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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13화 (313/407)

〈 313화 〉 #144 악의와의 싸움

* * *

대화를 시도한다. 그런 생각 따위는 들지도 않을 만큼 명명백백한 살기. 그래도 암담하지만 절망할 정도는 아니었다.

막을 수 있다는 건 달리 말하자면 싸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곧바로 발상을 전환하며 홍유리는 손을 휘저었다.

"Glon de flacără."

수인과 간단한 단문 영창으로 발한 마법. 조명조차 꺼져 어둑어둑해진 건물에 잠깐이나마 빛이 돌아온다. 건물 내부에 쓰러진 클랜원이 아직 남아있는 이상 거창한 마법을 사용할 순 없으니까 당연한 결과였다.

'아무리 그래도…'

고작 이런 게 통하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힘을 잃었을 게 분명한데도 피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그러자 수십 개나 되는 불꽃의 탄환들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모조리 사그라들었다.

다만, 아무 의미도 없지는 않았다.

[귀찮게…!]

약해졌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그건 알파의 기준이었지 자신들의 기준은 아니다. 저것 또한 분명 그런 계산이 있었기에 구태여 모습을 드러냈으리라.

어렴풋하게 사람의 모습을 취한 검은 안개같은 것이 손을 뻗어온다.

그 순간을 눈으로 쫓기도 어려웠기에 홍유리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지만 보다 빠르게 붉은 대검이 악의를 두동강내려 하고 있었다.

손의 방향을 틀어버린 악의는 대검에 맞섰고 둘이 충돌한 순간 퍼뜨려진 풍압이 눈을 가렸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천장을 무너뜨리는 듯하다.

아차하는 순간엔 바닥에서 솟은 가시가 흔들리는 천장을 지탱하고 있었다.

"……!"

빨리 하라고 하는 듯한 재촉에 끄덕인 홍유리는 주먹에 마력을 담곤 한쪽 벽을 깨부쉈다. 새벽의 찬 공기가 무너진 벽 사이로 들어오건 말건 쓰러진 인원을 마력으로 끌어당겨 냅다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뭐해! 던져!"

당황하던 이들은 홍유리의 지시를 따랐다. 아무리 헌터라지만 고층 건물에서 의식도 없는 이들을 던지는 건 미친 짓이다.그렇기에 이미 바닥 근처엔 그물이 깔려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은하의 마력 구현이었다.

그러는 사이 강태호는 벽에 내동댕이쳐져 건물 바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 분묑그 짧은 사이에 강태호의 상의는 갈기갈기 찢어지고 어깨엔 귀신의 그것처럼 검은 손자국이 찍혀있었다.

몇 번이나 공격을 허용했다는 뜻. 즉, 지근거리에서조차 강태호 이상가는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홍유리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깨어있는 건 몇 되지 않는다. 움직일 수 없는 몸이라 피신시킨 강태준을 빼놓으면기껏해야 일곱명 정도일까.

뒤늦게 무기를 들긴 하지만 그리 전의는 없어보인다.

아까 강태호를 압도해 떨어뜨린 것에 기가 질려버린 것이리라. 한심하기는 해도 이해할 만한 일이었기에 홍유리는 가볍게 혀를 찼다.

'왜 왔는지는 얼추 알겠는데.'

알파에게 패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노골적이게 느껴지는 시선을 모를 수가 없다.

홍유리는 한껏 마력을 끌어올리고 자신의 귀를 덮었다. 혹여나 저것의 속삭임에 꾀어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잠깐 주변을 둘러본 악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고 주변이 밝아졌다.

볼 수 있다곤 해도 주변이 어두운 것과 밝은 건 크나큰 차이가 있다. 악의를 예의주시하는 헌터들은 전의와는 별개로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저것이 한참이나 격상의 상대란 건 분명하니까. 당연 대화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먼저 그것이 말을 걸어왔으니까.

[…좋아. 이런 제안은 어때? 둘만 넘겨주면 물러나 줄게]

손가락이 가리키는 건 자신과 이은하. 홍유리는 역시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고.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분풀이하는 격이었다. 그것에게서 느껴지는 살의와 악의는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누가 저 말에 속아넘어가겠느냐고 코웃음치고 싶었지만 그건 자신이기에 하는 생각이었다.

곁눈질하는 눈초리가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시선을 느꼈는지 이은하가 바로 옆까지 다가와 들러붙어 있었다.

분위기가 묘해지자 홍유리는 한숨쉬었다.

***

저들이 간사한 게 아니다. 악의는 저들의 심리를 이해했다.

그야, 누가 굳이 싸우고 싶어하겠는가. 던전도 아닌 이런 도시에서.

서울? 용인? 그런 도시가 무너지고 기껏 새로 자리잡은 이곳도 엉망이 되게 생겼으니 싸움을 피하고 싶어하는 건 당연하다.

오랜 시간 동안 감정을 먹어치우며 그들의 생각에는 통달해 있었기에 악의는 키득거렸다. 게다가 여기서 싸웠다간 휘말리는 건 분명 일개 클랜 차원에서 끝나지 않을 터.분명 그 피해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이 저들의 입장이라 해도 외통수. 아무리 생각해봐도 순순히 끌려가는 게 맞다. 잠깐 누군가와 눈을 마주친 붉은 머리 용인이 포기한 듯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지간히 분한지 주먹은 꽉 쥐어져 있었으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잘 생각했네. 서로 귀찮은 일은 덜어야지?]

