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7화 〉 #157 너희 눈 앞에
* * *
[홍유리]
핸드폰에 출력된 이름에 실소했던 건 잠시. 왜, 지금 전화할 일이 있나? 방금 클랜에 알렸을 뿐이니 아직 입원중이라고 알고 있을 텐데…
"언니? 안 받아?"
"어? 응. 괜찮아.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먹고 싶은…"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져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지금 받았다간 절대 좋은 꼴은 못 보리란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일단, 바빠서 못 받았다고 나중에 전화하면 되리라.
못 본 체하고 지나가려 했지만,
"급한 일이면? 진짜 안 받아도 돼?"
"괜찮."
괜찮다고 하려 했지만 아까 그 말에, 쉴 새 없이 울리는 통화음에 불길함이 엄습했다.
스스로도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잘못돼서 급하게 도움을 바란 게 아닐까. 사실은 자신에게 전화를 건 게 아니라 아무나 받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구세마랑회가 득세하고 있지 않던가. 요 근래 이상 상황을 보면 위험에 쳐하더라도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어쩐지 통화음이 조급하게 받아달라는 신호처럼 느껴져서……
'아 진짜.'
결국 멈춰 서 스스로 지옥문을 열고야 말았다.
"…여보세요?"
[왜 늦게받아]
짜증 섞인 목소리. 그리고 감기라도 걸린 걸까? 어쩐지 기침을 콜록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것뿐. 역시, 역시 아무렇지도 않았던 거다…! 하기야 알파가 붙어있을 텐데 무슨 위협이 있으랴.
부러움과 함께 한탄스러움이 밀려왔다.
"그, 잠깐 뭣좀 하느라고…"
[뭘 해? 병원 아냐? 퇴원했어?]
그 말에 생사의 기로가 갈렸음을 알았다. 하지만 결국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여기서 모른 채 하면 당장은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걸리게 되면…… 상상만 해도 눈 앞이 핑핑 도는 듯하다.
"…넵. 아까."
결국, 처음부터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한 이은하는 이어진 말에 질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잠깐 와 봐. 위치 찍어 줄 테니까]
[아니다. 그냥 와]
[빨리]
***
홍유리가 부른 곳으로 돌아온 이은하가 본 건 두 사람의 괴인. 하얀색 천 옷으로 몸을 감싼 두 사람. 이른바 방호복이었다.
"……."
마스크까지 철저하게 착용하고서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반쯤 열린 맨홀 뚜껑을 보았을 때, 이은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환자라고 배려해 줄 사람이 아니다. 되려 퇴원했건 아니건 "근데 뭐 어쩌라고?" 하면서 뚱하게 대답하겠지.
"입어."
불합리는 이미 한참이나 겪어봤기에 주섬주섬 방호복을 따라입은 이은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같이 있으신 분은."
"얘? 무시해도 돼."
"너 진짜!"
"내려간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듯 맨홀 뚜껑을 발로 차 열어버린 홍유리는 잠깐 망설이다 안으로 몸을 던졌다. 사다리가 있음에도 사용하지 않고서.
"……윽."
보기만 해도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한 하수도 아래. 잠깐 눈치를 봤지만 팔짱 끼고서 움직이지 않는 또 한 사람이 턱을 까닥이며,
"먼저 가세요."
그렇게 말하자 따라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사다리를 잡고 발을 딛던 이은하는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언제였던가.
'팀장님이랑 말을 놓을 사이라면…'
어찌 됐건 자신이 왈가왈부하거나 할 사람은 아니라는 뜻. 애초에 느껴지는 마력이 자신보다 윗줄인 걸 보면 평범한 사람은 아니리라.
바닥에 발을 디딘 이은하는 홍유리에게 물었다.
"오긴 왔는데 뭘 하시려고요?"
"몰라. 저 년한테 물어."
"……누구신데요?"
"전에 봤잖아. 후계자 자리 거저먹은 년."
갸웃거린 이은하는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바다의 재앙 때에 먼 발치에서나마 잠깐 보았던 소녀의 모습을.
'도로… 도라… 도라시?'
그런 이름이었으리라. 곧 마지막으로 내려온 그녀가 맨홀 뚜껑을 닫았을 때 홍유리가 말했다.
"어딘데?"
"몰라. 네가 찾아야지. 그러려고 데려왔는데."
물론 그녀 자신의 눈이 아니라 CCTV같은 것에 찍힌 것이리라.
"여기 어디 있으니까 알아서 찾아."
"……이 쓸모없는 년."
혀를 찬 홍유리는 마안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기시감이 들었다.
예전에도 이렇게 쫓은 적이 있다. 그건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다가 놓쳤던 이상한, 물고기도 아니고 뭣도 아닌 괴상하게 생긴 몬스터가 있었는데……
'…주의해야지.'
바다로 도망쳤지만 어쩌면 변종같은 거였을지도 모른다. 알파의 말마따나 몬스터를 잡아가다보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 때는 아쉽게 놓쳤지만 이번엔 놓치지 않으리라. 자연스레 따라오려는 이은하를 제지하고,
"넌 여기서 기다려. 혹시 튀는 새끼 있으면 잡고. 알아들어?"
"……설마 그거 때문에 부르셨어요?"
"말고는 없잖아."
마안에 비치는 발자국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
일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의 공원. 백소율은 그 중앙을 당당히 걸었다.
