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5화 〉 #151 되살리기 전에
* * *
정말 일을 그만 두게 된단 건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더 이상 헌터로서 활동할 필요가 없으니 말을 꺼낸 거였지만…
한가해지면 뭐부터 하는 게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내려오는 와중 이은하와 놀고 있는 페리의 모습이 보였다.
좋아라 웃으며 박수치고 있는 참 어린애같은 모습.
절로 미소 지어질 만큼 보기 좋은 모습이지만 조금 아쉽기도 했다. 페리는 말을 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행동으로 이은하의 목에 팔을 둘렀을 때, 눈 사이를 좁혔다.
"교육은 시켜야겠지."
물론 실제 나이로 치자면 두 살도 안 된 사람도 아닌 어린애라지만 외견은 열살 전후이니 말도 못 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그건 싫어.'
누가 페리를 손가락질한다고 상상해보면 우선 그 손가락부터 꺾고 생각할 것 같았으니까. 부모는 아니지만 뒤쳐지거나 놀림받는 모습은 눈에 흙이 들어와도 보고싶지 않았다.
애초에 호기심 강한 어린아이. 요정과 자신들만이 아니라 제 모습과 비슷한 또래 아이들에게 관심 가지게 되는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이리라.
탈피 이후, 사람의 모습으로 긴 잠에서 깨어난 이후엔 제대로 된 성대도 생긴 데다가 종종 요정의 말도 따라하고 있으니 배울 의지도 충분히 있을 터. 같은 환수 중에서도 백록이라는 전례를 떠올려보면 한 번 가르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몰려있는 인파를 순식간에 쫓아낸 홍유리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목을 젖혀 올려다보는 맑은 눈동자를 잠깐 멍하니 쳐다보았다.
몇 번을 봐도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자신과는 정 반대되는 투명한 물빛 눈동자. 팔불출이 되는 부모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묻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홍유리는괜스레 헛기침을 뱉었다.
"뭔데. 왜 이러고 있어?"
피라미드처럼 쌓인 종이컵 타워. 쪼그려앉은 이은하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페리.
억울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알파가 들고 있는 종이컵을 가리키자 실소한 홍유리가 커피 한 잔을 뽑아 탑의 꼭대기에 올려주자 그제야 빵빵한 바람이 빠져나왔다.
"고맙다."
"그러게 그걸 왜 마셔?"
"……."
그것만큼은 할 말이 없는지 꾹 입을 다문 알파.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대신 뻣뻣한 검은 털을 쓰다듬었다.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도 시무룩해져 있는 감정이 느껴지는 듯하다.
고개를 꺾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갔다올 거지?"
"아마도."
홍유리는 고개를 주억였다. 이은하를 따라 바다로 간다… 다른 사람이라면 조심하라고 말이라도 건네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알파에겐 불필요한 말이리라.
"……금방 돌아오겠다."
"뭐?"
"그거 때문 아니었나?"
천장을 보고 있는 게 언짢아서 그랬다고 생각한 걸까? 알파의 갸웃거리는 고개가, 아까 페리를 떠올리게 해 실소가 흘러나왔다.
"아니거든."
"……."
"그래도 빨리는 와. 알아들어?"
알파는 천천히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
알파와 함께 해안선 인근에 도착했을 땐, 역시 인근 경비대 말고는 황량하게 비어있었다. 과거 서적이나 매체에서 표현된 해수욕같은 걸 즐기는 사람은 자살희망자가 아니고서야 이제 와선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다.
"오늘은 좀 다른 방식을 써보려한다."
"달리?"
"찾아가는 게 아니라 찾아오게 만드는 거다."
"……?"
낚시라도 하자는 걸까? 순간, 길게 뻗어나온 촉수에 그런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촉수가 향하는 방향은 물가가 아닌 알파 자신이었다.
"무슨!"
설마하는 순간, 어김없이 알파 자신을 찌른 촉수에 피가 튀어 흘렀다.