악의는 기분좋게 웃었다. 이렇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듯한 웃음. 한낱 인간들이 할 법한 생각쯤이야 뻔하다. 언제나 그래왔다. 다가오는 반룡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을 먹어치우다가 의아해하고 말았다.

그건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뜨겁게 타오르는 듯한 그런 감정이었다.

……분함?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악의는 알고 있었다. 이 감정이 누군가에게 몇 번이나 맛보았던 최악의 감정과 같은 맛이라는 걸. 끝까지 포기를 모르는 잡초처럼 끈질긴 이들에게서만 맛볼 수 있는 최악의 감정.

"……Acoperit în foc negru."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던 건 분해서가 아니라 아주 작은 소리로 영창하고 있었던 거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문을 읊고 있었단 사실에 악의는 아연해했다.

[왜?]

도대체 왜? 사실상 버려진 게 아닌가? 왜 이렇게 발버둥치는 거지?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미 머리뼈도 수집했을 만큼 뻔히 꿰고 있는 이들이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번만큼은 포기하지 않지?

이전 세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리도 없다.

그런데 왜?

그 의문이 악의의 머릿솝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눈치채지 못했다. 커다란 붉은 대검이 어느새 자신을 세로로 가르고 있단 사실을. 화살과 마법이 자신을 노리고 있단 사실을.

홍유리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Arzând în abis i transformându­se în cenuă!"

마지막 주문을 뱉은 순간, 상공엔 마법진이 떠올라 있었다.

***

다물어지는 턱. 늑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달리는 걸음에 박차를 가하는 것뿐이다.

지금 자신이 쓰러졌다가는 모든 게 끝.

더 이상 열린 가능성은 없다. 여왕은 몰락했으며 만상의 주인은 쓰러졌고 흑린은 힘을 잃었다.

초월의 영역 바깥의 힘을 지니고 있던 자들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종말을 쓰러뜨릴 일말의 가능성이나마 가지고 있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다.

언젠가 잃어버린 자들이 말했던 것과 같다.

마지막 희망 늑대는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지금 자신이 쓰러져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모든 게 끝나버릴 테니까.

차원의 틈새를 달리며 늑대는 자신의 걸음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따라잡혀서는 안 된다. 붙잡혀서는 안 된다. 쓰러져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되뇌이며 더욱 빠르게 내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보인 반대편 통로. 늑대는 그 너머로 힘차게 도약했다.

그리고 두 눈에 보인 건 그저 어둠뿐이었다.

혼돈이 거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진리에게 도착했다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눈 앞의 혼돈은 진리를 감싼 장막이 아닌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였다. 그래. 종말이라는 희대의 괴물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차원의 틈새를 넘는게오래 걸리진 않았다.

늑대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여전히 기나긴 통로가 자리하고 있었다.

……차원의 틈새를 넘는 게 오래걸리진 않았다.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종말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고야 말았다.

틈새와 함께 자신을 집어삼킨 거였다.

차가운 어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만이 가득한 장소. 의심할 여지 없이 종말의 입 안이었다.

늑대는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그건 종종 자신이 써먹어온 방법.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날뛰는 거였다. 이미 어스 서펜트와 화산각룡을 비롯해 여태 자신이 만났던 한참이나 큰 적을 상대로 유용하게 사용했던 방법이지만 이번만큼은 차마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이건 종말이었으니까.

놈의 안에 가득 들어찬 이 혼돈만큼은 어떻게도 할 수 없다.

어느정도라면 혼무로 먹어치우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숨결로 내뿜었던 것조차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에 늑대는 실소했다.

혼돈이란 게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으나, 굳이 말하자면 전부이리라.

그냥, 전부. 진리에 포함된 모든 것이야말로 혼돈. 마찬가지로 종말을 이루고 있는 것 또한 혼돈이었다.

그런 걸 견딜 수 있을 리 없다.

혼무와 흑린을 함께 일으킨 늑대는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다.

***

아연해한 것과는 달리 그들의 저항은 사실상 무의미했다.

악의가 손을 휘저은 순간, 화살은 우수수 바닥에 떨어졌다. 쇄도하던 사슬은 힘을 잃고 엉켜버렸다. 불과 얼음은 서로 부딪치더니 알갱이를 흩뿌리며 사라지고 말았다.

준비된 대마법. 흑점의 폭발마저도 무위로 돌아가 사그라진다.

감정이나 혼란과는 달리 힘의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설령 근원을 빼앗겨 남은 힘이 극히 적어졌더라도 마찬가지.

결국 인류 따위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런 시덥잖고 같잖은 반항밖에는 없다.

버러지가 얼마나 뭉치더라도 결국 버러지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

[이 잡것들이!]

입가를 씰룩거리며 악의는 손을 들어올렸다. 비록 자신의 제안에는 응하지 않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전부 다 쓸어버리면 될 뿐인 일이니까.

애초부터 그럴 생각으로 온 거였으니.

***

건물 아래서 강태준은 목을 들어 저 위를 올려다보았다. 구조를 요청하긴 했지만 제때 올 거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그나저나…'

무작정 대마법을 사용했을 땐 솔직히 말해 식은땀이 흘렀다. 만약 그게 막히지 않았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가 생겼을 테니까.

이미 몇 번째인지 모를 소동. 제발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바라며 강태준은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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