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화 〉 #149 마지막 이야기
* * *
혼돈의 장막은 언제나 그렇듯 단단한 껍질처럼 찬란한 빛을 감싸고 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언어를 말하는 존재가 아니다. 피조물의 어리석은 언어 따위를 창조주가 사용할 필요는 없으니까.
대신 의지로써 표명해온다.
여기서 멈추지 않겠느냐고.
자신이 살아있는 한 별의 순환은 이어진다. 정말 아득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종말 또한 되살아날 수 있다.질서와 법칙은 무너지지 않는다. 미래영겁의 가능성은 스러지지 않고 이어지리라.
늑대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이 아끼는 세계가 무너져야만 할 테니까. 그걸 결코 용납할 수 없으니까.
서로가 보고 있는 지점이 다르다.
진리는 미래의 가능성을 위해 별의 순환을 바랐지만 늑대는 현재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별의 순환을 멈추기로 맘먹었다.
서로의 의지가 상충한다면 한 쪽이 꺾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리는 그게 불가능하단 걸 알고 있었다.
종말을 쓰러뜨린 늑대는 그 힘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으니까. 자신의 이면이 그에게 스며들어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근원의 절반까지도. 셋 중 둘이 그에게 있다면 이미 자신의 힘을 넘어서 있단 것과 마찬가지.
그를 쓰러뜨리는 것따윈 불가능하다.
따라서,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해낸 진리는 자신이 미처 전하지 않은 것들을 전했다. 정보는 오감으로, 그리고 그조차 넘어 많은 것들을 보여주었다.
미래영겁의 가능성. 그 속에서 싹틀 많은 것들을 예상하고 그려낸 진리가 보여준 광경은 그저 아름다웠다.
이제껏 보지 못한 생명이 싹튼다. 상상의 범주를 넘어선 무수한 것들. 진리가 피워낸 생명들이었다. 미생물과 플랑크톤의 영역을 넘어 환경에 적응하고 새로운 형상을 이뤄낸다.
뿔이 있고 없고, 날개가 있고 없고, 다리가 있고 없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생명.그 중에는 당연 일반적인 범주의 이해와 상식을 넘어선 생명체 또한 있었다. 인류는 그들을 몬스터라 부르는 모양이었지만 그 또한 엄연한 생명이었다. 단지 진리가 빚어낸 가능성. 더 정확히는 '실패한 가능성'이었을 뿐.이토록 멀리서 보게 되니 그 실패조차도 더 없이 아름답게 느껴지는데 기어코 그를 발판삼아 발돋움한 생명은 마침내 문명을 꽃피우고야 말았다.
고작 가능성에 불과했던 것들이 마침내 성공에 이른 셈.
그들은 짐승과는 달리 두 다리로 걸었고 소리로 의사를 전달했으며 도구와 불을 사용했다. 방법을 익히고 해결책을 만들며 지식을 공유하고 익혔다. 머잖아 그들은 자연을 발 아래 두고 더 많은 것들을 이룩해냈다.
그것을 문명이라 불렀다. 그들을 인류라고 불렀다.
싹 튼 가능성에 진리는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기나긴 세월동안 문명은 진보했고 대자연을 넘어 별을 개척하기에 이르렀다.놀라운 일이었다. 물고기처럼 물 속에서 살 수도 없고 짐승처럼 빠르지도 않다. 그렇다고 새들처럼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오직 그들만이 문명을 이룩해냈다.
가능성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그들 또한 자멸하고 말았으니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하고 반복해도 그 너머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단순한 확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희미한 확률이 의미없어질 만큼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넘어서지 못했다. 결국 이 작은 세계를 가득채울 때까지도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진 못했다.애초에 자신에게 불가능했으니 그들에게도 불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좁고 불안정한 세계. 이 세계를 넘어설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셀 수 없이 반복하며 그들을 도왔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그들을 몰아세우기도 했다.
혹시라도 가능성은 역경 속에서 싹트는 게 아닌가 하고서.그럼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당장에라도 깨질 것처럼 좁은 세계를 넘어설 방법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진리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런 감정은 피조물들이나 가질 법한 것들이었으니까. 단지 무기질적으로 무감정하게 반복할 뿐.별의 순환을 이어가며 언젠가 가능성이 이어지리라 믿으며.
