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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06화 (306/407)

〈 306화 〉 #139 종말

* * *

한참을 흔들어도 깨어나질 않자 찰싹찰싹 뺨을 건드렸더니 화들짝 몸을 일으키자 홍유리는 실소했다.

"얼씨구. 직빵이네."

상체를 일으킨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다. 그렇게꿋꿋하게 일어난 이은하는 자신을 보는 빤한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내렸고,

"너 뭐 하냐?"

쪼그려앉아 턱을 괴고 올려다보고 있는 홍유리와 갸웃거리는 페리를 볼 수 있었다.

"혼자 지랄은… 뭐 악몽이라도 꿨어?"

뚱한 말투로 무릎을 털고 일어나선 하는 말에 이은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악몽? 그게 꿈이었다고?

이은하는 멍하니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온기… 차가운 냉기. 마치 체온이 없는 듯 싸늘한, 그런데도 따뜻하다고 느꼈던 손의 감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절대 악몽같은 게 아니다.그렇게 생생한 꿈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무엇보다도 드디어 떠올렸다는게 그 증거였다.

'여왕님.'

거대한 악의와 그 중심의 타오르는 검은 불꽃. 그것들에 휩싸인 채 여태껏 견디고 있었던 거다.그 모습을 떠올리자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지막까지 얼른 떠나라며 자신을 걱정하던 그녀.

분명 그 도움이 없었더라면 빠져나오지 못했으리라.

"도대체 왜…"

왜 그렇게 됐을까. 그리고 왜 같이 나오지 않은 걸까. 그리고 그 검은 불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고갤 흔들어 전부 털어버렸다.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도와야 한다는 거였으니까.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그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한 악의의 구렁텅이에 홀로 남겨두고 모른 채하고 있을 수 없다. 절대로.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대체 뭐가 있을까.

결국엔 부탁하는 수밖엔 없다.

여왕님의 존재를 알리고 도와달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부탁이야."

빨리 깨어나달라고 이은하는 두 손 모아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늑대의 울음소리가 낮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

거대한 악의가 출렁인 순간, 의식이 끊어졌다.

그리고 어딘가의 풍경을 기어코 보고야 말았다.

자신의 내면. 그리고 그 안에 도사린 것들. 알고는 있었지만 악의는 역시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던 거다.

"……."

안에서부터 쥐어 짜 올라오는 듯하다.

작고 검은 무언가가 안쪽에서부터 기어올라 자신의 안에서 빠져나가려는 듯이 느껴진다.

근원을 받아들이며 마찬가지로 엘릭서 또한…

'오산이었어.'

모조 엘릭서를 들이켰을 땐 없었던 일이다. 아마 사념과 악의를 이렇게나 일깨운 건 결정적으로 신혈의 차이. 분명 흑린 때문이리라.

그 피가 스며들어 이렇게 됐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상관없어."

중얼거림과 함께 만상의 주인은 근원의 힘을 끌어올렸다. 본래 가지고 있던 영원의 힘이 아니라면 악의에 잠식당해 갈 뿐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종말을 죽일 수만 있다면 그 다음 자신이 어떻게 되든 간에 신경쓰지 않는다. 설령 저 거대한 악의에 삼켜지고 만다고 하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이리라.

모든 건 이 순간을 위함이었으니까.

정신의 일부를 분리해 떼어놓고 악의를 누른 만상의 주인은 마력과 스킬을 계속해 사용했다.

영창의 말 또한 멈추지 않는다.

벼락은 계속해 내리치고 말뚝은 수도 없이 박혀 종말을 마치 고슴도치처럼 변하게 만들고 있었다.

커다란 종말어 날개가 펄럭이자 행성이었던 부스러기들이 휘몰아쳐왔다. 흩어진 마력이 매질이 되어 거센 폭풍. 그건 어쩌면 우주가 생긴 이후 가장 큰 폭풍이었을지도 모른다.

"……!"

설령 빛이라 한들 피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종말의 행동 하나하나가 터무니없는 재앙을 불러오고 있다. 벗어날 수 없는 폭풍을 반계의 힘을 이용해 피해낸 만상의 주인은 쓰라리는 두통에 이를 악물었다.

이제 곧인데. 이제 머지 않은데.

분리한 정신은 어느새 완전히 물들어있었다. 그마저도 삼켜버린악의는 계속 부풀어간다. 저주하는 말소리가 안과 밖에서 들리는 듯한 착각.

내면의 검은 풍경과 바깥의 종말의 모습이 반복해 보이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영창의 말소리조차 멈추었다.

만상의 주인은 이를 악물고 씹어뱉듯 토해냈다.

"제발, 닥치고 있어…!"

이제 조금이니까. 종말을 죽이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드디어 여기까지 왔으니까.

근원과 함께 악의가 치솟아올랐다.

***

"…알겠습니다."

갑작스레 떠난다는 말에 당황했지만, 백소율은 기꺼이 그 뒤를 따랐다. 어차피 그녀의 곁이 아니라면 마법을 배울 곳 따위는 없으니까.

떠나는 건 둘 뿐이다

요즘따라 아넬라는 도통 모습이 보이질 않지만, 이따금씩 싱글벙글 웃는 모습이 영락없이 연애 사업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무슨 일로 떠난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아넬라까지 데려갈 생각은 없는 듯했다.

곧,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가 도착했고 거기에서 백소율은 어렴풋하게나마 목적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러시아."

환영의 나비가 구한 항공편은 러시아로 향하는 비행기였고, 러시아라고 한다면.

'겨울의 주인.'

