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7화 〉 #147 결전
* * *
종말의 입 밖으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온다.
연기라 생각했던 건 이윽고 불길로 화해 솟구쳐나오고 말았다. 꾹 다물린 악룡의 입에서부터 많은 것이 쏟아져나온다.
본래라면 인지할 수조차 없는 혼돈이 우주에 만연한 암흑물질을 밀어내고 가득채워간다. 순식간에 우주의 구성물질이 바뀌어가는데도 어느 순간 멈춰 서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종말은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여태껏 저항해온 이들은 무수히 많았다.
더 강한 적도 있었다. 심지어 얼마 전 근원을 받아들였던 소녀에게는 승산이 적다고까지 느꼈을 정도로.
그러나 처음이었다.
이렇게까지 끈질긴 적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세계와 동화했던 그는 사라졌어야 했다. 그런데도 돌아왔다. 끈질기게 살아돌아와 물고 늘어진다. 심지어 돌아온 그에겐 근원의 일부가 심어져 있었다. 분명 강하지는 않다. 이번에도 역력한 힘의 차이를 보여주고 싸움은 끝났다고 여겼다. 혼돈에 휩싸여 이번에야말로 죽을 거라 확신했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아직 살아있는가. 죽지 않고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가.
순간, 종말 너머의 진리는 처음으로 감정이라 불릴만한 것을 느꼈다.엄습해온 감정은 불안과 두려움. 어쩌면 이 존재는 쓰러뜨릴 수 없는 게 아닌가하는 의심마저 일었을 정도로.
영원의 벽에 가로막혀 혼돈은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됐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작 영역 바깥의 힘 하나에 가로막힌다는 건 불가능하다. 분명 그러할 진데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그것마저도 이해할 수 없는데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종말은 자신의 날개를 돌아보았다.
한쪽 날개가 물어뜯겨 끊어지려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어느샌가 악룡의 눈에 담긴 것은 살의가 아닌 의문으로 변해 있었다.
***
찰나를 영원으로 늘리는 힘. 영원.
이 힘에 처음으로 좌절을 느꼈었다. 절망하고 넘어설 수 없는 벽이라 느꼈다.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우습게 깨부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권능.
그 힘이 자신에게 깃들어있었다.
패배를 직감한 그녀가 다음으로 넘기기 위해 안배해둔 것이리라.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미 영역 바깥의 힘은 가지고 있다. 혼무가 그랬고 흑린이 그랬다. 이제와서 고작 하나가 더해진다고 달라질 건 없을 텐데.
영원의 힘은 어디까지나 시간벌이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째서.
'어떻게?'
어떻게 종말의 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가.
크게 솟구친 검은 불꽃이 더 없이 크게 타오른다. 종말이 입을 벌린 순간, 늑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미 달리고 있었다. 기어코 빠져나온 순간, 늑대는 종말을 노려보았다.그러자 거대한 턱이 종말의 날개를 물어뜯었다.
물어뜯고 물고 늘어진다. 찢어지진 않았지만 늑대는 지금까지의 자신과는 달라졌음을 알게 됐다.
진리로부터 많은 걸 알게 돼서? 아니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영원의 힘이 더 대단했던 걸까?
둘 다 아니었다.
늑대는 점점 거대해져가는 자신을 느꼈다.
비교하는 것조차 무안했던 서로의 격차는 줄어들어간다. 자신에게 깃든 일부를 이정표삼아 소실했을 힘이 스며들어오고 있다.
전부는 아니다. 기껏해야 절반에 불과하리라.
그런데도 늑대는 질 것 같지 않다고 느꼈다.
그 증거로 아까부터 종말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강한 적을 쓰러뜨리는 건 몇 번이나 해왔던 일이니까.
어느새 비슷해진 눈높이. 마침내 싸움이 성립될 수 있을 만큼 대등해진 늑대는 당당하게 정면에서 종말을 마주했다.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쓰러뜨리자.
늑대는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맹세했다.
약속을 지키겠다고. 종말을 막아내고 올바른 결말로 이야기를 이끌겠다고.