…….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 너머엔 도달하지 못했다.
다만, 조급함을 느껴서였을까. 시간이 흘러서는 그들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어쩌면 증명해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이전에 '실패했던 가능성'들을 끌어와 그들을 몰아세운 건 그러한 이유였으리라. 역경과 궁지에 몰려서야 더 빛을 발할 테니까.
그것으로도 부족해 진리는 더 많은 일을 해왔다.
가령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 새로이 빚어내는 것. 종말이나 근원같은 이면이 아닌 아예 다른 존재로써.
차원을 넘나들고 상식과 이해를 벗어난 존재. 인류는 그들을 신이라 부르기도 했고 악마라 부르기도 했다. 능히 '초월자'라 불릴 만한 존재들.
그마저 결국엔 자신에게 되돌아오며 덧없이 사라졌다. 정말 영원한 것따윈 어디에도 없으니까. 가장 최근에는 흑린이라 불리기도 했고 여왕이라 불리기도 했던가.
매번 방식은 달랐지만 그런 존재들을 빚어내기도 했다.
혹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그런 영역에 스스로 도달한 자도 있었다.
때때로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노리기도 했고 혹은 평온히 살아가기만을 바랐다. 여전히 가능성의 너머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는 와중에 그들이 나타났다.
멸망한 세계의 잔재. 속된 말로 찌꺼기. 하나하나는 의미 없을 만큼 미약하디 미약한 보잘 것 없는 이들이 한데 뭉친 것들. 그런데 그들이 뭉치자 기적이 일어났다. 그건 여태 없었던 일.자신도 모르는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데려온 것이었다.비록 그 존재는 영육이 어긋나 있었지만 기적이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실패한 가능성'에 몸 담아 온갖 고난과 역경. 시련과 불가능을 뛰어넘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자신의 앞에 서 있다.
누구도 쓰러뜨리지 못했던 자신의 이면. 종말마저 먹어치우고 기어코 자신마저 넘어서 초월을 지나 신역에 다다라있었다.
진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고 여겼다.
따라서, 결과에 순응할 뿐.
그라면 언젠가 가능성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득할 수 없다면 거기까지일 뿐. 그와 싸울 수는 있겠지만 결과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진리는 늑대의 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종말이 올 거라던 6월은 훌쩍 지났다. 유난히 더운 여름이 지나 겨울도 끝이 나고 4월이 찾아왔다. 정말 모든 게 끝났다는 게 실감날 만큼 재건된 도시.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을 되찾은 셈이다.
"헥…"
오늘도 어김없이 바닥에 대자로 뻗은 이은하는 옆구리를 차는 감촉에 감길 것 같은 눈을 게슴츠레 뜨곤 헥헥거렸다.
"아, 비키라고!"
어차피 넓은데 좀 비켜서가지. 옆으로 구르려 했지만 진이 다 빠져서 움직이질 않았다. 그러자 발끝이 갈비뼈 사이를 콕 찌르더니 몇 바퀴나 구르게끔 했다.
"알아서 비키면 좀 좋냐?"
얄밉게 투덜거리는 말에도 대답할 기력이 없다. 아무 말도 못하고 땀 범벅이 된 채로 바닥에 얼마간 누워있었을까.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뺨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이상한 걸 보는 듯한 눈으로 우택 선배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도 참 징하다."
"……?"
"안 힘들어?"
뺨에 닿은 캔커피. 이제 살겠다는 듯 받아들어 마시니 한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기왕이면 물로 주시지."
아니면 이온음료라던가. 괜히 투덜거려보자 얼씨구? 하는 반응만 돌아와 멋쩍어졌다.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 같아 뭐라고 말하려다 들은 건 조금 진지한 말이었다.
"이제 그만해도 되잖아."
"……?"
"몬스터도 거의 없어졌고 있어봤자 잔챙이니까. 너도 알잖아?"
이은하는 담담히 끄덕였다.