바로 그녀의 조국이었다. 그것 말고 스퀘어 마스터씩이나 되는 이가 연고지도 없는 곳에 가는 이유가 달리 있기는 할까. 잠깐 물어볼까 싶었던 백소율은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스승이 친절하게 설명해 줄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이륙하기 시작하는 비행기 내부에서 작아져가는 도시를 내려다보며 백소율은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얼른 돌아오면 좋을 텐데 아직 알파가 오지 않았으니까. 며칠이나 보지 못했다고 아쉬움이 사무친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지는 모르겠으나 그때 즈음에는 돌아와 있을까?

다시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과연 언제쯤일까.

'…….'

폐허가 된 서울과 용인 시의 모습마저 내려다보던 백소율은 잠깐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착각이었을까?

마치 하늘이 어두워지기라도 했단 것처럼 검게 물들어있었다. 핸드폰을 킬 것도 없이 아직 밤이 되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이상하게도 그것을 본 순간,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불편한 거라도…"

안색이 좋지 않아서였을까. 말을 건 승무원을 보곤 백소율은 바깥을 가리키려 했지만, 어느새 어둠은 물러 가고 태양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의아해하는 승무원이 멀어져가자 백소율은 창밖을 지그시 응시했다.

착각… 착각이었을까?

다시 비행기가 착륙할 때까지 백소율은 창 밖으로 시선을 떼지 않았으나 다시 어둠이 몰려드는 일은 없었다.

***

게걸스런 악의가 팔을 뻗어온다. 자신을 집어삼키려하고 있었다.

만상의 주인은 더는 저항할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정신을 몇 개인가로 분리해 격리하고 도망쳤지만 악의에 사로잡히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잘 되길 바랐는데…'

아쉽다는 듯한 음성. 그건 분명 자신이 죽였을 터인 흑린의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이러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그건 착각도 뭣도 아니다. 흑린이 자신의 안에 스며들어있었다. 비록 극히 일부에 불과한, 본래의 힘은 잃어버린 사념과 같은 존재라고는 하지만.

'거래하는 게 어때?'

거래. 그건 언젠가 자신이 흑린에게 했던 말. 그게 되돌아오자 만상의 주인은 흠칫거렸고.

'이대로라면… 알고 있지?'

이어진 말에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누구 때문인데. 악의를 부추기고 일깨운 탓에 틈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짧은 시간만에 기껏 입혔던 상처는 제법 회복해있었다.

'도와줄 수 있어. 그러니까.'

자신이 상대하는 건 끝을 상징하는 존재이자 진리의 이면. 그 이름도 종말.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불합리한 괴물이었다.

이미 상처가 회복된 시점에서 승산은 많이 낮아졌다 할 수 있으리라. 계속이렇게 가다간 악의에 한눈 파는 순간 한 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고 말 터.

'풀어놓도록 해. 우리를.'

우리 검은 악의가 한없이 피어오른다. 어느새 시야 한 편이 검게 물들어있었다.

분명 잠식당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더욱 또렷해진 목소리로 사념과 악의가 속삭여왔다.

이대로 잠식당해가는 채로 종말에게 죽음을 맞을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을 해방하고 종말을 쓰러뜨릴 건지를.

만상의 주인은 웃어버렸다.

그거야, 생각할 필요도 없는 고민이니까.

악의의 구렁텅이. 깊은 심연에서 흑린이었던 사념이 무슨 꿍꿍이을 가지고고 있는지는 모르나 종말을 죽일 수만 있다면 상관 없다.

어쩌면 속아넘어가는 건지도 모른다. 이후, 종말을 쓰러뜨리더라도 분명 익의는 가만 있지 않으리라. 하지만 설령 이것을 방출한 이후에 어떤 결과가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영겁의 고통 속에서 후회한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어.'

오로지 종말을 죽이는 것만이 자신의 염원이었으니까.

"아."

아주 잠깐이나마 몰락한 여신과 희망이 뇌리를 스치는 듯했으나 상관 없다.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 외의 것들은 고려할 가치조차 없다.

만상의 주인은 자신의 안에 깃들어있는 검은 그것들을 기꺼이 풀어놓았다. 내면의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이미 잠식당한 정신 속에서 그것들이 한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형언할 수 없는 울부짖음이 온 우주에 울려퍼진다.

내면의 형상과 같은 것들이 실체화되기 시작한다. 눈과 입과 코로부터 검은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구름이나 안개처럼 두루뭉실한 형상을 취해가고 있었다.

기어코만상의 주인은 거대한 악의를 풀어놓고야 말았다.얽히고 섥힌 검은 그것들이 전부 빠져나왔을 때, 만상의 주인은 깨달았다.

풀어놓은 건 분명 악의였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었노라고.

***

백소율의 예상대로 그나마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겨울의 주인을 찾은 환영의 나비는 그녀에게 물었다.얼마 전에 있었던 파동을 느꼈느냐고.돌아온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였다.

"역시…"

지구상의 마력 전체가 흔들릴 만한 이유 모를 파동이 있었던 건 기정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문제는 그게 지금 사라진 마랑 혹은 종말과 관련있을 거란 건 당연하지만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손놓고 있을 순 없다.

그랬다가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했던 적은 셀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소란스러운 바깥에 창 밖을 본 환영의 나비는 아연하게 입을 벌렸다.

"대체…"

늦은 시각. 밤보다도 더욱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으니까.

달빛조차 가려진 채, 거리의 미약한 불빛만이 도시를 밝히고 있었다.

올려다 본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마치 비늘과 같은 무언가의 일부일뿐이었다.

이미 때는 늦어도 한참이나 늦어있었던 거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어느샌가 터무니없는 괴물의 그림자가, 늑대가 예상했던 때보다 더 빠르게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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