***
머지 않은 곳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보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런 걸 느끼지 못할 리 없다. 겨울의 주인을 되돌아보며 서두르자고 말하며 전장에 도착한 그녀는 예상 밖의 광경에 말을 잃었다.
참혹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시산혈해가 펼쳐져 있었으니까. 바닥은 붉게 물들고 부서진 건물에 엉망으로 짓눌려진 고깃덩어리. 그게 사람의 것임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쓰러진 이들이 일반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죽어가는 이들은 하나같이 A급 이상의 헌터들. 한국에 이렇게나 많았나 싶었을 정도로. 거의 기백에 달하는 숫자가 모여들어 있었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낭창낭창하게 휘두르는 여성의 빛나는 창도 누군가의 강철과 같은 주먹도 전혀 닿지 않는다.
도대체 누가 이럴 수 있을까.
구획 보스? 겨우 그 정도로는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존재를 알고 있다. 역병과 질병. 인류가 쓰러뜨릴 수 없었던 재앙이라면 능히 이럴 수 있으리라. 하지만 모든 재앙은 마랑의 송곳니에 숨이 끊어졌다. 네버랜드의 붕괴마저 수습했으니 더는 인류를 위협할 요소 따위 남아있지 않았을 터….
일시적으로나마 평화가 찾아왔다고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도움을 요청했던 문자는 이 상황을 조금도 담지 못하고 있었다.
"……."
잠깐 고개를 돌려보았을 떄, 입을 틀어막고 숨을 참고 있는 제자의 모습에 환영의 나비는 끄덕였다. 헌터들이 둘러싼 중심에 검은 형상이 있었다.여성의 모습이었다. 안개처럼 어렴풋하지만 분명히.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로 거대한 무언가가 거목처럼 자라나있었다.
비록 아직 다 자라지 못해 어렴풋하지만 점점 더 온전해져가는 그건 분명 손의 형상이었다. 손가락 마디는 어렴풋하지만 손바닥에서부터 다섯 손가락이 자라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듯하다.
환영의 나비는 저것이 맨정신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무언가임을 인지했다. 형언할 수 없는 그것을 보기만해도 정신이 어긋나는 것만 같았다.
오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상황. 마냥 생각했던 것보다 더한 괴물이었다. 자신이 이럴진데 다른 이들은 어떻겠는가.
용케도 맞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의미가 있을까. 환영의 나비는 알고 있었다. 정말 강한 무언가에게는 아무리 발버둥쳐봤자라고. 다름 아닌 자신이 그랬으니까. 이미 벗어던진 굴레와 주박이 새삼 목을 조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목을 메만지며 생각했다.
차라리 여기를 포기하고 좀 더 준비를 하는 게 나을 거라고. 수십 년간 스퀘어에서 역병과 질병을 맞상대하며 그것들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던 환영의 나비는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여기서 무작정 싸워봤자 저걸 이기기엔 요원할 거라고. 하지만확실하게 체계와 태세를 정비해 싸운다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리라. 쓰러뜨리진 못하더라도 시간을 끌 수는 있을 터… 마랑이 돌아올 때까지 버틸 수만 있다면 말이다.
"오셨수?"
적을 눈앞에 두고 환영의 나비는 자신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돌렸지만 이미 거기에 있지 않았다. 웬 거한이 붉은 대검을 지팡이삼아 자신을 지탱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되돌아보지 않은 채로 그가 말했다.
"오셨으면 좀 도와주지 그러쇼? 안 그래도 힘들어 뒈질 것 같은데…"
그러려고 온 거 아니냐며 투덜거리는 말. 바닥에 뱉은 침은 가래와 피가 섞여 붉게 보였다. 스퀘어 마스터에게 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불경스러운 말과 행동인데도 밉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처참했으니까.
옷은 대부분 찢겨져 상체가 훤히 드러나 있음에도 먼지와 피가 엉켜 살색이 보이질 않을 정도였다. 어디가 부러지고 빠지기라도 했는지 누구라도 보고 알 수 있을만큼 뼈가 뒤틀려있었다. 심지어 후들거리는 팔과 다리는 힘이 다 빠져 진작에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여명에서 제법 오래 지냈던 만큼 당연 그가 누군지는 알고 있다.
