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9화 〉 #153 구세마랑회
* * *
아침의 소동을 뒤로하고 늑대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훤히 보이는 아래층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이은하와 박박 이를 가는 홍유리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 그리고붉은 마력이 넘실거리며 이곳에 닿았다 싶은 순간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휴. 벌써 이런 시간이……"
시계를 확인한 백소율은 오늘따라 빠르게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그동안얼어붙은 줄 알았던 시간이, 비행기에선 도저히 흐르지 않던 시간이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흐르는 듯 느껴진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독점했는데도 오히려 애타게만 느껴질 뿐. 더더욱 욕심이 났다.
"이대로 어딘가 가 버리지 않을래요?"
숨기지 않고 속마음을 담은 말에 곤란해하는 모습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졌기에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아예 사라지는 건 어렵겠지만 그래도 며칠 동안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그러기 전에 옥상 문이 열리고 말았다.
"너, 너 이상한 짓 한 거 아니지?"
얼마나 급하게 올라왔는지 고작 옥상까지 거리에 숨을 헐떡이는 홍유리가 눈을 부라리자 백소율은 알듯 말듯한 웃음을 띠었다.
되려 아무 말도 없는 게 불안했는지 떨리는 눈동자에 늑대는 고개를 흔들었다.입장의 차이가 있다지만 아예 머리꼭대기 위에 앉은 백소율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고 있었으니까.
"아, 며칠만 양보하시는 게 어때요?"
"……."
"돌아갈 때까지만… 어차피 오래는 못 있는걸요."
홍유리는 말하는 대신 중지를 들어 올렸다.
"욕심쟁이."
"돌아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거든?"
"그럼 만족할 때까지 기다려드릴까요?"
"꿈도 꾸지 마! 나 죽고 나서도 안 되니까."
"어린애같이."
"아침부터 같이 있었던 건 누군데?"
홍유리가 이죽거리자 백소율은 무시한 채 홍유리의 뒤편을 보곤 손짓했다.
"같이 어때요?"
벽에 반쯤 숨어 있던 이은하를 향해 붉은 눈이 홱 돌아보자 깜짝 놀란 것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휴. 그렇게 눈치줄 건 없지 않나요."
"말싸움하기 싫으니까 그냥 내놓지?"
"꼭 물건처럼 말하시네요?"
"내 거니까."
당당하게 선언한 홍유리는 그 기다란 꼬리로 바닥을 내리쳤다. 마치 굵은 채찍을 휘두른 것 같은 위협적인 소리였지만 백소율은 눈 사이를 좁혔다.
"……그래요. 어차피 오후도, 내일도 있으니까."
아침부터 독점할 수 있었던 이유. 스퀘어의 후계자로서 손님 신분으로 방문한 그녀에게는 이은하나 홍유리와는 달리 할 일이 없어서였다.
입장 차이에서 오는 강점을 당당하게 들이밀자 홍유리는 눈가를 경련했지만,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언짢은 기분을 숨기지 않고 자신을 안은 채 내려가는 홍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려하자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쳐내버린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은 늑대는 다시금 촉수를 뻗었다.
"아,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했다?"
"……이 씨."
몇 번인가의 거절 끝에 기어이 쓰다듬자 투덜거림이 돌아왔다.
"아 씨. 머리 망가지잖아."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손길에 따라 고개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손길에 길들여진 고양이를 보는 듯했다. 빳빳하던 꼬리는 어느샌가 풀려 강아지풀처럼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한 번쯤 잡아보고 싶단 생각이 들지만 그랬다간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으니 적어도 밖에선 그럴 수 없으리라.
짜증이 가시고 토라진 모습을 가장하곤 있지만 이미 풀려 있단 걸 알 수 있었다.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다.
그랬다가는 말짱 도로묵일 테니까.
"화났나?"
"뭐가."
"거부하지 않았으니까."
"……."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말하지 말라는 듯 끌어안자 늑대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간 쓰다듬고 있자니 홍유리의 입술이 열렸다.
"알고는 있는데…"
다시 숨을 들이킨 홍유리는 잠깐 회상하듯 눈을 감았다. 기껏 삭힌 속이 들끓는 걸 참는 것이리라. 그 화가 가라앉을 즈음에 말을 걸었다.
"좋은 방법이 있다."
"……뭔데?"
"하나 더 만드는 거다. 어차피 지금 이 몸도 본신이 아니니까."
언제까지 백소율만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
이미 그녀에겐 답을 주었으니까. 분명이 방법이라면 누구와도 함께 있을 수 있으리라.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리라. 하지만도리도리 젓는 고개와 끌어안는 손에 말을 멈춰야만 했다.
"그건 싫어."
"……."
"네가 둘인 건… 더 싫어. 절대로."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듯한 단호한 말.
유일한 해결법이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렇게 되리라고 느끼곤 있었다. 반대로 생각해서 홍유리가 둘이고 그중 한 명이… 머리를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버렸다.
그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같이……아니, 아니다. 오늘은 먼저 돌아가. 할 일 있으니까."