그 말마따나 시대는, 세상은 변하고 있다. 더 이상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고 기존에 있던 몬스터들마저 쓰러지고 진짜 의미로 평화가 찾아오고 있다.
억눌러졌던 지난 수십 년을 따라잡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문명. 더 이상 시대는 헌터를 원하지 않았다.
개인의 무력은 사회의 불안을 초래할 뿐이니까. 아예 한국같은 경우는 완전히 안정화 돼 헌터들의 절반 가까이가 은퇴했을 정도였다.
일이라고 해봤자 가끔 나가는 파견 정도일까?
"근데 왜 그렇게 열심히 하고 그래?"
이은하는 눈을 끔뻑였다.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냥요?"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전부 마신 캔을 가볍게 던지자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쓰레기통에 골인했다.
"별로 이유는 없는데…"
굳이 따지자면 왠지 끝나지 않은 것 같아서. 인류는 그토록 바라던 평화를 되찾았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은 이가 있어서. 그래서 오지 않을 거면 못 오는 게 아닌가 싶어서. 정말 만약에 잘못된 건 아닌가 싶어서. 사실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잡념을 떨칠 수 있었다.
"대단하네."
솔직한 칭찬에 이은하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아직 멀었네요."
나름 열심히 한다고는 했는데 차이가 좁혀지는 것 같지가 않았다. 매번 녹초가 돼 쓰러지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언제쯤 두 발로 걸어서 연무장 밖으로 나가보려나?
더 오가는 말은 없었다. 대신 요란하게 울려퍼지는 알람 소리에 이은하는 킥킥 웃어버렸다. 멋쩍어하며 알람을 끈 우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흠. 퇴근 시간이네. 먼저 간다."
"엥? 벌써요?"
"오늘 반차거든."
"요즘 되게 날로 먹으시네……"
"아무튼, 먼저 간다."
이은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힘들어서 아직 못 일어나겠으니까. 언제쯤 이 차이가 좀 좁혀지려나.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앞날이 깜깜하다. 새삼 생각해보니 사서 고생길에 오른 거 아냐? 뒤늦게 후회가 몰려오는 것 같다.
푹푹 한숨쉬고 있을 때 들려온 말에 이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맞다. 근데 생각보다 그런 것 같지도 않더라고."
"……?"
"힘내라고."
***
유유히 연무장 밖을 나섰다. 문을 닫자마자 홍유리는 심호흡하며 숨을 가다듬었다.구태여 티를 내진 않았지만 이마에 흥건한 땀에 젖은 머리카락. 그리고 볼에 난 상처까지. 누가 보더라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자존심 때문에 티 내지 않은 것뿐이었지.
"저 미친 재능충."
아니 근데 이게 어디서 얼굴에 흠집을? 다시 돌아가서 흠씬 패버릴까? 어차피 이런 날도 오래 가진 못 할 것 같은데. 그도 그럴 게 마법까지 다 쓰고도 이 정도니까. 슬슬 상대하는 게 진짜로 버거워지고 있다. 아직까진 괜찮아도 내년 이맘쯤 되면 진짜로 져버리는 게 아닐까. 듣기론 백소율도 정식으로 후계자 자리를 꿰찼다던가…
"망할 년들."
그놈의 재능. 툴툴거린 홍유리는 간단히 세수해 털어버리곤 집으로 향했다. 점심 시간이었지만 식사 대신 새로 생긴 일과가 있었으니까. 그날로부터 변하지 않는 풍경. 방이라곤 했지만 어지간한 집 못지않은 크기였다. 그리고 침대 위.홍유리는 가만히 그 뺨을 찔러보았다.
참 보드랍고 촉촉하다.
곤히 잠들어 깨어날 기미도 없지만 여전히 생생한 감촉. 혼수 상태라고 들었는데 그런 게 아니란 걸 알고 있다.영혼이 빠져나간 상태. 신기하게도 걱정했던 것처럼 상태가 악화되거나 썩어가진 않았지만 아무리 흔들어봐도 깨어나진 않는다.
"……."
전부 다 변하고 일상을 되찾아가는데 그것만이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깨어나지 않는 페리가 지난 날들이 꿈 같은 게 아니라는 무엇보다 큰 증거였다.