거리낄 것 없다는 듯한 움직임. 당당하게 지정된 장소에 도착한 순간, 자신을 맞이하는 이의 모습이 보였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검은 로브로 몸을 감싸고 위장한 마법사. 마치 주변의 빛이 그에게서 튕겨나가는 듯, 검은 색이 퍼지는 것처럼 보인다.
"오, 선구자여. 정말로 왔군요."
비록 영어였지만 거리낄 것 없다. 고개만 끄덕여 답하자 그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 경계심. 적의. 의문… 하나같이 좋게 느껴지진 않는 눈빛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리라.
"설명해 주셔야겠습니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된 건지."
"……."
"그게 아니라면… 스스로도 잘 알고 계실겁니다. 저희가 당신을 좋은 눈으로 보고 있진 않다는 걸."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은 얘기대로라면 분명 그러할 테니까.
"그나저나, 다리를 절더군요. 다치셨습니까?"
"…별 거 아니에요."
"그렇습니까."
턱짓하며 말해보라는 제스쳐에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당연히 진실은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미리 준비한 변명. 여명에 의해 꼬리가 잡힌 것 같다고. 다른 이들이 잡힌 건 그 때문이며 자신이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아마 자신을 미끼로 다른 이들까지 잡을 생각인 것 같다고.
"…설마 미행이."
그 말엔 고개를 흔들어 부정했다. 잠깐 고개돌린 그는 누군가에게 미행의 유무를 확인하고서야 안심한 듯 보였다.
미행은 없다.
정말로 여긴 혼자 왔으니까.
"정보가 있어요. 여기선 말하기 어렵지만… 필요할 거예요."
"정보?"
확인하는 되물음에 끄덕이며 마력을 일으켰다.
자색 마력이 휘날리며 늑대의 모습을 이뤄간다. 오로지 자색으로만 이뤄졌을 뿐인데 검은 터럭과 붉은 눈동자가 똑똑히 보이는 듯했다.
그것이 그녀의 실력. 실로 환영의 계파의 후계자다운 실력이었다.
"마랑. 그가 돌아왔어요."
"……!"
그 순간만큼은 좌중의 눈빛이 믿을 수 없단 것처럼 크게 떨렸다. 경악이란 감정은 곧 의문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변해간다.
"진심, 입니까?"
"거짓을 말할 이유가 있을까요."
어차피 곧 밝혀질 텐데 그러자 로브의 사내는 확실히 그렇다는 듯 끄덕였다.
애초에, 정말 배신했다면 혼자 오진 않았으리라. 아니, 혼자 왔더라도 이미 싸움이 벌어졌겠지. 그리고 자신들의 태반은 환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테고.
"좋습니다. 여기에 오신 건 당신이 적어도 배신하진 않았단 뜻일 테니까요. 조금이라도 생각을 고쳐먹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
"자, 동지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죠."
끄덕이며 기꺼이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
흔드는 손길에 잠에서 깬 백소율은 목 주변을 더듬었지만 이미 늑대는 호텔방 어디에도 없었다. 잠들기 전까지 만끽했기에 아직 손 끝에 감촉이 남아있는 듯한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방긋방긋 웃는 페리가 자신을 깨운 걸 보면 그리 멀리있진 않으리라. 베타의 날갯짓과 페리의 칭얼거림에 몸을 일으킨 백소율은 눈을 끔뻑였다.
자신의 몸이 아닌 것만 같았다. 너무 가벼워 날아갈 것만 같다. 정성들인 마사지를 받기라도 했단 것처럼. 요 근래 이렇게 편했던 적이 있었나? 꿈도 꾸지 않고 이렇게 오랫동안 잠든 적은?
뭐가 달라졌는지는 명백하다. 조용히 두근거리는 심장이 기분좋게 뛰고 있었다.
페리의 손에 이끌리자 호텔 방의 테이블에 음식이, 볶음밥이 있었으니까. 그것도 비닐로 덮어져 마치 먹어보라는 듯이.
설마하니 베타와 페리가 만들었을 린 없다. 눈을 끔뻑인 백소율은 저도 모르게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주방도 없는데 대체…'
한 가지 의문을 채 떨치지 못한 채로.
***
로브의 사내를 뒤따라 도착한 곳은 인근의 섬. 그리고 그 구석의 정말이지 칙칙한 장소. 주변을 둘러보니 공원에 있었던 이들의 몇 배나 되는 이들이 집결해있었다.
만약을 대비한 것이리라. 만약 일이 잘못됐을 경우, 스퀘어의 후계자와 싸우기 위해선 최소한 이 정도는 돼야 할 테니까.
그나저나, 용케도 이렇게 모였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더 규모가 컸던 모양인데…'
고작 며칠 사이에 이렇게까지 모였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신앙 그리고 광신. 확실히 때때로 믿음이란 건 놀라운 힘을 보이기 마련. 이번에도 그 일환이리라.
"말씀해주시죠. 그분은! 그분은 도대체 어디 계시는 겁니까?"
열기를 띠고 물어오는 로브의 사내. 그뿐만 아니라 장내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이들마저 있었다.
……건물 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없다. 더 숨어있는 이는 없다.
그렇다면 이걸로 됐으리라.
더는 연기할 필요가 없다.
"선구자여! 그분은! 그분은 어디에!"
"여기 있지 않나."
자신의 어깨를 짚고 선구자라 부르던 로브 사내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눈동자에 비치는, 선구라자 부르는 소녀의 모습이 점차 변해가고 있었으니까.
검고, 난폭하고, 폭력적이고, 원초적인 짐승의 모습으로.
"너희 눈 앞에."
검은 마랑의 모습으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