긴 한숨과 함께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말. 천천히 늑대가 멀어져가자 홍유리는 내려왔던 계단을 올려다보다,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먼저 돌아가라는 말마따나 오후에 혼자 집으로 돌아와 기다렸다는 듯 뾰로퉁해있던 페리와 놀아주어야만 했다.비록 집에는 깨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페리를 위해 요정들이 더부살이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론 만족하지 못하는 듯하다.
페리뿐만 아니라 요정들까지 지칠 때까지 놀아주고 나서야 꺄르르 바닥을 뒹굴 땐 제법 깊은 밤이 돼 있었다.
그 동안에도 머리 한 구석에서 생각을 계속해야만 했다.
홍유리나 백소율에 대해서가 아니다.구세마랑회 그딴 잡스러운 조직에 대해서도 아니다. 단지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를.
크라켄의 출몰으로 해안가의 경비는 더 삼엄해진 모양이고 이은하도 이전처럼 바닷가로 갈 수 없게 돼버렸다.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뜻.
'잘된 일이야.'
틀린 방식이 아니다. 아직은 경계를 더하는 정도였지만 그걸로 부족하다고 생각된다면 결국 토벌에 나서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해안가의 몬스터를 용혈을 미끼로 끌어올리면 결국 인류는 그것들을 쓸어 버리는 수밖에 없을 터. 직접적인 토벌에 나서게 만들어야만 한다.
인류 스스로의 자립심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원래라면 쉬는 일 없이 용혈을 뿌리러 다녔겠지만 아침에는 백소율. 오후에는 페리 때문에 오늘은 그럴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 때문에 선수를 쳐지고 말았다.
***
조용한 이자카야.
전세로 모든 방을 빌렸기 때문에 종업원을 제외하고는 어떤 손님도 없다. 말소리가 새어 나갈 리 없는오직 둘밖에 없는 자리. 술잔에 맑은 액체가 가장자리로부터 따라졌다.
그렇게맑은 술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띠어지는 걸 보고서야 맞은 편의 사람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작은 몸집. 붉은 머리카락. 소녀를 연상케 하는 외모였지만 이런 분위기에 오히려 어울리는 듯하다.그도 그럴 것이 술꾼이었으니까. 아마 자신이 아는 한 가장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리라.
"선생님이랑 마시는 건 처음인 것 같네요."
"마셔본 적이 있기는 해?"
"글쎄요?"
백소율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홍유리는 혀를 찼다. 못 본지 얼마나 됐다고 속에 구렁이 여러 마리를 채워 넣은 것 같아서. 이젠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도 그랬다.
답답한 마음에 잔을 기울였지만 아직 속이 타는 듯하다.
"왜 불렀을 것 같아?"
"……."
"까놓고 말해 보자는 거야. 어차피 이대로면 너도 답답하잖아."
무척 의외라는 듯한 눈빛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
"의외라서요. 선생님이 먼저 그렇게 말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
"갑자기 생각이 바뀌신 것 같네요. 그럼 그 제안은 받아들였다고 봐도 될까요?"
차마 소리로 내진 않았지만 조그맣게 입술이 달싹이자 눈을 부라린 홍유리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
긍정은 아니지만 고민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정말 놀랐다는 듯 백소율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아침까지는. 그리고 오후가 됐을 때 알파를 돌려보낸 걸 보곤 역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모양. 아니면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역시 본의는 아니었는지 고민하는 듯하다. 두 잔이었나 세 잔이었나. 그렇게 안주 없이 술을 들이키는 걸 가만히 보고 있다가 마침내 그녀의 입술이 떼어지려는 순간,
RRRRR.RRRRR.
그보다 빠르게 핸드폰의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잠깐 화면을 흘긴 홍유리는 받지도 않고 꺼버렸지만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이어서 통화가 걸려오자 결국 눈을 부라리고야 말았다.
"아, 씨발 진짜."
슬쩍 본 핸드폰 화면에 출력되는 이름은 근육뇌. 누군지 알 것 같았기에 백소율은 잠자코 기다렸다.
"아 뭔데. 왜? 왜?"
후계자씩이나 된 그녀에게 핸드폰 너머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 없으니까. 동시에 이 자리는 여기서 끝이라고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건 해안가에 몬스터가 출몰했다는 말이었으니까. 그것도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에서.
"뭐? 씨발. 진짜 이…!"
무언가를 참는 듯 속을 억누른 그녀는 아득바득 이를 갈며 한숨을 쉬더니, 화를 억누르곤 의자에 걸터놓았던 외투를 둘렀다.
"기껏 불러서 미안한데… 먼저 가 봐야겠다. 나머지는…… 다음에. 다음에 하자."
백소율은 아무 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급한 걸음으로 홍유리가 멀어지고 그렇게 사라진 뒤에야 처음으로 잔을 기울였다.
"가 봤자 소용 없으실 텐데…"
다시 내려놓은 잔. 반쯤 남은 술에 비친 그 표정은 너무나도 흐려서 스스로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