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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05화 (305/407)

〈 305화 〉 #138 악의

* * *

몇 배의 차이일까.

억? 조? 경? 그런 단위를 붙여도 한참이나 커다란 종말을 상대로 만상의 주인은 싸우고 있었다.

싸울 수 있다.

근원의 힘을 사용하면 분명 종말에 맞설 수 있다. 이 힘이라면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먹구름은 번개를 떨어뜨리고, 찰나의 시간은 영원으로 변한다.

그래야만 맞설 수 있다.

번개는 시종일관 종말을 괴롭히고 영원은 종말에 대적할 수 있는 지각과 시간을 부여했다.

언젠가부터 마력에서 밀린 적은 없었는데, 종말에게만큼은 다르다.

양적 측면에서 너무나도 다르다.

좁은 우물과 호수만큼의 차이. 자신의 마력이 초라하게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양적 측면에서.

사슬은 용을 속박하고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수도 없는 말뚝은 비늘을 꿰뚫어내고야 말았다.

세계조차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한 이유.

그건 만상의 주인이 가진 등급 외 스킬에 있었다. 대마력을 넘어선 마정. 그 한 단계 위에 존재하는 힘.

마력을 다루는 정점을 이르는 근원이란 이름의 힘.

그것은 그녀 자신이 받아들인 힘이었고, 근원 그 자체를 이르는 것이기도 했다.

어느샌가 쇳조각이 떨어지고 부서지고 있었다.

그것은 근원. 아니, 근원이었던 톱니바퀴들이었다.

톱니바퀴는 결국엔 그 형상을 유지하지 못한 채 우주의 쓰레기로 전락해 말았다. 그건 이미 빈 껍데기만 남았다는 증거.

단 한 점의 이물질조차 없는 순수한 마력은 근원의 힘에 의해 정수마저 깃들어 마침내.혼무가 그랬듯 영역 밖의 스킬은 종말에게 닿을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그리하여, 근원의 마력은 질적인 측면에서 종말의 그것을 꿰뚫고 밀어냈다.

'가능해…!'

영겁의 시간 속에 수 없는 실패를 겪고 가능성이란 빛을 붙잡아 여기까지 왔다.

곧바로 재생하고 있지만 확실하게 꿰뚫었다.

말뚝이 박혀 뿔이 거꾸로 돋아난 듯 보이는 모습이었다.

종말의 팔은 우주를 들썩이게 하고 만상의 주인은 계속해 그것을 피해냈다.망가진 우주. 토성의 고리가 부서지고 목성의 잔해가 흩뿌려진다. 터무니없는 크기는 분명 빛의 속도를 넘어서 있다.

목성에서 토성까지.그 거리는 분명 km 단위가 아닌 광년으로 표현할 만한 거리였다.

그런데도 만상의 주인은 종말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더 빨라서가 아니다. 종말이 가진 신체 능력에 만상의 주인이 대적할 방법 따위는 없다.

설령 마력을 사용하더라도 마찬가지.

그런데도 벗어날 수 있는 이유는.

"……!"

아직 한 가지 더. 근원의 힘을 받아들임으로써 만들어진 등급 외의 스킬이 그녀에게 남아있었으니까. 세계와 세계를 접어 그 너머, 반대편으로 도약하는 힘. 반계(反?)가.

사실상, 빛보다 빠른 속도라고 해도 영원으로 인한 지각과 차원 도약이 가능한 이상 종말의 공격은 닿지 못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종말의 머리 위에 모습을 드러낸 만상의 주인은 자신의 손에 근원의 힘을 담아 그대로 꿰뚫었다.

그래봤자 전체 크기에 비하자면 모기와 사람 이상의 차이가 있다. 머리카락보다 더 얇은 무언가가 피부를 파고들었다고 사람이 죽지 않듯이.

그래도.

'유리해.'

유리한 건 자신이다. 종말의 공격은 닿지 않는 반면에 자신은 얼마든지 종말을 공격할 수 있다. 그냥 이대로 피해를 축적하면 분명 언젠가는 종말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일방적인 싸움이다.

그걸 가능케하는 것은.

흑운. 영원. 근원. 반계.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밖에 다다르지 못한 등급 외 영역의 스킬 넷. 근원을 받아들인 지금 만상의 주인은 싸움을 이어 나갈수록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

이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래. 스며든 건 근원의 힘만이 아니다.

