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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14화 (314/407)

〈 314화 〉 #144 악의와의 싸움 (2)

* * *

날이 밝기도 전에 긴 행렬이 이어진다. 또 다시 떨어진 대피령에 사람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제 정말 평화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졌으니까.

여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때문이 아니라 종말 때문에. 가려진 하늘에 무엇이 있었는지 일반인은 알 길이 없었지만 적어도 검고 커다란 기둥같은 무언가가 내려오던 것만큼은 볼 수 있었다.

지금의 피난 상황을 그것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지친 몸을 이끌고 수원에서 멀어지려하고 있었다.

아무리 피곤하고 절망스럽더라도 죽을 순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실상은 조금 달랐다.

수원의 한복판에서 격렬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

악의. 그것을 상대로 이은하는 마력을 발했다. 사슬. 가시. 그물. 말뚝. 매번 형태를 달리하며 공격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는다.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말도 안 되게 강해.

악의의 팔과 강태호의 검이 부딪치자 강한 바람이 불어와 이은하는 질끈 눈을 감았다.

팀장님의 마법도 통하지 않았는데 고작해야 자신의 마력 구현 따위가 어떻게 통할 리 없다.

어렴풋이 소용없는 짓이란 걸 알면서도 발버둥 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

'알파는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이런 괴물을 쓰러뜨린 거야? 심지어 이게 힘을 잃어버린 거라고 생각하면 그냥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도무지 승산이 보이질 않는데?

이미 몇 번째인지도 모를 만큼 나가떨어진 2팀장님과 우택 선배는 둘 다 진작에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 달려드는 이유는 불보듯 뻔했기에 이은하는 입술만 깨물었다.

지원은 요청했을까? 도대체 언제 오는 걸까?

아직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체감상 며칠은 지난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이은하는 고개를 돌려 홍유리를 쳐다보았다.

머리칼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마구 헝클어뜨리며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는 모양. 그러는 와중 검은 무언가가 그녀를 향해 날아들자 이은하는 황급히 홍유리를 끌어당겼다.

네버랜드의 그 때처럼.

기억을 떠올려 당긴 순간, 너무 힘을 주었는지 벽면까지 당겨 부딪치고 말았다. 멍청한 실수에 눈을 부라리는 홍유리는.

"이게 진짜! 이 상황에서도 삽질을…?"

그 얼빠진 표정에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렸다.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검은 무언가가 더 빠르게 다시 쇄도하고 있었으니까. 반사적으로 만들어낸 붉은 장막을 너무 간단하게 꿰뚫어버리고 미간의 지척까지 다가온 순간, 아슬아슬하게 떨어져나갔다. 검은 무언가를 정확히 명중시킨 화살이 궤도를 틀어놓았으니까.

"괜찮습니까!"

크게 외쳐 묻는 말에 옷을 털고 일어난 홍유리는 끄덕이면서 마력을 일으켰다.

아쉽다는 듯 혀를 차는 악의. 그 표정이 맘에 들지 않아 뭉개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 위해선 놈의 비밀을 풀어야만 한다. 무식하게 싸워봤자 승산은 없으리라. 달려드는 우택과 강태호의 공격을 받는 악의. 분명 다음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 복잡한 싸움의 한복판에서 홍유리는 마법을 사용하는 동시에 계속 머리를 굴렸다.

"이, 이거 이길 수 있을까요? 차라리…"

이은하의 중얼거림을 듣는 둥 마는 둥 무시하며 계속.

쓰러뜨릴 수 있다. 만약 정말 악의가 무적이었다면 애초부터 제안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주먹과 검격을 막으면서도 마법과 화살을 무시하는 이유.

'설마 거리?'

아니, 설마 그렇게 단순할까? 애초에 그 거리는 어떻게 구분짓는데?

분명 악의에게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그 능력이 도대체 무엇인지 홍유리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결정적인 퍼즐 하나가 결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마력을 사용했으나 역시 이번에도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미친 수수께끼…'

아득바득 이가 갈려왔다.

***

이제 화살통에 남은 화살은 고작 셋. 어지간한 몬스터를 상대로 세 발이라면 차고도 남겠지만 여태 단 한 발도 통하지 않았으니 이 세 발로 뭘 할 수 있을까.

"염병."

엿같이 돌아가는 상황에 이기준은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러면서도 활에 시위를 거는 걸 포기하지 않고 활줄을 튕기자 새벽 공기를 가르고 세차게 뻗어 나갔다.

회전이 실린 궤적은 마력이 담긴 채 비틀어지며 최대의 위력을 발했다. 연습과 실전을 모두 포함해 요 근래 쏘아본 화살 중 최고라 자부할 정도였다. 어쩌면 이건 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그저 기대에 그친 채 허망하게 떨어지고 말았다.

검은 형체에 빨려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이제 두 발. 자신뿐만 아니라 홍유리와 하연의 마법조차 통하지 않았으니 승산은 터무니없이 적다.

악의가 자신에게 손을 향하자 이기준은 재빨리 바닥을 굴렀다. 그런데도 타이밍이 맞지 않아 적어도 발목정도는 꿰뚫릴 거라 생각했지만 어떤 마력에 끌어당겨져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보다 이기준은 바닥에 틀어박힌 무언가를 주시했다. 검은 무언가 거기에 감상을 품을 새도 없이 다시 주변을 살폈다.

건물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다. 기존 서울에 있던 클랜 건물이라면 모를까, 임시로 구한 수원의 건물은 아무리 튼튼하게 지어진 건물이라 해도 이런 괴물들의 싸움에서 견딜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싸움이 이어질 거라면 지상으로 내려가야 한다.

