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1화 〉 #164 반룡 vs 마녀
* * *
[빨리]
"아니 난 지금 휴가잖아?"
[어차피 맨날 놀잖아. 아님 잘려도 된…]
"아 간다. 가!"
핸드폰을 접은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야 몬스터가 사라진 이후 많이 놀고먹기는 했다. 대표 클랜만 아니었다면 이제껏 해체된 클랜의 헌터들처럼 진작 백수가 돼도 이상하지 않았으리라.
"그래도 911도 아니고 무슨……"
건물이 무너졌는데 대체 왜 헌터가 움직이냐고 툴툴거리면서도 지정받은 위치로 걷기 시작했다. 달리지 않은 건 그나마 최소한의 반항. 그렇게 도착한 장소에서 사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흉흉한데."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당연 폭삭 내려앉은 건물. 시원하게 무너진 건물에 휘파람을 불었다. 붕괴의 여파에 휩쓸렸는지 주변 건물도 마찬가지로 불안정하게 보인다. 그나마 외딴 곳이라 망정이지 도시 한복판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며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으리라.
'추가 피해는……'
아무래도 없을 모양. 그나마 다행한 일이지만 확신하긴 이르다. 그도 그럴 것이도망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이들은 거의 기백에 달하고 있다. 대체 이 외딴곳 어디에 이만큼이나 사람이 있었을까 의아해질 정도였다.
"테러?"
이전이었다면 몬스터가 출현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미 1년 가까이 새로운 던전과 몬스터의 자연 발생은 보고된 바 없다. 정황을 보고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테러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지금뒤늦게 깨달은 거였지만 달리는 속도만 보더라도 이들 전원이 헌터였으니까. 그럼 대체 무슨 일일까? 기백에 달하는 헌터가 도망칠 일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의아함이 더해지는 와중에 저편에서 걸어오는 인영. 오히려 그 실루엣이야말로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실루엣?'
사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어두운 밤조차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실루엣이 보인단 말인가?
정말 인간인가?가지고 있는 감정 스킬을 사용한 순간 찌르는 듯한 통증에 눈을 덮어야했다.
"……!"
마치 날카로운 바늘에 찔린 것 같다. 이런 경험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오래전 파견으로 지옥과 같은 최전선에서 보았던 재앙. 어렴풋하게 재앙을 통찰했을 때와 비슷하다. 비록 그 정도의 강렬함은 아니었지만……
'설마 그 정도라고?'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몸에 익힌 스킬이 거짓을 말할 리 없다. 헌터들이 도망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저 실루엣으로부터란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그리고 서늘한 바람이 피부에 닿았을 때, 그는 깨달았다.
여성의 모습이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던 이유를.
"아, 이 진짜 미치겠네."
피부에 닿은 바람은 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그녀가 다가올 때마다 조금씩 풍압이 강해지고 있는 이유는 주변의 마력이 흘러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그 거대한 마력이 마치 아지랑이처럼 그녀를 가리고 있다.
거기까지라면 괜찮다. 하지만 정말 문제인 건 대기의 마력을 끌어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
"……."
가슴이 간질거린다. 안에서 술렁이는 기분에 심장 어림을 부여잡은 사내는 자신의 마력이 흔들리고 있음에 침을 삼켜야만 했다. 그리고 어째서 헌터들이 도망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위협적인 존재라는 건 둘째치고서 이 흔들림. 자신에게 깃든 마력이 그녀에게 흘러들어가려 하고 있었다.그건 더 이상 친화력같은 문제가 아니다. 친화가 아닌 지배. 타인의 마력조차 자신의 것으로 삼는 괴물.
"마, 마녀…"
저도 모르게 입밖에 낸 단어가 적절하기 그지없다고 느꼈다. 더 이상 거리가 좁혀져서는 안 된다는 일념 하에 처음의 목적따윈 잊어버린 채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다만 그 생각이 좀 더 빨랐어야만 했다. 이미진작부터 도망치고 있던 헌터들처럼.
어느정도 거리가 줄어든 순간, 사내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그건 몸뚱아리가 고장나서가 아니라 조금 다른 쪽에 문제가 생겨서였다.
속이 울렁거린다. 마치 거대한 손에 붙들려 통째로 뒤흔들어지는 듯하다. 그건 헌터라면 필연적으로 몇 번이나 느꼈을 감각 정신고갈이었다.
'……?!'
그 감각은 점점 심해져만 간다. 흔들림? 아니 그건 이탈이었다.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송두리째 빨려들어가는 마력. 어느새 의식이 흐려지며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웃고 있는 것 같기도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한 마녀의 맨얼굴이었다.