어떤 의미로는 그보다 더한 것.

존재하는 모든 종. 존재하지 않는 모든 종. 존재할 리 없는 존재의 것이 한데 뒤섞여 소용돌이치듯 휘감겨 들끓어오르더니 울부짖기 시작했다.

엘릭서의 안에 잔존해있던 거대한 악의가.

***

"……?!"

천천히 형상을 이뤄가는 늑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홍유리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다.그래. 이거였다.

자신이 느꼈던 그 끔찍한 악의. 고작 잔재를 느꼈을 뿐인데 토악질이 솟아올랐을 정도로 역겨운 감각. 그것이 물 속에 떨어진 잉크처럼 퍼져 자신을 물들이는 듯했다.

늪에 빠진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이미 늪의 깊은 곳까지 매몰돼 있었다.

머릿속이 검게 물들어가고 자신을 멀리서보듯 의식이 흐려지려할 때, 손을 잡은 온기에 홍유리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아."

어느새 페리가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부정을 먹어치우는 요정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다만, 그 페리마저도 신음을 참고 땀을 흘리는 것이 여간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뀨으으…"

그 애쓰는 모습에 홍유리 또한 마력을 끌어올려 저항했다. 붉은 마력이 서로를 감싸며 얼싸안는다. 과연 이래봤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잠식당할 테니까.

페리의 곁에 선 백록 또한 마찬가지로 마력을 발산하며 어떻게든 견디는 모양이었지만…

"……문제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은하였다.페리의 도움으로 아예 못 견딜 정도는 아닐 텐데도.

"아오. 이게 진짜 쥐어 박아버릴 수도 없고."

도움은 못 될 망정 방해나 하고 있네.

홍유리는 아득바득 이를 갈았지만 실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에 깨어난 이은하는 어느샌가 자신의 주변이 변해있음을 깨달았다.

무언가, 강렬한 감정이 느껴진다.

크나큰 증오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한 목소리로 외치는 듯한. 이른바, 저주하는 목소리였다.

"여긴…"

물론 진짜 목소리가 아니라 감정이나 의지로 느껴질 뿐이지만.

일단 일어나려던 이은하는 곧 그럴 수 없음을 깨달았다.

부글부글 끓는 듯한 진득한 무언가에 반쯤 휩싸여 있었으니까. 홍유리가 늪이라 생각했던 진득한 악의가 실체를 가지고 거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은하는 늑대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홍유리, 백록, 페리를 포함해 누군가 없는가하고 둘러보았지만 분명 여기에 있는 건 자신 혼자뿐이었다.

우선 여기서 벗어나야만 한다.

곧바로 마력을 일으키려던 이은하는 그럴 수 없음에 당황했다.

이상하게도 이곳엔 한 줌의 마력조차 없다. 설령 깊은 지하라 할지라도 마력은 있을 텐데. 심지어 자신이 가지고 있을 마력조차 한 줌도 남아있지 않다.

마치 마력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게 도대체 무슨…

헌터로서 단련하기는 했지만 베이스가 몸치인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만큼 깊고 침중한 어둠.

더 깊은 곳으로 빨려들어가며 이은하는 비명을 질렀다.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허우적거리며 팔을 휘젓고 발을 굴렀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끌려들어갈 뿐이다.

어느새 턱 밑까지 잠겨버린 이은하의 눈꼬리에서 흐른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늪이라고 생각했던 이것으로부터 거대한 악의가 스멀스멀 흘러나와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놀라 크게 떠진 눈과 확장된 동공만이 지금 그녀의 심정을 알리고 있었다.

얼굴을 덮은 악의는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 위벽을 찢고 폐 속의 공기를 쥐어짜냈다. 심장을 붙잡고 터뜨리려 했다. 무수한 손이 이어져 기어이 자신을 내리누르고야 말았다.

손. 그건 개의 앞발. 토끼의 귀. 괴물의 손. 물고기의 지느러미. 도마뱀의 꼬리. 새의 날개. 벌레의 더듬이기도 했다.

이 악의 속에 스며든 무수한 생명의 존재였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저주를 퍼붓는다.

'싫어!'

더 이상 말을 할 수도 없게 됐다.

도와달라고 알파를 간절히 떠올렸지만, 그런 염원 따위가 닿을 리 없다.