"언제 올 건데……"
무려 10개월. 알파와 함께 지냈던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이었다. 고작 반년도 안 되는 짧은 나날과 1년도 안 되는 기다림. 뭐 그게 별 거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만 같았다.
말랑한 볼만 콕콕 찌르다 바깥을 쳐다보았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바람에 흩날려 내려온다.
분명 작년에도 이랬을 텐데. 여유가 없어 둘러보지도 못했지. 하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창문을 열자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아직 날은 추웠지만 견딜 만한 정도였다.
"약속했잖아…"
언제가 되면 돌아올까. 기어코 1년을 꽉 채우려나? 아니면 10년? 설마 끝까지 안 돌아올 셈은 아닐 테고.
저도 모르게 새어나온 한숨에 바람에 날린 벚꽃이 오도가도 못하고 살포시 창가에 내려앉았다. 바깥으로 치우려던 홍유리는 손가락에 느껴지는 묘한 감촉에 꽃잎을 뒤집었다.
"머리카락?"
아니, 그것보단 좀 더 굵은가? 눈을 끔뻑이다 별 거 아니겠지 여기고는 치워버렸다. 창문을 닫고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페리의 하늘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쯧. 벌써…"
무슨 1시간이 뭐 이리 짧아?
서둘러 준비하고 나가느라 보지 못했다. 조그맣고 가녀린 손가락이 조금 꿈틀거린 것을.
***
악의를 마지막으로 시련이라 불릴 만한 것 없이 평화가 찾아왔다. 혹자는 그 날의 괴물. 종말이 다시 찾아올거라 부르짖으며 사이비 교를 세우는 둥 해프닝은 일어났지만 10개월이란 시간은 새로운 나날에 적응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가디건을 여매고 홍유리는 자신을 신기하게 보는 눈에 혀를 찼다. 몬스터가 거의 사라지고 더 그렇게 된 눈빛들. 이젠 익숙해 졌다고 생각했는데 동물 쳐다보듯 하는 눈이 익숙해질 리 있으랴.용종이 됐기 때문인지 아예 사인을 해달라고 오는 사람도 종종 있었고…
"……?"
길을 걷던 홍유리는 팍 인상을 썼다. 자신을 보고 신기해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 바퀴벌레같은 한쌍이 있어서였다.
"얼씨구."
손까지 잡고걷는 모습이 아주 같잖지도 않다.
날마다 서로 물고 빨고 난리도 아니겠지. 심지어 얼마전에 식까지 올린 게 아주 가관이었다. 예전에 그 차가운 도시남자 컨셉은 내다 버렸는지 아주 사람이 변해 있다.
팔짱끼며 걷는 둘. 보기만 해도 깨가 쏟아지는 모습에 뭐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자 싶었던 홍유리는 기어코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헛웃음을 뱉었다. 그래도 꼴에 헌터라고 그건 들었는지 찔끔한 눈치로 기어코 자신을 못 본 척 하고 지나치려하자 홍유리는 코웃음쳤다.
이젠 완전히 커플이 된 두 사람. 아니, 식까지 올렸으면 부부인가? 그동안 잘린 팔도 완전히 나아 있어 건강한 모습이었다.
누군 덕분에 물려받은 팀장 자리는 아직도 때려치질 못했는데 달려가서 언제 복귀하냐고 들쑤셔볼까?
"휴."
괜히 그래봤자 뭐가 달라지겠나. 벚꽃까지 떨어져 옆구리가 쿡쿡 쑤시는 듯한 기분에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웬걸. 재수없게도 이마에 들러붙은 꽃잎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아오 진짜!"
괜히 괴성을 질렀다가 화들짝 놀라는 사람들. 자신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모습에 되는 게 없다 여긴 홍유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얼른 클랜으로 복귀하는 것뿐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춰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왔지만, 그 때는 또 서류가 쌓여있었다. 홍유리는 이은하를 흘겨 보았지만 아무것도 모른단 눈치로 태연한 모습에 가슴을 두드렸다.