바깥을 살핀 이기준은 피난 행렬이 이어지는 걸 보고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아래에서 분명 모종의 조치를 취한 것이리라.

'……문제는 이쪽이지.'

더 이상 피해는 번지지 않을 거다. 저걸 쓰러뜨릴 수 있다면 말이다. 강태호는 검을 휘둘렀고 그 외 클랜원들은 활과 마법을 사용하며 그를 보조하고 있었다.

쏘아진 활과 마법이 검은 형체에게로 닿은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걸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 검은 형체는 신경도 쓰지 않고 앞을 막아서는 강태호를 쓰러뜨리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다.

사실 말이 좋아 보조였지 제대로 된 보조도 아니었다. 도무지 공격이 먹히질 않으니까. 행동조차 제한할 수 없으니 아무 의미도 없다. 몇 번이나 부딪치는 공격 속에서 이기준은 암담함을 느꼈다.

아예 공격이 통하지도 않는 상대를 도대체 무슨 수로 쓰러뜨리라는 말인가.

클랜장이 싸울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닌 이상, 강태호마저 정면에서 나가 떨어지면 저걸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은 더는 없다. 전열이 붕괴되면 후열이 무너지는 것 또한 순식간이리라.

그러다가 문득 이기준은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

그러고보니 악의는 어째서 검격을 막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 클랜장이 싸우지 못하는 이상 이 곳 최고의 실력자는 두말할 것 없이 강태호이리라. 그래서 의문을 가지지 못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어째서 마법과 화살은 무시하면서 검격은 막아야만 하지?

화살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마법은? 아무리 강태호가 뛰어나다고 하지만 그의 검격이 대마법을 상회하는 위력을 지녔느냐 묻는다면 절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런데 대마법은 무시했다. 검격은 막아내고 있다.

홍유리가 도달한 의문에 이기준 또한 한 발 늦게나마 도달한 거였다.

'설마…'

그리고 그 해답이 될 결정적인 무언가가 이기준에겐 있었다. 황급히 발치를 살폈다. 아까 구르면서 피했던 바닥에 박힌 검은 무언가. 마력을 장갑처럼 둘러 악의를 걷어내고 그것의 형체를 확인했다.

쇳조각. 하지만 단순한 쇳조각이 아니다.

이기준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쇳조각의 정체는 분명 자신의 화살촉. 그 일부였으니까.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화살촉을 되쏘아냈다…?

단순히 막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반사했단 뜻이다.

자신이 모르는 능력이 있을 수는 있다. 저만한 존재라면 오히려 그게 당연한 일이리라.

'마법과 화살은 둘 다 막지 않았다. 그런데 검은 막고 화살촉은 되돌아왔다…?'

힘에는 기준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 분명 놈을 쓰러뜨릴 방법이 있으리라. 이기준은 강박처럼 그 사실을 되뇌었고 번뜩 떠오르는 생각에 소리쳤다.

아니, 소리치려 했다.

[눈치 빠른 건 질색이야. 하기야… 알아봤자 달라지지도 않겠지만]

비웃음 소리. 그게 이기준이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분명 검을 휘두르고 마법이 쏘아지는데도 귀가 멎은 것처럼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눈. 시야가 흐려지며 점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됐다.

바로 다음으론 가슴께가 서늘해지는 감각. 구멍 난 가슴에 새벽의 찬 공기가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피거품을 토하며 이기준은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말해야 한다. 알려야하는데… 어디가 잘못된 건지 도무지 말이 나오질 않았다.

답답한 심정에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곧 자신이 죽으리란 걸 알게 됐다. 분명 이대로 여기서 죽음을 맞으리라.

이기준이 마지막에 떠올린 생각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거였다.

적어도 손가락에는 힘이 들어가니까. 자신이 토한 피거품을 잉크 삼아 바닥에 글을 적었다.

힘겹게 이어지는 글씨. 사실 트릭은 이렇게 간단했는데……

기어코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이기준은 힘겹게 웃었다. 어떻게 트릭은 알아챘는데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그는 자신이 글을 써놓은 바닥을 안고 추락해갔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

축이 무너졌는지 기울어져가는 건물. 기어코 부서져 무너지기 시작하자 우택의 뒷덜미를 잡고는 어깨에 짊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면목 없다는 듯 기진맥진한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강태호는 콧김만 내뿜었다.

"됐다 인마. 너라도 있어서 망정이지."

아예 혼자 싸우는 거였다면 진작 나가떨어졌으리라. 사실 역량의 차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크지 않은데 문제는 기술이었다.

기량면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다.

도대체 괴물이 기량도 앞서면 이걸 대체 어떻게 이기라는 말인지. 구획보스 이상가는 괴물이 수십 년간 싸움을 익히고 터득한 듯한 기분이었다.

'거기에 영문 모를 능력도…'

빠득, 이가 맞물렸다. 어느샌가 화살이 날아오지 않고 있단 걸 알고 있었으니까. 뺀질이 뺀질이 말은 그렇게 했어도 여기서 죽을 놈은 아니었는데.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다. 짊어진 우택을 내려놓고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다시 악의에 맞설 각오를 다졌다.

땀을 닦아낸 강태호는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런데도 여전히 상황은 암울한 채 그대로였다.

"염병. 지원은 대체 언제 오냐."

수원에 클랜이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 하기야 와봤자 기절이나 하고 짐 덩이밖에 더 되랴. 푹푹 새어 나오는 한숨에 강태호는 어꺠에 대검을 짊어졌고 그에 호응하기라도 하듯 먼 곳에서 헬기의 날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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