달리 검공이라 불리는 이. 그 정도 되는 헌터가 싸움의 승산을 모를 리 없다. 이길 수 없단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미 다 대피했을 텐데. 단순한 고집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일까.
잠깐 생각하던 환영의 나비는 한숨쉬었다.
물러나건 끝까지 싸우건 간에 결국 자신이 가세하진 않을 순 없을 테니까.
***
격전이 이어진다. 부족한 지각과 시간은 영원이 보조한다.
종말의 두 팔을 고개 숙여 피해내고 손목을 물어뜯었다. 분명 물어뜯은 건 자신인데 팔을 뻗는 힘에 끌려가고 나가떨어질 뻔할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두 다리를 뻗어 종말의 팔에 발톱을 박아넣은 늑대는 탄력을 더해 뛰어올랐다. 고작 C등급 남짓한스킬이 지금의 자신을 보조할 수 있을 리 없다.하지만 받아들인 건 근원의 절반. 깃들어있는 그 힘이 스킬에 더해져 그것을 가능케했다.
용수철을 밟고 뛰어오른 듯 탄력을 받은 늑대는 종말이 날갯짓하는 것을 보았다. 능히 우주를 떨쳐낼 만한 힘이 바람을 일으킨다.
악룡의 벌린 턱으로부터 새까만 숨결이 내쏘아졌다.암흑물질을 밀어낸 혼돈이 한데 섞여 바람에 타고 섞인다.
폭풍이었다. 혼돈을 담은 폭풍이 늑대를 집어삼키려 했다. 다시 한 번 암흑물질을 밀어내고 행성마저 그에 휩쓸려 날아온다.
헤아릴 수 없는 질량은 그 자체로 폭력이었다.
바람에 날려온 몇 개인가의 행성이부딪치려하자 늑대는 그것들을 피하지 않았다. 되려 하나하나 씹어삼켰다.
별을 먹어치우며 꿋꿋이 견뎌낸다. 한 걸음 한 걸음 확실하게 나아간다.
검게 칠해진 우주.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야 할 텐데 한 쌍의 붉은 눈이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종말은 그것이 점차 커져가는 걸 보고있을 수밖에 없었다.알고 있다. 커지는 게 아니라 다가오는 거라고. 붉은 별이 아니라 붉은 눈이라는 걸.
칠흑으로 더없이 검게 물든 불길은 기어코 뱉어낸 혼돈을 집어삼켰다. 오히려 그것을 연료삼아 더욱 크게 타오른다.
흑린이란 감정을 먹어치우고 타오르는 불꽃.
혼돈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면 거기엔 분명 감정 또한 포함되어있다.혼돈을 집어삼키고 있을 수 없을 만큼 크게 타오른 흑린은 늑대의 의지를 받들어 뻗어나갔다.
별을 밀어내던 폭풍과 맞부딪치며 맹렬한 기세를 토한다. 물리적인 힘에 더해 비할 데 없는 종말의 마력이 더해지자 검은 불꽃은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엔 불꽃도 사그라지고 폭풍도 멎고 말았다.
고요함을 되찾은 우주에서 빛줄기가 어지럽게 휘날린다. 암흑물질이 밀려나 비어있는 공간에 다시 들어차는 원소들. 영원의 벽을 흩어내고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 돌아간다.
서로의 공격은 분명 상쇄되었다.
그러나 늑대의 무기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종말은 자신의 한쪽 날개가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기어코 물어뜯어 끊어내고야 말았다. 떨어진 날개를 게걸스레 씹어삼켜 먹어치우는 탐욕스러움에 종말은 전율했다.
그것 자체에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뜯겨나간 날갯죽지가 생기고 긴 뼈대가 자라나더니 피막을 만들어 새로이 날개를 만들어낸다. 만상의 주인과의 싸움에서도 그랬듯 상처는 금방 재생된다.
하지만 더 이상 안심할 수 없었다.
이젠 도저히 늑대를 내려다볼 수 없게 돼 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