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8화 〉 #163 마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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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데구르르……
붉은 결정체가 바닥 위를 구른다. 남자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워들고는 조심스레 먼지를 털어냈다. 혹시라도 깨지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그렇진 않은 듯하다.
"마녀가 되진 않을 거예요."
좋지 못한 표정과는 달리 단호하게 끊는 말. 이미 그 손에는 심상치 않은 자색 마력이 일렁이고 있다.
남자는 가만 끄덕거렸다. 후계자로서 착실히 수행을 쌓은 그녀와 십수년 이상 전선에서 은퇴해 물러나 있던 자신. 상식적으로 생각해 어느쪽이 유리할지는 불보듯 뻔하다.
주문을 엮는 말을 들으며 남자는 품 속에 결정체를 넣고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최초의 일격을 피하고 섬전처럼 다가가 복부를 가격해 기절시킨다.
이미 일련의 과정이 머릿속에 그려져있었다.
도움은 필요치 않다. 이곳은 분명 아지트 안 자신의 구역이었지만, 다른 이들을 불러봤자 좋은 결과는 기대하기 힘들 터.뭐니뭐니해도 선구자는 환영의 계파. 그 환영의 나비의 제자였으니까.
도움은커녕 발목이나 잡게 될 터. 따라서 승부는 1:1.
그래도 걱정하진 않았다.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봤자 결국엔 마법사. 일대일의 싸움에선 그 한계가 명확하니까. 또한, 그만한 준비도 되어 있다.
"închisoare fantezie."
최초의 주문과 함께 자색 마력이 뻗어온다. 석상이 놓일 만큼 결코 좁지 않은 방인데도 단번에 가득 채우는 마력량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그릇이다.'
피하겠다 생각했지만 그럴 틈이 없다. 그리하여, 남자는 단단히 쥔 주먹을 뻗었다. 마치 교본으로 나올 법한 깔끔한 정권지르기는 감옥처럼 죄어오는 자색 마력을 날려버렸다.
권풍이 훑고 지나감과 동시에 일순간이나마 열린 길을 그대로 따라 달린 남자는 질끈 눈을 감았다.어느샌가 자색 마력이 마법으로서 위용을 발휘해 환각을 보여주고 있었으므로.
'이런 느낌이었군.'
감각을 교란하는 환영이 온갖 함정과 괴이를 보여준다.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말과 육감마저 속이는 듯한 지독함. 제대로 된 환영술사는 바로 이런 거구나 알 수 있었다.전에는 마력으로 짓눌렀지만, 적어도 지금은 불가능하다.
발을 멈추고 싶은 충동이 있었지만, 그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여태까지 쌓아온 경험 덕이었다.칠영웅이라고 불리울 동안의 시간. 그것이 육감마저 속이는 환영을 헤치고 나아가게끔 만들었다.
아무리 지독해봤자 환영은 결국 환영. 결국 다시 내지른 정권에 벽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무리 감각을 속여봤자 방이 넓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발끝에 힘을 주어 뛰어오른 남자는 백소율의 지척까지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그 시간은 1초를 여러 번 쪼갤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옆구리 옆으로 준비한 주먹을 다시 한 번 내질렀다.
처음 계획대로 벽면까지 나가떨어진 그녀가 부딪쳐 떨어진다. 헛구역질과 함께 내장이 찢어진 건지 붉은 피를 토해내는 모습에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쉬울 리 없겠지."
마력을 일으켜 일순간이나마 환영을 떨쳐낸 남자의 눈에 현실이 드러났다. 어느새 자색 나비가 나풀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누가 그랬던가. 환영의 나비의 마법은 환영으로만 끝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그녀의 제자 또한.
'일격으로 끝낸다고?'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인지 자각했다. 하기야, 그녀가 순순히 여기까지 온 건 자신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어서였을 텐데.
"그래. 어찌됐건 마지막이란 거겠지."
오로지 승자만이 원하는 걸 쟁취할 수 있으리라.
***
'철인.'
이제는 얼마 없는 살아있는 전설. 창선을 필두로 인류의 정신적 지주라는 말까지 들었던 일곱 명의 헌터. 지금 싸우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중 하나.비록 심각한 부상으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지만 방심해도 될 상대가 아니다.
머릿속으로 수싸움을 계산한 백소율은 강하게 땅을 짚었다. 나풀거리는 자색 나비는 이미 충분할 정도로 많았지만, 알고 있다. 이 공간 자체가 마력을 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아직 자신이 바라는 결과가 나타나진 않으리라.조금 더 마력을 빚어야만 한다.
잠깐씩 철인의 마력이 자신의 환영을 웃돌 때마다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마력에서 유리한 건 자신이었지만, 반대로 신체 능력에선 결코 메울 수 없는 아득한 차이가 있다.
"Stâlp de foc."
쇄도하는 철인을 상대로 불기둥을 일으킨 백소율은 재빠르게 물러났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환영술사를 상대하는 입장에서 가장 까다로운 것은 허실의 구별. 어느것이 진짜고 어느것이 가짜인지 구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허나, 그는 그 전제를 때려부수고 있다. 구별하는 대신에 철인이라고까지 불린 그 굳건한 육신으로 불기둥을 정면에서 돌파했다.화상과 그을음에도 흐트러지지 않은 그. 비록 눈은 흐리멍덩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마다 환영을 꿰뚫어보고 있다.
'여유가 없어.'
