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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07화 (307/407)

〈 307화 〉 #140 해야할 일

* * *

꺼내진 악의는 근원의 힘을 빌어 만상의 주인으로부터 빠져나와 형상을 갖췄다. 단순한 사념체에 불과한 그것들이 흑린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사념에 모여든 것이다.

두루뭉실한 검은 구름이나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온갖 괴상한 소음을 들으며 만상의 주인은 목을 감쌌다.

분명 실체가 없었던 것들이 자신의 안에서 빠져나오며 실체를 갖추게 되었다. 그 중심부에 흑린의 사념이 자리한 이상 분명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걸로 족하다.

이제 자신의 안에서 방해할 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으니까. 다시 종말을 쓰러뜨리는 작업을 묵묵히 이어 나갈 뿐이다.

그 과정에서 악의가 자신을 방해하면 그마저 쓰러뜨릴 뿐. 실체화해봤자 별 다른 힘도 가지지 못한 덩어리에 불과하니까.

[완벽해…!]

감동한 것처럼 만족스럽다는 듯 비명 속에서 흘러나온 음성. 도와주겠다라고 말했던 것과는 달리 사념체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고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이대로 조용히 사라져주기만 한다면야.

[고마워]

감사의 인사와 함께 그것은 소름돋게 웃어보였다.

[이걸로 서로 도운 셈이네. 그렇지?]

도왔다… 무엇을?

[잘 받아갈게]

그제야 만상의 주인은 깨달았다.

정말 일부이기는 하지만 근원의 힘을 빼앗겼다는 것. 반의 반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양이었지만 분명히.

애당초 근원을 부활시켰던 건 엘릭서. 톱니바퀴를 돌게 했던 건 그 힘이었다. 함께 있던 악의가 근원의 일부와 동화됐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으리라.

정말 일부에 불과하다.

"너…!"

그러나 그 일부라는 차이는 종말과의 싸움에선 크나큰 차이를 보이리라. 만상의 주인은 곧바로 사슬을 뻗었지만, 구름이나 안개를 붙잡을 수 있을 리 없다.

[이건 질렸어]

검은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사슬을 지워버리고야 만다.

마력과 근원이 담긴 힘마저 밀어내고는 새까맣게 웃으며 악의는 어딘가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놓칠 것 같아?!"

먹구름이 악의를 뒤쫓아 번개를 쏘아내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반계의 힘을 이용해 악의의 바로 근처까지 도달하고는.

[과연…]

악의는 감탄했다. 근원의 거대한 힘을 받아들인 건 둘째치고서 그 힘을 곧바로 다룰 수 있단 게 그녀의 뛰어남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녀를 상대하는 건 자신이 아니니까.

"……!"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거대한 손이 자신을 찍어누르려하자 만상의 주인은 재빨리 반계를 이용해 벗어났으나, 그 때문에 틈이 드러나고 말았다.

종말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벌써 입혔던 모든 상처를 회복하고는 다시 온전해진 모습으로.

"!"

울부짖는 소리에 고막이 터져 피가 흘러내린다. 자신에게 영원을 적용해 금세 상처를 회복했지만 그 때 이미 악의는 먼 곳으로 사라진 뒤였다.

분명 여기선 보이지도 않는 머나먼 곳 어딘가까지 멀어지고 말았으리라.

'……10%.'

빼앗긴 근원의 힘은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여분. 십분지 일에 불과하지만 그것만으로 어지간한 초월자를 넘어서는 힘이다.

사슬에 맞서 검은 불꽃마저 사용했던 걸 보면 본래의 힘을 거의 회복했다고 봐도 좋으리라.

분명 방해는 사라졌지만……

'이길 수 있을까?'

남은 9할의 힘만으로 완전히 회복한 종말을 쓰러뜨릴 수 있는가. 문제는 바로 그 점이었다.

아니, 해야만 한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패하게 된다면…

***

종말 따위에는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다.

자신이 관심 있는 건 그 이면. 오로지 진리일 뿐이었다.

신이라고 불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있다면 진리. 이면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종말도 근원도 진리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계속 그 자리에 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종말을 죽여야만 했다. 그 괴물을 쓰러뜨리지 않는 한 진리에는 접근할 수조차 없을 테니까.

그래서 업을 모았고 해골을 이어 검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처참한 것. 종말은커녕 세계와 동화한 늑대에게 집어삼켜지고야 말았다. 완전히 패해 움직일 수조차 없었을 만큼.