명백한 자해. 고작 그 정도로 죽을 리 없고 아무렇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다. 심지어 왜 그랬는지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피를 미끼로 몬스터를 부를 생각이었으리라.
"놀랐다."
그렇게 말하는 알파는 정말 놀랍다는 듯 말했다. 왜냐하면, 마력의 막이 막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막지 못하고 깨져나가긴 했지만 그 짧은 시간에 반응했단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더 놀랐어…"
진심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습에 늑대는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미리 말이라도 해주면 좋았을 텐데."
괜스레 투덜거리고 있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얼마나 놀랐는지를 알려주는 듯하다. 그 얼굴을 잠깐 바라보던 늑대는 자신에게서 흐른 피를 바다에 흩뿌렸다.
"……미안하다. 다음부턴 그렇게 하지. 준비하도록."
***
해안가로 몬스터가 몰려들기 시작하자 이은하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경비대를 물렸다.
비록 유명하진 않다지만 여명 소속의 A급 헌터. 다소 과정이 억지스럽긴 했지만 내륙 깊은 곳까지 경비대를 물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몬스터가 몰려오고 있으니 대피하라.' 정도만 말해도 괜찮았으니까.
"그래서 얼마나 오는 거야?"
이은하의 물음에 늑대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글쎄… 냄새를 맡으면 대부분 몰려들 테지."
바다의 재앙과 싸웠을 때도 그랬으니까. 용혈. 마력의 향이 진득한 피냄새를 맡고도 무시할 몬스터는 거의 없다시피 할 테니까.그 말을 듣자마자 이은하의 눈가가 경련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인근 해역의 몬스터가 다 몰려온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백에서 수천은 될 터. 아무리 육지라지만 그만한 무리와 싸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니까.
"걱정 마라."
"절대 죽게 내버려두진 않을 테니까."
확신이 담긴 말과 흔들림없는 붉은 눈동자에 가슴이 뛰었다. 아니, 뛰었을지도 모른다.해안가로 물밀듯이 밀려오는 기척들만 아니었더라면.
"죽기 전에는 구해주겠다."
쓸데없이 야속하게 들리는 말에 이은하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
책상 머리에 앉아 미뤄뒀던 서류를 처리해가던 홍유리는 그 중 어떤 보고서 하나를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 씹새들이."
아니, 차라리 몬스터가 있을 땐 이러지 않았다. 평화가 찾아오려하니 이제 좀 살만해지니 괜스레 사이비들이 날뛰기 시작하는 거였다.
당연 지금은 소탕한 이단의 탕아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잔챙이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목적이 자꾸만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이 새끼들은 족치고 퇴직하든가 해야지."
어차피 인수인계를 비롯 한 달 남짓은 걸릴 터. 바득바득 이를 갈던 홍유리는 멍하니 넋 놓고 있는 클랜원들에게 한 소리 쏘아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좌견천리. 앉아서 천 리를 본다는 말이 있다.
본래 먼 앞일을 예견하는 걸 뜻하는 말이었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말의 의미도 달라진다.원한다면 고작 천 리가 아니라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시대. 그리고 마침 TV로 송출되고 있는 화면 또한 그 일환이었다.
"……."
어디부터 딴지를 걸어야할까.
사실 이미 보고는 받았다. 여명의 클랜원임과 소속 팀을 밝힌 이상 확인차 팀장인 자신에게 연락이 오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직접 보는 것과 전해 듣는 것엔 큰 차이가 있다.
"……시발. 미쳤나 진짜."
그도 그럴 것이 뉴스 속보로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바다를 까맣게 물들이는 검은 그림자들과 해안가에 넘쳐흐르는 시체. 그리고 거기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이은하의 모습까지.