***
"이걸 보낸 새끼들이 있다는 건데…"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클랜원이 매고 있는 배낭을 눈여겨 본 홍유리는 심문으로 얻은 정보를 떠올렸다. 저 배낭 안에 든 물건을 보내는 장소. 이곳에서 그리 머지 않은 곳. 주소지를 따라가면 분명 도착할 수 있으리라.
'그건 그렇고…'
어쩐지 모를 불길한 예감… 아니, 직감이리라. 아무래도 일이 쉽게 풀리진 않을 것 같다는 직감. 그리고 직감보다 더 확실한 건 상황이었다. 천천히주변을 수색하며 더듬어 갈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그럴 필요는 없어보인다.
"!"
도시 한가운데서 사람들의 비명이 이어진다. 그 이유는 웬 헌터가 달리고 있기 때문에. 인파 사이를 질주하는 그 속도는 차가 도로를 질주하는 듯하다.
아주 멀리서 그 표정이 겁에 질려있음을 확인하고 홍유리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찌됐건 이곳은 타국이고 사소한 난리에 굳이 끼어들 필요는 없으니까.
"쯧."
가볍게 혀를 찬 강태호는 앞에 선 이기준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저 놈 저거 잡아와라."
"굳이요?"
"인마! 저러다 부딪치면 죽어."
끄덕거린 이기준이 턱짓하자 두 헌터가 맹견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도시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벌어진 추격전은 허무할 정도로 가볍게 제압되었다. 고작 1분도 걸리지 않고 바닥에 납작 엎드린 헌터는 아무리봐도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인다.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지만 너무 작은 목소리에 어눌하기까지 해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 새끼 약이라도 했다냐?"
"대충 넘기고 가죠. 이러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쪼그려 앉아 뺨을 툭툭 건드린 강태호는 눈꺼풀을 집어벌려 동공을 확인했다. 그러자 알 수 있었다. 취한 건 약이 아니라 공포라고.
'그리고…'
공포 때문일까? 마력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은 황급히 달려온 이곳의 대표 클랜에 의해 차순으로 밀려났다.
"잘 됐다. 대충 넘기고 가자고."
뒷덜미를 잡고 일으킨 강태호는 제압한 헌터를 인계하려했지만 그보다 먼저 다가온 대표 클랜이 도움을 청해왔다.마랑회의 일 때문에 급해 도울 여유가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급하게 외친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들이 말하기를,
"마녀?"
***
철인의 뜻에 따라 완성된 커다란 재앙이 될 존재인 마녀.그것이 다른 재앙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맹목적으로 파괴하진 않는다는 것. 인류에 증오를 품고 힘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그런 듯하다.
도시가 붕괴하지 않은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녀가 도시 중심부로 오지 못한 건 대표 클랜의 대처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움직이지 않고 있어서였다.아니, 되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종말의 일부였던 재앙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재앙의 차이점일지도 모른다.
"한 시름 놓기는 했지만……"
언제까지 얌전히 있을 거라곤 장담할 수 없다. 대표 클랜마저 여명이 도착하기 고작 몇 분전에 가까스로 사태를 파악한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니까, 저걸 만든 게 마랑회다 이거요?"
"아마도……"
말끝을 흐리자 강태호는 턱 아래를 긁었다. 이제껏 들은 이야기로는 도시 곳곳에서 붙잡은 날뛰는 헌터들이 전부 마랑회라는 것. 스스로 자수하듯 뛰쳐 들어온 이들이나 마랑을 부르짖으며 기도한 이들이 있었기에 유추할 수 있던 사실이다.
높은 옥상, 쌍안경을 권하는 대표 클랜의 권유를 손사래치고 강 먼 거리에서 무너진 건물을 내려다보았다.렌즈가 필요없는 시력. 설령 몇 km바깥의 물체라도 정확히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무너진 건물로 천천히 돌아가는 걸음… 그마저도 오래 걸리진 않는다. 과연 도착한 다음에는 뭘 하려고 할까.
"어떠냐."
궁수에게 묻자 이기준은 조심스레 자신의 추측을 늘어놓았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외부의 자극같은 게 없다면."
아마 움직이는 대상을 쫓은 듯하다. 반대로 그런 대상이 없당연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말에 수긍한 강태호는 아공간을 열어젖혔다.
"그럼 일단 준비하고 움직이면 해보자고."
만약을 위해 전투 준비부터 하고 있자는 말에 좌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참 핸드폰을 건드리고 있던 홍유리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전송했을 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 만약을 위해서라도 알파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백소율……"
알 수 있었다.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는 마녀의 정체를. 이미 흔적을 쫓는 마안이 주변의 흔적을 제멋대로 읽어버렸기에. 이어진 발자취. 그 보폭과 신장 그리고 체형이 누구의 것인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