이윽고 가라앉은 곳은 깊디 깊은 심연, 무저갱.

한 줌의 빛도 들지 않는 곳에서 이은하는 죽어가고 있었다.

'살려줘…!'

난폭한 악의가 그 말을 들을 리 없다.

바깥의 누구도 자신에게 손을 뻗지 못한다.

죽기 싫다고 생각했다.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여기서 이렇게 영문도 모른 채 죽어야하는 거야?

무슨 수를 쓰더라도 벗어날 수 없다.

이은하는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고.

그 순간, 기적이 일었다.

자신을 억누른 손이 거두어지고 있었다.

구속에서 벗어나 끈적끈적한 악의 속에서 한 줄기 은색 빛이 비치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사과의 말과 뻗어진 손길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또 따뜻했다.눈물샘이 고장난 것처럼 눈꼬리 끝으로 눈물이 주륵주륵 흐르는데도 이은하는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

은색 빛깔의 머리카락. 상냥한 손길. 그리고 본 적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사람?

사람이 아니라 마치 이야기속의 여신님같았다.

구원의 손길을 뻗어준 그녀로부터 비치는 빛에 검은 악의는 조금씩 물러나 공간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좀 더 억눌렀다면 이럴 일은 없었을 텐데…"

그녀는 한탄했지만, 이은하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이 커다란 악의를 억누른다고? 자신은 질식해 죽을 뻔했는데? 설마 여기 계속 있었다는 소리일까? 그런 게, 그런 게 가능하다고?

"왜 여기까지 와버린 거니?"

책망하는 듯한 말에 이어진 건.

"휴. 역시 더 말렸어야 했는데……"

"……."

그래도 잘했구나. 그를 깨웠으니까."

"……."

따뜻한 걱정과 칭찬이었다.

그? 설마 알파를 말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 이 사람은 알파의 지인?

묻고 싶었지만 입술이 제대로 떼어지지 않아 떠듬거릴 뿐이다. 아까부터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도 정화되는 듯한 기분이었다.스며든 악의가 그녀에 의해 씻겨나가는 듯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처음보는 사람일 텐데 싫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여기 오게된 건 네가 그녀와 같아서겠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비슷한 말을 들어본 것도 같았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자신 때문이 아니라 눈 앞의 분명 처음보는 그녀를 보곤 이유 모를 감정에 젖어 눈물이 흘렀다.

"왜… 왜…?"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은 이은하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까부터 흐르는 눈물의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으니까.

"괜찮아. 울지 말렴. 나는 괜찮단다."

위로해주는 목소리. 그와 함께 그녀의 손이 자신을 일으켜주었다.

"……그래도 울어줘서 고맙구나."

기쁜 듯한 웃음이었다.

이은하는 자신이 바보라도 된 것 같았다. 아까부터 머릿속이 근질거려서 무언가 떠올릴 것도 같은데 도통 떠오르질 않는다.

마치 그래선 안 된다는 것처럼.

"…돌아가렴.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란다."

그녀의 손짓을 따라 악의만이 가득한 이곳에 통로가 생겼다. 분명,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이리라.

일분 일초도 여기에 있기 싫다.

그래서, 이은하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네. 얼른 나가요."

얼른 나가자고. 여기서 빠져나가자고 말했지만 돌아온 답은 씁쓸해보이는 웃음이었다.

웃고 있었지만, 많은 감정이 서려 있었다.

"……고맙구나."

그래도 그럴 순 없다고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왜? 도대체 왜?

이은하는 붙잡은 손이 얼음장처럼 싸늘하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 그렇게나 따뜻했던 손인데.

순간,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짧게나마 진정됐던 악의가 다시 들끓고 있었다. 무수한 손이 사로잡기 위해 뻗어온다.

"자, 어서 가렴!"

아까와는 달리 다급하게 말하는 그녀가 자신을 밀쳐냈다.

붙잡은 손은, 그렇게 떨어지고야 말았다.

허망하게 그녀를 쳐다보며 통로 너머로 떨어지면서 이은하는 보고야 말았다.

자신을 잠식했던 악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불가해한 무언가. 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오염되는 듯한 '검은 불꽃'이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것을.

그렇게 정신이 오염돼서였을까.

쭉 잊어버리고 있던 게 떠오르고야 말았다.

"여왕니이이이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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