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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20화 (320/407)

〈 320화 〉 #147 결전 (4)

* * *

환상을 집어삼킨 손. 그 속에서 연쇄적인 폭발이 이어졌고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설령 구현해 실체를 가지게 된 진짜에 한없이 가까운 것이라 해도 상관없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이런 것따위로 죽을 리 없으니까.

창칼. 화살. 총알. 대포. 미사일에 이르기까지 고작 그런 것들 따위로는 구획보스조차 죽이는 건 요원하다. 따라서, 아무리 정교한 가짜라고 해도 악의에게 통할 리 없다.

'조금 예상 밖이었지만…'

스킬을 더한 마법. 예상 이상으로 대단하기는 했지만 결국 기적을 불러일으켰던 만상의 주인과 비교하자면 애들 장난이나 마찬가지인 수준이었다.

자색으로 물든 일대는 난폭한 손놀림에 순식간에 걷어내지고 본래의 색을 되찾는다.

그리고 이미 그 때는 전열을 가다듬은 후였다. 지금의 마법으로 확실히 시간을 벌긴 했다는 뜻. 잠깐 악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헌터들은 많았고 자신은 포위돼있다. 하지만 그게 새삼스레 위협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다만 아직도 이렇게 바글바글하게 남아있는 걸 보니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전부 죽이겠다고 맘 먹었기에 처음했던 제안을 다시 꺼내지는 않는다. 배후의 손은 자비없이 헌터들을 휩쓸었고 피하려고 반응하는 것보다 빨리 지척까지 다가와 쓸어버리는 것에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쓰러져가고 있었다.

"이…!"

안간힘을 쓰던 헌터는 자신의 무기와 함께 한줌 핏물로 변하고 말았다. 쇳덩이와 살점이 엉망진창으로 섞이고 그 위를 새빨간 피가 붉게 물들이고 만다.

"안 돼!"

무슨 사이였는지 격분해서 감정에 몸을 맡기고 달려드는 헌터 또한 같은 신세가 됐다. 두 사람분의 핏물을 흩뿌리고 조금이나마 시야를 가린 사이에 배후의 손이 뻗어나간다.

"……!"

여전히 악의는 홍유리와 이은하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번거로우니 전부 죽이기로 맘먹었지만 당초의 목적이 저 둘이라는 건 잊지 않고 있었으니까.

이젠 정말로 시간이 없다. 언제 늑대 혹은 종말이 찾아올지 모르니까. 일단 하나라도 확보해두면 어떻게든 되리라.

순식간에 뻗은 손은 반룡을 움켜쥐려했다.

목표인 만큼 죽이지는 않으리라. 허나 그리 쉽게 당해주진 않겠다는 듯 바닥을 굴러 피해낸다. 저 샛노란 동공이 분명 자신의 손끝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아예 당해주지 않겠다는 듯 구름 위로 뛰어올라 안착했을 때 악의 또한 배후의 손만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막아선 건 민머리의 쌍둥이 형제. 악의는 몰랐지만 부산의 대표클랜인 광명회의 두 수장이었다. 여명의 뒤를 따르는, 고원이 사라진 지금 2위 클랜이 된 광명회의 수장. 그 실력은 이미 몇 번이나 검증된 진짜배기 초일류.

붉은 창을 휘두르는 그녀를 맞이해 건틀렛이 그 힘을 비껴낸다. 강한 힘이 비껴나가 바깥으로 흐르기 전, 쌍둥이 형인 이회광은 눈을 부릅 떴다.

기술을 사용하고 지성이 있단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흘려냈을 터인 그 힘을 유지한 채 방향을 바꾸다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터무니없이 수준높은 기술에 감탄과 함께 찾아온 것은 마지막 순간이었다. 창을 막기 위해 두 팔을 사용한 순간, 악의는 창을 잡지 않은 손을 펼쳐 자신의 얼굴을 덮어버렸으니까.

마치 손에 입이 달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비명이 들려온다. 곧, 쓰러진 이회광의 머리엔 깊게 패인 다섯 손가락의 자국이 똑똑히 남아있었다.

몇 cm나 파고들어 있으니 의심할 여지없는 사망. 어이없을 만큼 간단하게 죽어버렸다. 이회광의 죽음에도 이회명은 동요하지 않고 대처했다. 오히려 아까 악의의 두 손이 막혔을 때를 기회삼아 복부 깊숙이 자신의 무기를 찔러넣었을 만큼.

여태 그래왔듯 마력은 사라진다. 하지만 합금으로 만든 무쇠봉은 사라지지 않고 악의의 반대쪽까지 뻗어나오는 데 성공했다.

싸움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입힌 상처. 유효타라고 할 수 있으리라. 어쩌면하는 기대는 배후의 손이 이회명을 쥐어 터뜨린 순간 사라졌다.

"괴, 괴물…"

바로 그랬다. 사람이라면 치명상이었을지도 모르나 상대하고 있는 건 정체모를 괴물. 기가 질린 헌터들이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거나 뒷걸음질치고 있을 때, 홍유리는 보았다.

무쇠봉이 꿰뚫은 순간, 아주 일순이나마 악의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추적의 마안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어쩌면 자신마저도 착각이라 생각했을지 모를 만큼 짧은 순간이었지만.

'봤어.'

