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5화 〉 #145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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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악!
애꿎은 허공만을 가른 검이 바닥에 부딪친다. 악의가 다가오는 것에 미리 머리를 가져다댄 강태호는 그 일격을 이마로 받았다.
떨어져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테지만 마력을 집중하고 견디기 위해 바닥에 발을 붙이고… 아니, 깊게 파인 바닥에 그 속에 발목까지 깊게 집어넣고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초인이나 마찬가지인 헌터이기에 가능한 발상. 굳건히 견디고는 되돌려주겠다는 듯 어깨 뒤까지 젖힌 주먹이 세차게 뻗어진다.
분명 명중했는데 이상하게 파고들어가진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감각. 딱히 생각하고 싸운 건 아니었지만 떠올려보면 검이 아닌 주먹으로 닿은 건 처음. 그 순간, 강태호는 두 눈을 부릅 떴다.
분명 두르고 있었을 마력이 순식간에 사라졌기에.
단순히 밀려서 짓눌려진 게 아니다. 여태 그렇게 생각했지만… 뭔가가 다르다.
이어지는 공격을 검면으로 받아내고 물러나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한번 더 닿아보면 알 것도 같은데.'
손을 쥐었다펴보며 아까 그 감각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확실한 건 저 검은 안개와 같은 형체의 안에 분명 뭔가가 있다는 것. 손에 닿은 불쾌한 감각이 그렇게 고하고 있다.
강태호는 어깨를 빙빙 돌렸다.
한번 더 닿으면 실마리를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이미 그럴 체력이 남아있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부상이라면 차라리 포션으로 커버할 수 있다. 마신 것만으로는 모자라 샤워라도 하듯 머리 위에서부터 들이부은 포션이 전신에 끈적하게 달라붙을 정도로 남아있는데 반해 체력은 어떻게도 할 수 없다.
'……뭔가가 있다.'
아까 이마에 닿은 순간 흘러들어온 사념이 머릿속을 헤집는 걸 억지로 참아내며 악의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마법도 화살도 통하지 않는 괴물. 하지만 정말 그런 괴물이라면 여태껏 싸움이 성립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싸움의 실마리가 되리라.
***
검과 손이 어지럽게 얽힌다. 악의에게 달려든 강태호는 그것에게 접촉하기 위해 손을 뻗고 있었고 악의는 틈을 내주지 않겠다는 듯 막아서고 있었다. 막아서는 와중에 몇 번이나 찍어눌러진 강태호는 표정을 일그러뜨려야만 했다.
무기를 든 건 이쪽이다. 그런데도 싸움은 성립되지 않는다. 알고는 있었지만 기량 면에서 한참이나 밀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위에서 아래로 낚아채려하면 어느새 팔꿈치 안쪽에 손이 닿아있고 베려고 하면 물러나있다.
기술적인 면에서 밀리는 게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검성이라 불리는 자신의 형에게도 이렇게까지 밀려본 적은 없었기에 강태호는 난감해했다.
괴물이 기술을 쓴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다.
"이, 망할!"
신경질적으로 떨쳐내자 악의는 거리를 벌린다. 어느새 팔뚝에는 낙인처럼 검은 손자국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찍혀 있었다.
한 번만 닿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 한번을 내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그건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했지만… 저렇게 막아서는 데야 뚫을 방법이 없다.
강태호가 그렇게 생각하는 반면, 악의는 한숨을 내쉬었다.
금방 끝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오산이었다.
기량에선 한참이나 웃돌고 있다. 무기의 차이는 있지만 역량 또한 더 높은 곳에 있다. 마법사들이 여럿 있긴 하지만 그것들의 마력은 자신에겐 통하지 않는다.
그저 귀찮은 날파리들이 앵앵거리는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상 저 무식한 거한과 자신의 1:1 싸움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일대일. 그런데 왜 쓰러뜨리지 못하고 있는가.
그 한 가지 의문이 악의의 신경을 거스르고 있었다.
무기의 유무? 체격의 차이? 포션? 지형? 여러 변수를 생각해봐도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거짓말이다.
사실 그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무르기 때문에.
자비같은 게 아니다.
단지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건 자신이었기 때문에. 언제 늑대와 종말의 싸움이 끝날지 모르기에 촉박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 굳이 말하자면 조급해하고 있어서. 그래서 자꾸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만다.
굳이 전부 죽일 것도 없이 반룡과 이은하만 데려간다면 늑대가 종말을 쓰러뜨렸을 경우의 협상 카드로 쓸 수 있을 테니까. 그 이후에 진리를 삼킨 다음에 이것들을 정리하는 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다. 그래서 싸우는 도중에도 쓸데없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전이라면 그래도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눈앞의 거한은 강하다.
악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다른 세계라고는 하지만 두개골을 수집해 검 끝에 매달아놓았을 정도로 제법 마음에 들었을 정도니까. 버러지들 중에서는 분명 가장 높은 곳에 있으리라.
그와는 반대로 지금의 자신은 약하다.