스톡을 쌓아두고 있을 시간은 없다. 결국 나비들을 날려보낸 백소율은 환영을 폭사시켰다.스승이 가진 것과 동일한 스킬 '환영 지배'. 나비가 있던 곳이 마치 분리된 공간처럼 환영으로 가득 차오른다.
그건 지금까지와는 격이 다른 환영. 설령 철인이라고 한들 빠져나올 순 없으리라.
'더 확실하게 하고 싶었지만…'
그러다 틈이 드러나면 쓰러지는 건 자신. 차라리 이게 더 나은 방법이었다.
지금 그가 빠져든 환영은 도산검림. 칼창이 난무하는 전쟁과도 같은 상황. 그걸 증명하듯 철인의 몸 곳곳에 상처가 생기고 피가 튀어오른다.
"분명 환영일 텐데?"
혼자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백소율은 작게 끄덕였다. 스승처럼 구현화의 경지에 오른 건 아니다. 하지만 오감마저 속인 환영은 더 나아가 뇌마저 속임으로써 어느정도 현실에서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것이 지금 그녀의 경지였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미약하다.불기둥마저 맨몸으로 받아낸 철인의 육체를 고작 쇠붙이 따위로 어떻게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상처는 기껏해야 생채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마저도 서서히 재생되어간다.
뚜벅, 뚜벅. 그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다.
두려움이 없는 걸까. 아니면 정말 철로 빚은 걸까. 망설임없이 멈추지 않는 그 걸음. 사람이라기보단 마치 몬스터와 싸우는 기분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봤자 악몽은 떨쳐낼 수 없는 게 아닌가. 그런 착각마저 일었다. 시종일관 공세에 있는 건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그거 알고 있나? 마녀의 마력은 무한에 가깝다더군."
환영을 비집고 다가오는 그. 백소율은 계속해 주문을 읊었지만 이상하게도 귓가로 파고드는 목소리에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사람을 마력으로 만드는 것처럼 완성된 마녀는 자신이 죽인 이를 마력으로 치환한다. 만약에 그런 존재가 도시 한복판에 나타나면 어떨 것 같나?"
학살.
"고작 결정을 삼킨 정도가 아니라 정말 무한한 마력에 눈을 뜨게 되는 거다. 죽이면 죽일수록 더욱 강해지는 존재. 마력을 탐해 학살을 이어나가는 병기. 이걸 마녀라 부르지 않고 무어라 부르겠나?! 그 역병과 질병. 아니, 어쩌면 그 바다의 재앙마저 넘어서는 재앙이 될지도 모르지."
백소율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알고 있다. 저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걸. 평생을 괴롭힌 악몽. 그 속에서 자신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또한, 그 끝에 쓰러질 때마저 완성된 존재는 아니었다는 것을.
"마침 이곳은 그 조건에 부합한다. 사람이라면 득시글거릴만큼 넘쳐나니까."
물론 저건 어디까지나 도발. 나비를 폭사시킨 덕에 더는 꿰뚫어 볼 수 없게 된 환영 속에서 자신이 들을 거라 믿고 말하고 있을뿐이다. 이미 서로의 사이에는 여러 마법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역시 마력이 흐트러진다.안에 펼쳐진 결계가 마법의 행사를 방해하고 있었기에.
하지만 입만 열지 않으면 된다. 나비의 환영 속에서 그는 서서히 죽어갈 테니까. 소리를 들려주지만 않는다면 그걸로 안전하다.
'답하면 안 돼.'
그것이야말로 그가 바라는 것이리라.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끔 조심히 걸은 백소율은 조금씩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전부 죽을 거다. 물론 마랑께서는 남으시겠지. 뒷수습마저 그분이 끝마치실 거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모두 깨닫겠지! 정말로 숭배해 마땅할 존재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여태까지의 진실들 또한!"
"……."
"스퀘어? 칠영웅?! 모두 부질없는 것들이다! 인류의 발버둥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헛된 반항이었단 걸 과연 누가 알고나 있을까?!"
"……."
"우린,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느새 그 목소리는 자조로 변해있었다. 상처입는 와중에도 자괴감에 빠진 듯한 회한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모두가 알아야한다. 인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멋대로 찾아온 평화 아래 납작 엎드려 그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변덕만으로 세상을 멸망시킬 힘을 가진 존재가 있다는 건 얼마나 절망스러운 일인가.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지 않게끔…… 섬겨야만 한다."
어디선가 빠드득, 이빨이 갈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기 위해서 모두가 알아야만 한다. 그런 괴물이 있……"
그건 용납할 수 없는 말이었다. 양보할 수 없는 게 있다. 그리하여, 백소율은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괴물 같은 게 아냐! 그 사람은…!"
뒤늦게 아차 싶어 다물었지만 이미 늦어있었다. 소리를 듣고 똑똑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비록 그 눈은 여전히 환영을 보고 있었지만 실수할 리 없으리라.
"거기 있었군."
싸늘한 목소리가 말을 끊는다. 그와 함께 백소율의 시야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니, 사라지는가 싶더니 눈에도 보이지 않는 속도로 지척에 나타나 자신의 목을 틀어쥐었다.
"가만히 있었다면 네 승리였을 텐데… 하기야, 그만큼 진심이었단 건가?"
강한 악력에 숨이 막혀온다.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창칼로도 생채기를 내는 게 고작이었던 철인의 몸.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이 자신을 들어 올린다. 그렇게 서서히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 그가 품속에 손을 넣는 게 보였다.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선구자, 아니……"
두 개의 붉은 결정을 꺼내는 모습이 절망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마녀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