그야, 아침에는 저 둔탱이를 봐줘야하니까. 퇴근할 때까지 다 정리하려나 싶었던 홍유리는 떠넘기기 위해 옆자리를 쳐다봤지만 비어있었다.
"야. 이거 어디갔어?"
"네? 선… 부팀장님 퇴근하셨는데요?"
일찌감치 눈치채고 튀었다 이거지? 안 그래도 요즘 오후에 반차쓰는 일이 잦더니 하여튼 눈치만 늘어가지곤.
"아… 시발."
암담함에 머리를 긁은 홍유리는 또 뭐가 얼굴에 닿는 감촉에 와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 망할 꽃잎. 이제 보니 창문이 열려있었다.
"……."
거 참 운도 지지리 없지. 누구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화낼 기력도 사라져 커피나 사오려 일어난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꽃잎 뒤에 붙어있는 머리카락. 아까 집에서도 이랬는데…
곰곰이 생각하다가 의아해졌다. 어지간하면 넘어가겠지만 벌써 세 번째. 아니, 네 번인가? 바닥에 떨어진 것도 아니고 흩날린 꽃잎에 머리카락이 붙을 일이 뭐가 있다고?
남들같으면 자기 머리카락인가 싶어 넘어가겠지만 홍유리는 손을 배배 꼬아 앞머리를 내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 빨간 색이 갑자기 검은 색이 될 리 있겠는가.
게다가 묘하게 거칠고 뻣뻣하다……?
어쩐지 전에 만져본 것 같기도 한데… 혀를 찬 홍유리는 이게 무슨 말같지도 않은 생각인가 하고는 바깥으로 나섰다.
늘 그랬듯 주문한 아이스 커피를 받아들곤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더니 대체 언제 들어갔는지 꽃잎이 흘러내렸다.
"……뭔."
진짜 뭐에 홀리기라도 했나? 머리를 짚고 고개를 흔든 홍유리에겐 아직 황당한 일이 남아있었다.분명 받아들었던 커피가, 지갑을 꺼내느라 잠깐 계산대에 올려둔 사이에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으니까.
"저, 커피는요?"
"네? 드렸는데……"
당황하는 점원을 보며 홍유리는 끄덕였다. 그러니까 묻는 말이지. 아직 손에 닿은 차가운 감촉이 남아있는데. 두리번거리던 홍유리는 아까 떨어진 꽃잎들을 보고 위화감을 느꼈다.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져 글자를 만들고 있었으니까.
"야… 약… 약속…?"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별 이상한 날도 다 있지. 그것보다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 커피에 발이라도 달린 게 아니라면 간도 크게 커피를 훔쳐간 씹새가 있단 말인데…… 홍유리의 붉은 눈이 더욱 붉어지기 시작했다.
추적의 마안. 어떤 미친놈인진 모르겠지만 오늘 잘 걸렸다고. 정말 가만 안 놔두겠다고 다짐하며 흔적을 따랐더니 클랜까지 이어져있었다.
"오호라."
그래. 잘 생각해보면 헌터도 아닌 일반인이 가져가서 도망치는데 모를 리 있겠는가. 갑자기 유력한 용의자를 떠올린 홍유리는 입술을 비틀었다.
"이 씹새가?"
이딴 유치한 장난을 칠 만한 사람도. 그리고 안 들킬 수 있는 사람도 그밖엔 떠오르지 않으니까. 흔적을 따라 가니 옥상까지 이어져있었다.
이젠 도망칠 곳도 없지. 독 안에 든 쥐였다. 반드시 죽여버리겠노라 다짐한 순간, 바로 아랫층의 문이 열렸다.
옥상의 아랫층. 즉, 클랜장실. 태연하게 걸어나온 강태호를 보고선 쌍심지를 켠 홍유리는 득달같이 소리치며 달려들려다가 강태준과 하연을 보고선 멈춰서 입을 막았다. 그리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의아해했다.
분명 오늘은 1, 2팀에 회의가 있었을 터. 점심시간동안 이어지고 이제야 끝난 모양인지 뻐근하게 기지개를 펴고 하품하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연기같아 보이진 않았다.
뭐야? 그럼 누군데?