문제는 그 표정이 아니다. 무쇠봉이 찌르는 순간, 마안과 용종의 시력으로 그 안에 든 것을 보고야 말았다. 치솟아오르는 구역질을 틀어막으며 숨을 참아야만 했다.

'설마…'

마력이 통하지 않는 이유. 생각보다 훨씬 단순한 거였다. 통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것이 대신 마력을 받아내고 있었으니까.

악의속에서 들려온 비명은 정말 고통에 찬 울음. 엘릭서로 제조돼 그 안에 가득 찬 악의는 흑린이었던 자아를 주체로 지금의 악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외의 의식과 사념은 모조리 '안'에 있었다.

즉, 반대. 마력이 통하지 않는 게 아니라 통했음에도 상관이 없는 거였다. 어차피 그 고통은 악의의 주체가 아닌 그 외의 사념들에게 닿아 비명과 함께 사라질 뿐이니까. 바로 그렇게 악의는 사념을 통제하고 있었다.

비실체의 힘은 사념에게. 그러지 못하는 실체를 가진 것은 직접 받아내는 것. 그게 마력이 통하지 않는 이유. 아니,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였다.

'지옥.'

홍유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죽어서도 해방될 수 없는 지옥. 악의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영원히 고통받을 끔찍한 굴레의 도가니라고. 처음에 느꼈던 것에 비하자면 한참 사그라졌던 악의는 단지 안에 쌓아두고 있었을 뿐이다.

비록 죽어버린 누군가가 어렴풋이 깨닫고 남긴 메시지는 닿지 않았지만 둘의 죽음으로 그 사실을 깨닫게 됐다.

고개를 털어 잡념을 떨쳐낸 홍유리는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악의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를. 문제는 그럴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결국 고통받는 게 사념인 이상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비밀을 밝혀냈다고 악의를 쓰러뜨릴 뾰족한 방법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헌터들의 목숨은 이러는 순간에도 사라져간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헌터들이 모였음에도 마찬가지. 결국 강태호가 없는 이상 지금의 악의를 정면에서 막을 수 있는 헌터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결국 더는 막아서는 이가 남지 않게 됐을 때, 배후의 손이 자신을 쫓기 시작했다. 비스듬하게 구름을 꺾은 순간 귓볼을 스치는 감각에 침을 삼켰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서 해야만 한다. 물러날 수도 없거니와 물러나서도 안 된다. 붉은 구름에 떠 올라 악의를 피하며 궁리하고 또 궁리한다. 그럼에도 방법을 찾지 못해 잡히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을 때,

[……좋아. 그럼 쉬운 것부터 해볼까?]

배후의 손은 좀 더 쉬운 먹잇감을 찾겠다는 듯 꿈틀거리며 방향을 바꾸었다.

***

새까만 손이 다가온다.

실시간으로 커져가는 손을 보면서 백소율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보가 된 것만 같았다. 그저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여기까지 오면서 들었던 작전이나 떠올린 생각. 그동안 배웠던 마법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죽음의 위기를 겪는 건 처음이 아니었으나 그 어느 때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마치 손에 잡힐 것처럼. 아니, 손에 잡히는 건 자신이겠지.

멍하니 있던 백소율은 자신의 시야를 가득 채운 손이 다시 작아지는 걸 보았다. 영문 모를 마력이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괜찮냐고 양어깨를 두드리는 갈색 머리 소녀를 보고서야 백소율은 멍하니 끄덕였다.

"고마워요…"

과한 호흡을 가라앉히고 다시 정면을 본다. 꿈틀거리는 검은 손가락들이 피아니스트의 손처럼 더듬거리고 있었다. 분명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자신 또한 죽고 말았으리라. 죽지 않았더라도 혹은.

어찌됐건, 노려지고 있는 건 분명하다.

겨울의 주인과 스승님은 다시 마법을 준비하고 있을 터. 문제는 이미 많은 헌터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있다는 점. 이은하의 손을 끌어당긴 백소율은 수인을 맺어 환상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자신을 노리는 듯하지만 확신할 순 없었으니까.

이미 전의가 사라진 헌터들을 보건대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으리라. 자력으로 어떻게든 견디는 수밖에 없다. 환영에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나 잠깐이라도 눈을 가릴 수 있다면 만족할 수 있다.

어느새 백소율의 뒤로 펼쳐진 무수한 환상이 자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연한 보라색이 아닌 어느 때보다도 짙은 자색. 그리고 그 사이로 검정이 따라오기 시작한다.

환상따위는 잠시도 방해하지 못하고 사그라든다.

곧 두 사람을 집어삼킬 거대한 손은 바닥을 내리찍었고 거기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한줌 흙과 콘크리트 가루를 쥐었다펴는 배후의 손. 악의는 상공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이은하는 멍하니 외마디 소리를 흘렸다.

왜냐하면 구름을 타고 있었으니까. 붉은 구름이 아닌 보라색 구름을. 누구의 것인지는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

"소율아!"

놀란 듯 이름을 부르는 말에 백소율은 애써 고개를 돌렸다.

"……오래는 못 해요."

혼자도 아니고 두 사람을 짊어지고 도망치는 건 절대 쉽지 않으니까. 답없는 적을 상대로 백소율이 택한 건 도주. 마법이 완성될 때까지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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