머릿속으로 알고만 있었던 사실을 새삼스레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자신은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늑대에게 근원을 빼앗긴 지금의 자신은 초월자였던 이전은커녕 정신체에도 이르지 못하는 찌꺼기에 불과하다. 기량에서 웃돌고 마력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봤자 고작 그 정도. 완전한 우위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시간이 끌리고 있는 거겠지.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인 건 창창하게 푸른 하늘이었다. 완전히 밝아온 아침. 그리고 모여들기 시작하는 헌터의 기척을 느끼며 악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분명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던가?
그럴 생각은 없지만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래도 이제는 끝. 뜻밖이긴 했지만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으니까.
***
검정이 들끓는다.
여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기에 마력을 회복하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홍유리는 가장 먼저 그 사실을 눈치챘다.
분명 아침이 밝았는데 다시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여전히 해는 떠올라있는데 그걸 가려버리는 듯하다.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에 이를 악물고 저항했다.
나른해진 몸이 바닥에 누우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또 다른 숨겨둔 능력? 체력이나 마력을 갈취하는 힘인 걸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들끓은 검정은 악의에게로 모여들어 그것을 풍선처럼 부풀렸다.
아직 살아있는 이들 뿐만 아니라 죽은 시체에서도 흘러나온 그것을 드레스처럼 두르고 악의는 좀 더 확실한 형상을 이루어간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결국에 그것들은 악의의 뒤에 모여들어 타원형의 기둥을 만들었다.
'……!'
홍유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목을 죄어오는 이 감각은 분명한 악의. 자신에게서 빠져나간 건 체력도 마력도 아닌 감정이었던 거다.
혐오. 두려움. 공포. 적의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
싸움의 한복판. 사람을 긴장시키는 감정들이 전부 빠져나가니 당연 나른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홍유리는 황당하게도 졸음을 느끼고 있었다.
허벅지를 꼬집어 억지로 자신을 분기시키며 저항해야만 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도시 한복판에 나타난 걸까? 부정적인 감정. 달리 악의라 부를 수 있는 그것들이 만연하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더 불리해진 상황에 포기하는 게 옳았나하는 생각이 또 떠오르고야 만다.
그 나약한 생각마저도 불안이라는 이름으로 악의에게 먹혀간다. 불안은 두려움을 부르고, 두려움은 다시 불안을 끄집어내며 악의는 점점 거대해진다.
그 때처럼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버렸다. 뇌가 멋대로 죽음을 상상하고 그마저 악의에 포함돼 있었다.
필패 그 결과는 몰살.
상상과 감정을 떠올리고 빼앗기기를 반복하며 과부화된 머리. 다른 의미의 정신 고갈이 찾아오기 직전, 그 나약한 생각을 꿰뚫듯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한 줄기 빛이 번뜩이며 뺨을 스치고 나아갔다.
악의의 손에 잡혀 막힌 창이 파르르 떨렸지만 기어코 그 손을 뿌리치고 되돌아온다.
"거, 존나 빨리도 오는구만."
이제야 숨 좀 돌리겠다는 듯이 강태호는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긴숨을 내쉬었다.
줄지어 모여든 헌터들. 전국에서 모인 정예들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뒤늦게 도착해 있었으니까.
***
모여든 헌터들은 이질적인 모습의 악의를 탐색하듯 살폈다.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이 걸린 이유는 선별하기 위해서.
적어도 A클래스 이상의 헌터가 아니라면 맞설 수도 없다는 여명 클랜장의 말에 정예만이 모였다.
당연 긴장하고 왔던 이들이 본 모습은 안개같은 흐린 무언가가 어렴풋한 사람의 형체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었다.
[버러지들이]
심지어 감정을 드러내고 언어를 뱉는 모습. 그렇다고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 이질적이게 느껴진다.
그 검공이 기진맥진하고 여명의 정예들이 나뒹굴고 있었으니 그야 강할 거란 건 뻔하다. 투창을 막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둑한 사위만 보더라도 느껴진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격돌한 순간, 오싹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건 분명 악의에게서 느껴진 게 아니라 좀 더 다른.
아니, 훨씬 머나먼 아득한 차원에서부터 느껴진 무언가였다.
[설마, 벌써?]
***
종말에게서 벗어난 늑대는 스스로 의문을 가졌다.
탈출했다… 그런데 어떻게 탈출했는지 스스로 알지 못했다.
종말에게 삼켜지고 발버둥치고 있었는데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흑린과 혼무를 일으켰어도 역부족이었다. 차오르는 혼돈에 삼켜질 뻔했다.
포기하진 않았지만 방도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종말의 입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
생각해도 나오지 않는 답. 의문은 일단 미뤄두기로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번 더 기회를 얻은 셈이니까. 해야 하는 일은 변하지 않는다.
그저 발버둥칠 뿐.
그런데, 그저 입 밖으로 나온 것뿐만이 아니었다.
찬란한 빛이 전해오는 의지.
언젠가 보았던 진리가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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