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2화 〉 #160 맡기는 일
* * *
거의 반나절동안 페리와 베타가 놀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어차피 홍유리는 아직 깨지 않았을 테니까.너무 해버렸다고 자책하고 있을 정도였다.
벌써 깨어날 리 없으리라.
"부럽네요."
눈 사이를 좁힌 백소율이 그렇게 말하자 늑대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돌렸다. 등줄기가 싸하게 느껴지는 것이 어쩐지 사냥꾼 앞의 사냥감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저도 오랜만인데…"
애초에 장소 또한 호텔방. 정 하자고 하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늑대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어젯밤이 불완전연소였다고 한들 여기서는 무리였으니까.
길게 뻗은 촉수가 옆을 가리킨다. 거기에정답게 놀고 있는 페리와 베타를 보고서야 백소율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몸을 당겼다.
"슬슬 돌아가겠다."
"네, 아쉽지만요."
늑대는 자신을 반기는 페리를 안아들었다. 곧바로 안기는 모습이 떨어져있었던 건 고작 하루에 불과하지만 그 하루가 나름대로 길게 느껴졌던 걸지도 몰랐다.
"놀기는 잘 놀았어요.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쓴웃음을 지은 백소율은 페리의 어깨 위에 있는 베타를 들어올려 자신의 어깨에 올렸다. 그 행동 자체가 이젠 헤어질 시간이라 말하는 것과 다름 없었기에 퍽 아쉬워하기는 했지만.
"맡아줘서 고맙다. 그리고 마랑회는…"
"알고 있어요.……물론 감사해요. 하지만…"
백소율은 천천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건 제가 할 일이니까요."
부드러운 움직임과는 달리 말에는 강한 의지가 깃들어있다. 어쩌면 어제의 일에 선수를 쳐 졌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남은 매듭은 제가 지을게요."
"……."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결연함을 담은 눈동자. 한참동안 쳐다보던 늑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은하 언니가 재밌는 말도 하던걸요."
귓가에 속삭인 말은 아마 걱정을 덜어주기 위한 농담이었으리라. 키득 웃은 백소율은 페리에겐 보이지 않게끔,
"어때요? 제 냄새는?"
상의의 목 주변을 당기며 묻는 말에 늑대는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했다.
***
홍유리가 잠에서 깬 건 노을이 지고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눈을 비비며 이불을 걷었지만, 어쩐지 전신이 뻐근했다.
드물게 느껴지는 피로감. 새벽에 뭘 했는지 떠올린 홍유리는 조용히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눈두덩이를 돌리듯 비비면서 피로를 쫓아보려 했지만 뼛속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듯한 감각은 쉽게 쫓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일어나려면 허리가 쑤시고 삭신이 쑤신다. 마치 노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홍유리는 헛웃음을 뱉었다.
'대체 뭐 얼마나……'
중간에 잠들었지만 그 이후로도 해버린 모양. 기억 속에 엉망이 됐던 주변은 이미 정리가 끝난 뒤였다. 그뿐만 아니라 옷도 입혀진 데다가… 수치심보다 먼저 한심하단 생각부터 들었다.
먼저 도발한 주제에 제멋대로 쓰러진 거니까.
'그래도 이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한 건 자신이 아니라 알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게 비정상인거다.
'하기야…'
사람도 아닌데 사람 기준으로 생각하는 게 이상하리라. 이젠 새삼스러운 이야기. 한 가지 확실한 건 앞으론 분명 각오를 다지고 덤벼야할 거란 점이다.
멍하니 새벽의 일을 떠올린 홍유리는 아무도 보지 않고 있음에도 머리 끝까지 이불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이래저래 깊은 생각이 들었다.
……좋았던 건 사실이지만 무서운 것도 사실이었다.
중간부터는 마치 짐승 앞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것 같았으니까.어지간하면 실신까지 했으랴. 답답함에 한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목이 타고 있어 그러지 못했다.
'다음에는 물부터 준비해야겠네.'
억지로라도 일어나야지. 쑤시는 기분을 억지로 누르고 이불을 치운 홍유리는 두 눈을 끔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마술같아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자신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바로 옆에 가득 찬 물컵과 비스듬히 세워진 작은 메모가 있었으니까.
[미안하다. 쉬어라. 연락해뒀다]
고작 세 문장. 그럼에도 저도 모르게 한껏 치솟아올라간 입꼬리는 도무지 내려올 생각을 하질 않는다.
"진짜 내가 이래서……!"
물 맛은 여태 마셔본 무엇보다 달달해 마치 목넘김이 좋은 꿀을 들이킨 것 같았다. 술도 아닌 물 한잔일 뿐인데 입가를 닦은 홍유리는 이제 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손바닥 안이라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그게 기분나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런 배려 때문에 그를 좋아할 수 있게 된 거였으니까…….