육신은 사라지고 가진 힘의 태반은 세계에 먹혀버렸다.

거기서 끝났을 거다.

악의의 덩어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피에 담긴 사념. 의식의 극히 일부가 그것들을 만나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성공이야.'

한 때, 흑린이라 불리었던 악의는 웃었다.

방법 따윈 어떻게 하던 간에 상관없다. 종말이 만상의 주인과 싸우고 있는 사이에 자신이 진리의 옥좌에 앉으면 될 뿐인 간단한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 세계와 진리는 자신의 이름으로 덮어지리라.

그리하면 저 종말마저도 결국엔 자신의 것이 될 터.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앞으로의 모든 것은 자신의 뜻대로.

'그렇게 되기만 하면……!'

알고 있다. 늑대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다시 돌아온 그를 무릎 꿇리고 고개를 조아리게 할 수도 있으리라.

그래. 그걸 위해서라면……

그렇게 달리던 와중에 악의는 보고야 말았다.

두 마리의 환수와 두 명의 인간을.

왜 저들이 여기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악의는 입이 찢어지라 웃어젖혔다.

그들 넷과 아직 육신을 빚지 못한 늑대.

그야말로 자신을 위해 준비된 듯한 무대를 보고서.

***

또. 또다. 또 같은 느낌이었다.

문제는 어딘가에 스며들어 있거나 잔재 따위가 아니라 오로지 그것만이 있다는 점.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전혀 다른 감각에 홍유리는 목을 부여잡으려 했지만, 이미 움직일 수 없게 돼 있었다.

그건 인류니 뭐니 하는 것들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는 별격의 힘.

바다의 재앙? 그 때 보았던 전혀 손 쓸 수 없었던 괴물조차 이것에 비하자면 귀엽다고 느껴질 정도이리라. 그것과 자신들 사이에는 그만한 차이가 있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미쳐버릴 것 같다.

언젠가부터 자신이 떨고 있단 걸 깨달은 홍유리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끈적끈적한 무수한 손에 붙잡혀 옴짝달싹 못한 채 짓눌려 지기라도 했단 것처럼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씨!"

가까스로 비집어 벌린 입술조차 닫혀버리고 말았다.

널리 퍼져 있었던 부서진 별들마저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검은 무언가가 점점 커지며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너희지?]

듣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는다. 심연의 저 곳에서 여기까지 솟아올라 울려퍼지는 듯한 목소리가 안밖에서 들려와 공명하고 있었으니까. 홍유리는 참지 못하고 속에 든 것을 게워내려 했지만, 그것마저 허락받지 못했다.

몸의 지배권을 강탈당하기라도 했단 것처럼. 머잖아 검게 물든 악의는 황홀함을 감추지 못한 소리를 냈다.

[아,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왜 그렇게 어려운 길만 고집하고 있었을까.

아니, 그 이유는 알고 있다. 정말 스스로 견디다 못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니까. 자신에게 기대어 힘을 빌려달라고 애원하는 타락의 순간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그럴 수 없게 된 이상 이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저 고고한 늑대의 안색도 조금은 바뀌게 되리라. 분명 충분히 만족스런 표정을 지어줄 것임에 틀림 없다.

자신의 힘이었던 업을 소화하며 늑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완성에 가까워져가고 있다. 아니, 이미 눈을 뜨고 있으니 분명 의식은 또렷하게 남아있으리라.

그래서. 그렇기에 악의는 더 크게 웃었다.

그 또한 이 광경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결국 검은 불꽃이 그들을 뒤덮기 직전,

[!]

악의는 어떠한 흔들림을 느꼈다.

그것은 밖이 아니라 안. 지금의 자신을 이루고 있는 악의의 집합체가 요동치고 있었다.

아주 적게나마 밝은 빛이 비치는 듯하다.

그 속에서 은색 빛을 보았을 때, 찢어질 듯하던 악의의 웃음이 멈추고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설마, 아직 남아있었다고?

[이 끈질긴…!]

몰락했으면서. 이젠 살아있지도 않은 주제에! 그것도 심지어 극히 일부밖에 남지 않았으면서 여기까지 와서 잘도 방해를……!

은색 빛을 짓누르는 건 손쉽다. 곧 악의에 완전히 집어삼켜져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리라.

하지만 그 일순간의 틈.

어느샌가 눈을 뜬 늑대가 붉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늑대를 죽일 시간이 없다면 하다못해 저들 넷이라도.

