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화 〉 #147 결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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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빠르게 움직이며 악룡을 몰아붙이는 늑대. 자신보다 더 빠르게 종말의 손이 붙잡기 위해 다가오자 낮게 몸을 숙였다.
단순한 동작이지만 이미 서로가 보고 있는 건 이 지점이 아니다. 예상했다는 듯 종말의 손은 늑대를 낚아챘고 붙잡았다. 먼저 목표를 달성한 건 종말이었으나 순간 그림자가 치솟았다.
확산해가는 그림자는 순식간에 많은것을 삼켜간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고작 그림자따위가 종말에게 상처입힐 수 있을 리 없지만 '둘러진 것'이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비실체에 둘러질 수 있는 공허. 상위호환인 혼무가 그 힘을 겸하지 않을 리 없다. 따라서, 결과는 뻔하다. 제아무리 마력을 둘러봤자 그림자는 그 모두를 게걸스레 먹어치워간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빠르게 이미 붙잡힌 손에 늑대의 허리가 접히고 말았다. 척추가 꺾여 어깨와 다리보다 허리가 낮아진 괴상한 모습. 다른 생명체였다면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서로가 잘 알고 있다. 고작 그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는 걸.
종말은 늑대의 척추를 으스러뜨리는 데 그치지 않았다. 손톱이 살갗을 찢고 파고들자 늑대는 입을 벌렸다. 다만, 토해낸 건 비명이 아닌 불꽃. 두말할 것 없이 흑린이었다.
검은 불꽃이 뒤덮고 그림자가 잠식해 스멀스멀 타오른다.
늑대를 반으로 찢어버리는 것보다 먼저 검게 그슬린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된 종말은 아가리를 벌리고 집어삼키려했다.
늑대는 물러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자신의 영역이었으니까. 물어뜯고 씹어삼키며 먹어치우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자신이 장기로 삼는 영역이었으니까.
여기서만큼은 밀릴 수 없다.
몸의 안쪽으로 촉수를 얇게 뻗은 늑대는 으스러진 척추 조각을 모아 조립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수술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엉망진창. 부서진 도자기 조각을 모은다고 다시 도자기가 될 리 없지만 무엇보다 뛰어난 접착제가 있다.
부족한 부분은 재생이 매꾸어 순식간에 본래 모습을 되찾는다. 서로의 크기는 동등. 마주 내달린 늑대는 기꺼이 악룡이 걸어온 싸움에 응했다.
세계를 포식하는 악룡과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마랑. 그러한 두 괴물이 서로를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유례없는 두 포식자의 턱이 벌려지고 그 속에서 송곳니를 드러낸다.
먼저 물어뜯은 건 종말이었다. 어깻죽지를 파고 든 이빨. 통각은 없지만 단숨에 심장까지 파고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적어도 힘이라는 부분에서만큼은 감히 비교하는 것조차 무안한 수준이었으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피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늑대는 자신이 있었다.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한쪽 어깨를 도려내듯 씹어낸 종말은 더 깊게 물어뜯기 위해 다시 입을 벌렸으나 쉽지 않았다.
마치 두꺼운 고무를 씹은 듯한 감촉이었다. 수십 겹이나 되는 무언가가 단단히 붙잡고 있다.
그건 근육을 조인 것이기도 했고 촉수를 만든 것이기도 했다. 여러 방식으로 발버둥치며 빠져나가려는 종말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턱을 닫는 힘과 여는 힘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늑대의 노림수 또한 바로 거기에 있었다.
촉수는 종말을 단단히 붙잡았고 기회를 놓치지 않은 늑대는 어깻죽지를 물어뜯었다.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던 종말은 그러지 못해 당황했다. 이미 한쪽 팔은 검게 그슬려 타올라있었고 나머지 한쪽은 늑대가 단단히 물어 고정하고 있었으니까. 두 팔이 봉쇄되자 마력과 혼돈을 사용하지만 그마저도 혼무와 흑린이 맞서고 있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고 본다면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물어뜯은 셈.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붙잡힌 종말과는 달리 늑대의 턱은 재차 씹어댈 수 있었으니까.
그러자, 종말 또한 늑대를 흉내내며 촉수를 만들었다.
효율적인 방법이라면 학습하는 게 당연할 터. 문제는 가능하냐 불가능하냐였겠지만 종말이라면 당연히 가능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즉, 예상한 결과였다는 것.
늑대의 몸이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광폭화. 모든 신체능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리는 A등급 스킬. 마찬가지로 근원에 의해 강화돼 본래의 위력 이상의 힘을 선사한다. 더욱 커다래진 부작용마저 불굴의 정신에 침투하지 못한 채 늑대의 지배 아래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까지 해도 호각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 여전히 힘이라는 측면에서 종말은 몇 수 앞을 달리고 있었다.
턱이 붙잡힌 상태에서 어깨를 물린 그대로 들어올려진 늑대는 목이 휘감기는 감각을 느끼고 눈을 부릅떴다.