휘휘 고개를 저은 홍유리는 다시 머리 끝까지 이불을 덮었다. 아직 내일까지는 더 시간이 걸릴 테니까.그 후로 한참이나 이불 바깥으론 실실거리는 웃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
"또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
"이미 드러난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슬슬 인정해야 할 때입니다!"
동상 앞에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으던, 기도하던 이는 무릎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알고 있다."
자신들을 적대하는 이들이 있다 그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당연한 사실이다. 아직까지 진실을 외면한 채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매한 이들이 있었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하리라 여겼다.머잖아 태양마저 가릴 위대한 늑대가 돌아오는 순간, 싫어도 깨닫게 되리라 믿었다.
세상이, 시대가 변했음을.
하지만 그 전제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선구자는 진작부터 그랬다지만, 그녀 혼자서 대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겁니다. 우린 알고 있었지 않습니까!"
선구자, 백소율은 마랑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기에 굳이 몬스터를 해안가로 불러들였다.
정말로 그가 구원자라 불러 마땅한 존재일지 마랑의 성품을 알고 싶었기에.
하지만 실제론 어떠했나.
해안가에 모습을 드러낸 건 마랑이 아니다. 그 유명한 여명이 손수 나서 몬스터를 쓸어버렸단 거다.반대로, 쓸려버린 건 한국에 있었던 같은 동료. 마랑회의 사람들이었다.
"그래. 고민했지만 이렇게 됐다면 확실하지."
계속 반기를 들었던 선구자였기에 그녀가 직접 나선 게 아니었을까 생각했지만, 이번 사건으로 확실해졌다.고작 선구자가 나서서 될 일이 아니라고. 연락조차 없이 사라졌다는 건 이미 상식의 영역을 벗어나있다.
상식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 일어났다면, 당연 그 주체는 상식 바깥의 존재이리라.
사내는 가만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마랑께서는 우릴 원치 않으시는 것 같군."
선고처럼 내려진 말에 말을 전했던 이는 망연자실해하고 말았다. 이미 머릿속으론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심장이 짓뭉개지는 듯한 기분이었다.괴롭게 가슴께를 움켜쥐며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내야만 했다.
"우린 그분의 적입니까?"
"그런 셈이 되겠지."
"그럼 우린… 도대체 우린 여태껏 뭘……!"
믿음이 무너지자 지면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발 아래가 천길 낭떠러지로 보여 힘이 빠져 주저앉아버렸다.
"결국 선구자가 옳았군요."
이런 방식은 바라지 않을 거라던 그녀의 말이 정답이었다. 하지만, 정말 누가 상상할 수 있으랴. 원한다면 세상마저 무릎 꿇릴 수 있을 위대한 존재가 바라는 게 고작 조그마한 평화라는 것을.
"하, 하하하. 어쩌면 그녀는 처음부터 이걸 바랐을지도 모르겠군요."
숭배하는 대상, 신에게 거절당한 셈. 이미 그 자체로 마랑회는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순순히 마랑의 소재를 알린 건 바로 그래서였으리라.
명백히 갈 곳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갈 곳을 잃은 신앙은 안쪽에서 불쾌하게 소용돌이치다가 이내 분노로 바뀌고 말았다.
하지만 그 감정을 어디로 향해야 한단 말인가?
선구자? 아니면 숭배의 대상이었던 마랑? 그랬다가는 분명 잠깐도 견디지 못하고 먹히고 말리라. 애초에 맞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입 안에 쓴맛이 감돈다. 분명 이런 걸 좌절이라 부르는 것이겠지.
"그래…포기합시다."
바닥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속내를 내뱉었다.
"승산이 없지 않습니까. 어리석은 짓입니다. 지금이라도 마랑회를 해……?"
해산해야 한다. 그 말은 드리워진 그림자에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더 이상, 말할 사람은 남아있지 않다. 철권과도 같은 커다란 주먹이 머리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렸으니까.
뇌수와 핏물이 흐르는 주먹을 담담히 닦아내며 사내는 홀로 중얼거렸다.
"알고 있다."
***
홍유리가 해야할 일은 거의 다 처리해두었다.
클랜에는 강태준에게 대신 연락해두었고 뒷정리도 끝마쳐두었으니 걱정할 건 없으리라.오히려, 신경쓰이는 건 홍유리가 아니라 백소율이었다.
정말로 남은 일을 그녀가 처리하게 두어도 괜찮을까.
자신의 생각이 어디까지나 위에서 내려다보는 오만한 시선이란 건 알고 있다.그럼에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알빠…… 알빠~?"
눈 앞에서 이리저리 흔드는 손.페리가 말을 걸어오자 늑대는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지웠다.
"그래. 돌아가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