그리고 늑대가 지어보이는 표정은 분명 각별할 게 틀림없으니까!

다만, 악의는 그것마저 이루지 못했다.

여왕을 짓누르느라 신경을 쏟은 사이 바깥의 경계를 늦춘 사이에,

"Arde în abis i transformă­te într­o suliă neagră!"

어느샌가 흑색 나선창이 자신을 꿰뚫고 있었으니까. 켁켁거리며 목을 부여 잡고 보란 듯이 중지를 들어보이는 홍유리를 황당하게 쳐다본 악의는 어이없이 실소했다.

불의의 일격임에는 틀림 없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격이 맞아야하는 법. 개미가 깨물었다고 사람이 죽지 않듯이.

[건방진!]

고작 마법 따위에 어떻게 될 리 없다. 검은 불꽃에 순식간에 타오른 순간, 악의는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악의 또한 부정의 일부. 이미 그 잔재를 먹어치운 바 있던 어린 요정용이 자신을 붙잡고 있어서.

따지고 보면 천적이라고는 부를 수 있을진 모르나 너무나도 격이 다르다. 먹어치우긴커녕 변변한 저항도 할 수 없어야 했다.

……또 다시 안에서 은색 빛이 번뜩이지 않았더라면.

[차례차례로!]

전부 죽여버리는 건 어렵지도 않은 일. 하지만 문제는 이제 더는 시간이 없다는 것. 결국 붉은 눈에 초점이 맺히기 시작하자 악의는 하려던 걸 포기하고 이를 가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지금 도망쳐야 한다.

여기서 늑대에게 발목잡힌 채 있을 순 없다. 만상의 주인이 쓰러지면 종말이 쫓는 다음 타겟은 근원의 일부를 지닌 자신일 게 분명하니까.

목적을 완수하지 못한 채 도망치던 악의는 낮은 으르렁거림을 듣고는 속을 가라앉혔다.

분명, 늑대는 자신을 쫓아오게 되리라.

'뀨우웃…'

전부 죽이진 못했더라도 아까 사람의 모습을 한 작은 환수의 의식만큼은 자신의 안에 집어 삼켰으니까. 분명, 인질로 삼을 가치는 차고 넘치리라.

***

진화와는 다르다. 세계 속에 녹아들어 완전히 소멸해버린 육신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래서 슬라임. 부정형 점액체. 부정형 워그. 스컬 울프. 음영랑. 먹어치우는 자. 재를 거두는 자까지 여태 이어진 육신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고야 말았다.

따라서 새로이 만들어 내야만 했다.

사실, 형태는 어떻게 하더라도 상관 없다.

원한다면 인간의 몸을 빚을 수도 있다. 가장 강한 존재인 종말의 형태를 빌릴 수도 있다. 초심으로 돌아가 부정형의 무언가가 되더라도 괜찮으리라.

하지만, 늑대는 생각했다.

이미 자신에게 있어 가장 익숙한 형태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따라서, 흑린으로부터 빼앗아온 모든 업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건 뼈대. 골격과 이빨을 만들고 머잖아 근육과 살점을 잇고는 그 위에 검은 털이 덮이기 시작했다.

특별한 형상일 필요는 없다.

필요한 건 오로지 물어뜯을 이빨과 찢어발길 발톱. 오로지 그것만으로 족하다.

다시 한 번 검은 늑대의 형상이 만들어져간다.

그건 보다 순수한 형태에 가까웠다. 다른 누군가의 개입 없는 오로지 자신만의 형상.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모든 걸 바로잡으리라.

막지 못했던 종말을 쓰러뜨리고 올바른 결말로 이끌고 말리라.

늑대는 자신의 아래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차원의 틈이 열려 그들을 집어삼켜갔다.

여기까지 와 소리쳐준 덕분에 자아를 찾을 수 있었지만 그들의 역할은 여기까지. 지금부터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아직, 아직 페리가…!"

"알고 있다."

늑대는 담담하게 답했다.

육신을 빚으면서 눈을 뜨게 된 어느 순간부터 계속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악의의 덩어리와 흑린을. 그리고 그 속에 아직 남아있는 여왕의 존재를. 차원의 틈 너머로 사라져가는 페리. 하지만 그 정신은 악의 속에 삼켜지고야 말았다.

눈을 감고 숨을 뱉어냈다.

"먼저 돌아가 있어라."

믿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늑대는 그렇게 말했다.

"전부 되찾아 올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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