홍유리는, 입을 틀어막은 자신의 손에 냄새를 맡았다. 그러자 눈물이 핑 도는 듯했다.그건 어쩐지 그리운 냄새. 전혀 낯설지 않았다.
"아…"
터져나온 외마디 소리. 문고리를 돌렸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떨리는 손이 그걸 방해하고 있었다.
심호흡과 함께 마음을 다잡곤 문을 열었을 때, 옥상엔 아무도 있지 않았다.텅 비어있는 옥상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럼 그렇지."
애써 마음을 다잡고 꿋꿋이 일어서려는데 급하게 옥상을 오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얼른 눈물을 닦아낸 홍유리는 태연을 가장하려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하늘색 머리카락의, 분명 깨어나지 못했던 페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너, 너…!"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혹시 꿈이라도 꾸고 있나? 아니면 혹시 환상은 아닐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페리에게 끌어안긴 홍유리는 벅차오르는 감정에 그만 말을 더듬고야 말았다.
"어, 어떻게…?"
"에헤헤~"
대답하는 대신 마냥 좋다고 웃는 그 얼굴이 자신을 올려다보자 왈칵 감정이 치솟아올랐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참지 못하고 끌어안았다. 애써 표정을 숨겼지만 기쁨을 감추진 못했다.
최악의 날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니, 최고의 날이었다. 놓지 않겠다는 듯 소중히 끌어안은 홍유리는 눈물을 참았지만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흘러 지나쳤지만 남은 게 있었다. 아까 그 익숙했던 그리운 향기가 묻어 남았다.
"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홍유리는이번만큼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다 마신 커피 잔이 놓여 있었다. 보았지만 그런 사소한 것따윈 신경도 쓰지 못했다. 그가, 거기에 있었으니까.
"약속. 지키러 왔다."
붉어진 눈시울. 애써 참지 못한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完)
***
진리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높은 확률로 자신마저 먹어치우고 별의 순환은 끊어져 세계는 멈추고 말리라 생각했다. 낮은 확률은 설득된 그가 종말을 대신해 집행하는 역할을 완수하는 것이었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으니까.
진리는 길게 이어진 선을 보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실재하는 것이 아닌 그가 보여준 가능성일 뿐. 당장 끊어지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얇디 얇은 선이었다. 그 길고 가느다란 선은 우주의 너머 지평선의 끝을 넘어 이어져있다.가능성이라는 이름의 선. 또한, 이 작고 불안정한 세계에서 자신이 메달렸던 무언가.
다시, 진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긴 선이 이어져있다. 그건 앞으로의 미래가 아닌 지나온 과거.
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통해 이어져있었다.
또한, 그 선은 진리의 눈을 벗어나 인지할 수 없는 머나먼 곳까지 다다라있었다.
어쩌면 그 너머에 선은 끊어져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단 걸 알고 있다. 길게 늘어진 선은 다시 되돌아와 과거로 향해 뻗어나간다.하나의 선이 길게 이어져 띠를 이루고 있었다.
이윽고, 그것이 마치 심장처럼 맥동했다.
진리는 고개를 들었다.
언젠가는 지나온 과거와생겨날 미래. 무수한 가능성. 물론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10개월, 그는 증명해냈다.
이 좁은 세계를 부수고 무수한 차원의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불안정하다 생각했던 세계를 무너뜨리고 보여주었다. 자신의 불안 따위는 날려버릴 거대한 흐름을.
'내가 이어가겠다.'
언젠가 들었던 말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계속해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 느리게 맥동하는 세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저 너머의 미지. 부숴진 작은 세계와 더 커다란 세계의 바깥으로 흘러나간 자신의 이면. 그 반쪽.
진리는 더 이상 매달리지 않았다.
언젠가 가능성이 끊어지고 우려했던 때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안은 없다. 언젠가 세계가 진정한 의미의 끝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그는 약속해주었으니까. 시간이 흐르면 다시 자신이 깨어나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기고 깊은 잠에 빠져들기로 했다.
……그렇지. 기왕 잠에 드는 거라면 이야기를 떠올려보도록 할까.
누군가가 소설 속에 들어가 몬스터가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