바다로 나가 몬스터를 쓰러뜨리는 건 자유다. 그렇게 해봤자 몬스터의 개체 수에는 티도 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누가 피해 보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해안가로 몬스터를 불러들였단 건 다른 이야기. 물론 알파가 함께 있으니만큼 만에 하나라도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뒷처리도 나름대로의 문제겠지만 더 신경쓰이는 건…
"하필이면…"
아득바득 이를 갈며 홍유리는 아직 남아있는 클랜원을 불러모았다.곧 사람이 없어진 3팀, 홍유리의 책상 위엔 한 장의 서류가 놓여있었다.
[구세마랑회(?世??會) 습격 보고서]
[사망자 14. 부상자…]
***
좌우로 흔들리는 꼬리. 바다 위인데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바로 옆에서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다.
그저 태평하게 엎드린 채 구경하고 있을 뿐.
"……!"
어디까지나 죽게 내버려두진 않겠다고 한 거다. 그말인즉, 정말 위험할 때까지 아슬아슬할 때까진 기다리겠다는 뜻이기도 하다.그 때가 되기 전까진 분명 구해주지 않으리라.
'아니.'
처음부터 구해질 생각부터 하면 안 된다. 왜 그렇게 나약한 생각부터 하는 걸까. 해안가로 몰려든 새까만 그림자에 이은하는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던 주문을 내뱉었다.
"βSheet!"
베타 시트. 제법 오랜만에 사용하는 거미줄의 구현. 이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단단한 그물이 바다 한가운데 넓게 펼쳐진다.
질긴 어망으로 몬스터 무리를 뒤덮은 이은하는 강한 저항을 느꼈다.당연 가만 붙잡혀줄 리 없으니 당연한 일.
"Distort."
왜곡을 사용해 확실하게 붙잡는다 그러나 모든 그림자가 그물망 속에 붙잡힌 건 아니었다.
'3할.'
냉정하게 그 수를 파악한 늑대는 이은하가 붙잡은 몬스터는 고작 전체의 3할에 불과하단 걸 알 수 있었다.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숫자. 심지어는 더 몰려들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해안가에 가장 가까이 도달한 놈들이었기에 그 뒤의 몬스터가 밀고 올라오기엔 무리가 있단 점일까.
인파가 몰린 곳을 쉽사리 지나갈 수 없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막고 있다.여기까지 생각해둔 것이리라. 그리고 미리 만들어둔 거대화한 말뚝이 이미 상공에 몇 개나 떠다니고 있었다.
'결국 원 패턴이지만.'
왜곡 그리고 사슬과 말뚝, 가시를 구현해 싸우는 단순한 방식. 그러나 늑대는 알고 있었다. 저 원패턴의 방식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뭐니뭐니해도 몇 번이나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고 여왕마저 쓰러뜨렸던 만상의 주인. 그녀의 방식이었으니까.
적어도 저깟 몬스터들을 상대하기에는 차고 남을 정도로 과분한 힘이다.
말뚝과 가시는 이은하의 손짓에 따라 확실하게 몬스터의 숫자를 줄여나갔다. 죽은 이후에도 여전한 시체는 해안가 근처의 얕은 파도로는 도무지 밀리지 않고 천연의 바리케이드가 되어주었다.
지상이라는 유리한 장소에 몬스터를 불러온 셈. 전투의 향방은 모두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
다만, 마력이 바닥을 드러내는 건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애초에 저 단순한 구현이 황금의 원패턴일 수 있었던 건 그녀의 방식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순히 초월자로서 범접할 수 없었기에.무진장한 마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만상의 주인이 아닌 어제 보았던 이은하라면 머잖아 한계가 찾아오리라.
하지만 그걸로 됐다.
본신도 아닌 이 몸으로 바닷속의 몬스터를 전부 쓸어버리는 건 시간이 걸릴 테니까. 따라서,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바닷속에 있는 몬스터들도 남겨둬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그리하여, 인류의 손으로 몬스터를 쫓아내고 환수만이 남은 세계에서 인류와 환수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세계를 만들어 놓으리라.
여왕을 되살리기 전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