕괴와 자색의 흑호. 언뜻 엿보았던 여왕의 과거와 만상의 주인과의 일전. 여왕의 몰락과 그린란드에서 쓰러뜨린 바다의 재앙.

그리고, 무엇보다도.

'흑린.'

유혹의 말을 속삭이던 검은 불꽃.

절망스러울 정도로 강했던 의뭉스런 초월자.

그것과 싸우는 과정에서 자신은 세계와 동화해 버렸다.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에 몸을 맡긴 것이다.

그리하여, 종말을 쓰러뜨린다는 일념하에 전부 잊어 버렸을 터…였다.

"……."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잊었을 터인 기억이 다시 떠오른 것일까.

'…아와!'

'……게.'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늑대는 눈을 떴다.

***

"망할."

무작정 소리친다고 닿을 리 없는데. 세상만사가 그렇게 쉬울 리 없단 건 잘 알고 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 이런 것밖엔 없다.

"아예 확성기라도 가져올 걸 그랬지."

기시감이 들었다.

예전에 본능을 극복하겠답시고 떠났던 알파를 뒤쫓았을 때도 목이 쉬어라 소리 지른 적이 있었는데.

그나마 그때는 도망칠 수라도 있었지 지금은 언제 별의 폭풍에 휩쓸리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

아예 돌아가서 다시 방법을 궁리하는 게 낫지 않을까.

"팀장님!"

갑자기 소리치는 말에 홍유리는 고개를 돌렸다가 눈앞이 컴컴해지는 것을 보았다.

수십 미터짜리 작은 소행성이 정면으로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피하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다. 그렇다고 저 돌덩이를 마법으로 어찌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여기까지인가 하고 생각했을 땐,

"……?"

충격은 닥쳐오지 않았다.

혹시 고통이 전달되기도 전에 죽어버렸나 싶었더니.

"뀨…"

괜찮냐는 듯 걱정하는 페리를 보곤 반쯤 넋이 나간 채로 끄덕였다.

'진짜.'

요 며칠 평생 겪을 죽을 위기는 다 겪은 것 같아서.

진짜 살아서 돌아가면 멱살이라도 잡아 흔들어주리라.

"팀장님!"

소리치는 목소리에 홍유리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소행성이 닥쳐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저건…!"

별의 폭풍이 멎고 있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늑대 무리가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니, 처음부터 있었던 걸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다.

아연한 시선을 뒤로 하고 늑대의 무리는 어느 한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컵이 깨져나간다.

영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진부한 일이지만, 이건 예감 같은 게 아니다.

"아…"

그냥, 단지 마력의 제어에 실패했을 뿐.

마법의 수련에 매진하다가 잠깐 정신이 흐트러진 거였다.

늘상 있는 별거 아닌 일이라고 치부했을지도 모른다.

"……스승님?"

환영의 나비. 자신의 스승되는 이가 마력의 제어에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미숙한 자신이라면 모를까, 스퀘어 마스터인 그녀에겐 어림도 없는 일.

그건 분명한 이변이었다.

"스승님. 괜찮."

환영의 나비는 대답하는 대신 검지를 입술에 붙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저 높디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의 파동이 지구 전체를 스치고 지나가기라도 한 것만 같은 감각을.

"……도대체 무슨."

착각같은 게 아니라고 육감이 소리친다. 강렬한 감각에 맹렬하게 경종을 울린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무언가가, 변하려고 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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