꼬리. 놈의 기다란 꼬리가 마치 뱀처럼 목을 휘감아 으스러뜨리려한다. 가까스로 앞다리를 끼워 막아냈으나 그래도 역부족. 조여드는 힘이 늑대의 상상을 뛰어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중에 들린 그대로 발목 뼈와 경추가 부러진다.
하나둘 뚝뚝 끊어져가는 소리가 안에서부터 들려온다.
그래도 늑대는 멈추지 않았다.
목이 휘감긴 그대로 종말을 물어뜯는다.
이미 서로의 붉은 피가 우주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
정말 위협이 되는 건 적다.
아니, 그조차 위협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닿을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옳으리라.
몇번이나 쓰러뜨렸는데 기어코 검에 기대어 견디고 있는 거한. 유려하게 창을 휘두르는 여자를 비롯해 몇몇일 뿐이지만 이제 슬슬 그것도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악의가 뭉쳐 손을 완성시키기만 한다면 싸움을 끝내는 것쯤은 시간문제.
물론 알고 있다. 스퀘어 마스터라 불리는 마법사가 도착했고 무언가 준비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그리고 그 준비가 끝나는 즉시 참전할 거라는 것 또한. 하지만 어차피 마력은 닿지 않는다.
아까부터 그 이유를 거창한 수수께끼라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그 생각 자체가 오산이었다.
써보지도 않은 듯한 무기를 꼬나쥐고 달려드는 마법사들이 같잖고 같잖아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자신이 움직일 것도 없이 배후의 '손'이 단번에 쥐어 터뜨린다.
한줌 핏물이 된 마법사였던 것을 털어버리고 흑린은 창을 붙잡았다.
"……!"
힘껏 저항하는 여성. 격은 떨어졌어도 눈썰미가 어디 가는 건 아니다. 이 붉은 창이 제법 상등급의 재질을 사용해 만들었단 건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쉽게 부서뜨릴 수 없을 정도로.
아래에서 차올린 발을 고개를 꺾어 피했다. 서로가 쥐고 있는 창을 빙그르르 돌리자 그에 따라 은자림 또한 돌게 되었다.
재앙급의 힘이라는 건 아무리 뛰어난 헌터라도 신체능력에서 앞설 순 없다는 뜻이다.
'창을…!'
돌려받기 위해선 기술로 웃도는 수밖에 없다. 힘의 흐름을 읽고 파도를 타듯 힘을 더했다. 그러나 그마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힘이 더해지자 창이 회전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손목의 인대가 늘어나는 게 느껴진다. 포기하고 물러나려던 은자림은 뻗어오는 '손'에 늦었다고 직감했다.
창을 놓고 멀어지는 것보다 붙잡혀 으스러지는 게 먼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끌어당겨졌다.
마력에 당겨져 바닥을 끌며 착지한 은자림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마워요."
조금만 늦었더라면 분명 죽었을 테니까. 미미하게 끄덕이는 이은하를 잠깐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창을 신기하다는 듯 만져보는 악의. 그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무기가 있었어도 밀리는데 무기조차 없이 싸우기란 요원했으니까.
'괴물…'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힘의 흐름을 이용하는 것. 대단한 기교는 아니지만 정교함이 필요한 그것마저 완전히 컨트롤하고 있다. 알고는 있었지만 기량에서 뒤떨어졌단 걸 실감하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쓰러뜨리란 말인가. 내로라하는 헌터들이 머리를 싸매고 있었지만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는다.
적어도 마력이 통하지 않는 이유.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서는 일말의 승산조차 없으리라.
[아…]
그리고 그조차 이미 늦었다는 듯이 마침내 손가락마저 자라나 배후의 손이 완전한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그게 이젠 끝내자고 말하는 것 같았다.
***
지상에서의 싸움이 한창인 때, 다른 차원에서 사투를 벌이던 늑대와 종말은 서로 처참한 모습으로 붉은 우주에서 떨어졌다.
서로가 재생하고 있지만 그 틈을 내주지 않으려 다시 거리를 좁힌다.
싸움의 도중에 늑대는 작은 의문을 느꼈다.
그건 생각보다 이 싸움이 할만하다는 것. 조금씩 밀리는 건 자신이었지만 이 흐름대로라면 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게 의문이었다.
자신에게 깃든 근원은 전체의 절반 남짓.
하지만 만상의 주인은 그 전부를 가지고서야 종말과 맞설 수 있었다. 십분지 일에 불과한 힘을 빼앗겼을 때 포기했을 정도로. 그런데 십분지 일은커녕 절반밖에 가지지 않은 자신은 어떻게 맞설 수 있는가. 그리고 나머지 절반의 근원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처음엔 종말이 처리했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그랬다면 자신에게 깃든 절반의 근원마저 오지 못했을 터. 싸움의 도중에도 그 의문이 계속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의문에 답을 도출하지 못한 채 두 괴물이 부딪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