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3화 〉 #166 마녀의 꿈
* * *
잠에서 깨어난 백소율은 식은 땀에 흠뻑 젖은 웃옷에 답답함을 느끼고 카라를 당겼다.이젠 꾸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악몽이 슬그머니 기어들어와 잠자리를 괴롭힌다.
도대체 왜 갑자기 이런 꿈을 꾸었는가.
생각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았다. 짚이는 구석이 없었기에 한숨 쉬며 일어났다. 그리곤 까치발을 들어 가장 높은 칸에 있는 물을 들이켰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청량감을 느끼니 답답함이 날아가는 듯했다.
'만나러 가 볼까?'
그 사람을 만나면 이 꿈도 잦아들지 모른다. 뭐니뭐니해도 이 악몽을 몰아내주었던 건 다름 아닌……?
'다름 아닌?'
누구? 누가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떨쳐낼 수 없는 악몽은 끈적끈적한 어둠과도 같다. 언제나 따라붙는 그림자이기도 했다.누구도 믿어주지 않은 악몽을 누가 떼어줄 수 있단 말인가.
얼굴을 씻으러 세면대에 선 백소율은 의아함을 느꼈다. 대체 언제부터 세면대가 이렇게 높았더라? 그래도 못 쓸 정도는 아니었기에 어찌저찌 세안을 마쳤을 때 백소율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것.
……어린 시절의 자신이 거기에 있었다.
***
야구장의 타자처럼 양손으로 쥔 검을 횡으로 휘두른다. 마력탄은 빠르고 강했지만 그만큼 뻔한 궤도였기에 받아치는 건 어렵지 않다. 검의 옆면에 부딪친 마력을 있는 힘껏 되받아친 강태호의 팔뚝에서 돋은 힘줄이 터질 것처럼 꿈틀거렸다.
"흡!"
기어이 걷어낸 마력탄을 되받아치자 마침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또 하나의 마력탄이 부딪쳐 폭발한다. 대기를 떨치는 그 힘에 시원한 맞바람에 땀이 식어 시원하다고 느낀 것도 잠시 강태호는 아직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음에 침음했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더 많고 강한 마력을 쏘아내고 있다. 일단 가까이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정작 마녀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데도.
'저릿저릿한데.'
자신의 팔뚝을 주무르며 강태호는 수를 강구했다. 그리고 몇 번을 생각해봐도 답은 정면 돌파밖에 없음을 깨달았다.지치지도 쓰러지지도 않는 마녀를 상대로 속전속결로 결판을 짓지 않으면 승산은 계속 떨어질 뿐.
문제는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가하는 점이었다.
'한 번이냐? 아님 두 번이냐?'
마력을 사용해도 마찬가지. 저만한 힘을 몸으로 받아낼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그 정도이리라. 그나마도 죽기 직전까지는 가게 될 테고.
괴물이라고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하지만 결국 그 근본이 사람인 이상어떻게든 한 번만 죽이면 끝난다.
'설마 거짓불멸같은 건 없을 테고.'
강태호는 아래턱을 긁었다.
"그래. 뭐 이 정도면 공평하지."
아공간으로 대검을 집어넣고 우두둑 손가락을 꺾었다. 여기서부터 필요한 건 속도. 단숨에 파고들어 일격을 먹일 틈뿐이다.마녀의 배후에서 활을 조준하고 있는 이기준과 타이밍을 맞추며 달릴 준비를 마쳐두었다.
그러나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수를 읽힌걸까? 아니, 어쩐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에 속임수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그 실상이 무엇이건간에 기회라 여긴 강태호는 전력으로 내달렸다.
"!"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마녀가 재해로 변하기 전까지. 달려들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나가떨어지고 만 강태호는 앓는 소리를 냈다.
"염병. 공평은 개뿔이."
***
"소율이가……"
믿기 어려운 말이었을까. 떨리는 손에서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긴가민가한 이은하가 털을 꽉 움켜쥐는 게 느껴졌다.불안에서 발로한 감정이 다른 곳으로 뻗어가기 전에 그 뿌리를 잡아채었다.
"걱정하지 마라."
바로 그러기 위해 여태껏 노력해온 게 아니었던가. 이런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로 백소율을 잃을 생각은 없다.
"설령 일이 잘못되더라도 반드시."
그 때는 본신의 힘을 사용해서라도 백소율을 되살리고 말겠다.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다해도 마찬가지. 타인이 평가하는 자신과는 달리 늑대는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언제나 해왔던 일은 하나. 그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작정 있는 힘껏 달려왔을 뿐이다. 타인의 생각과 평가는 그 과정에서 얻은 부수적인 것.
'어차피 하나를 되살리건 둘을 되살리건.'
늑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일이 없는 게 최선일테니까.
"만약에…"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귓가를 파고든다. 떨리는 눈빛이 자신을 보고선 묻고 있었다. 다만 그 감정은 불안이나 두려움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만약에 내가 같은 처지였다면."
"구할 거다."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망설임은커녕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선수를 쳐진 말에 휘둥그레 두 눈을 뜨는 모습이 보였다.
"그 반대라도 마찬가지일 거 아닌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활짝 펴지는 얼굴. 힘차게 끄덕이는 그녀를 보고 늑대는 소리없이 웃었다.
"응!"
***
믿기 어려운 일에 백소율은 얼굴을 매만졌다. 곧 이것이 현실이 아닌 꿈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단순한 꿈은 아닌 모양이었다.자각한 시점에서도 깨어날 생각을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대체 왜?'
기억이 없다. 아니, 더 정확히는 어느 순간 이후부터가 제대로 떠오르지 않고 혼선을 빚고 있었다. 기억과 지식이어우러지지 않는다. 익힌 기억은 없는데 확실히 체득한 지식들이 머릿속에 색색들이 떠오른다. 이럴 리가 없는데…… 절대 정상이 아닌데도…… 도무지잊어버린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낸 백소율은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선 단서가 필요하다고 느꼈다.그 또한 떠오른 지식의 일부. 이곳의 모순을 찾아내면 분명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응."
습관적으로 어깨 위를 매만지다 흠칫거렸다. 거기에 아무것도 없는데도 자주 누군가가 올라타 있었던 듯한 느낌이 든다.가슴 한 켠에 도려낸 상처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송두리째 빼앗긴 것만 같다.
울음을 삼킨 백소율은 힘차게 현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건 도시가 아닌 폐허.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참혹한 광경이었다.한 걸음 두 걸음 현관에서 멀어진 백소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아아…!"
아무도 없는 이 폐허. 그러나 어렴풋이 알 수 있는 흔적들이 곳곳에 있다. 반쯤 부숴진 높은 타워나 눈에 익은 간판과 거리. 무엇보다도 무너진 아카데미.다리에 힘이 풀린 백소율은 곧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이건 자신의 꿈이 아니다.
자신이 아니라, 마녀의 꿈. 망가진 세계에 갇히고야 말았다.
"아, 아… 아아아아악!"
지금의 자신이 아니라, 악몽에 벌벌 떨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
"컥, 컥!"
잠깐 기절했다 사레 들려 깨어난 홍유리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이, 이게 절여 죽이려고 환장했나!"
대체 몇 병을 뿌렸는지 옷이고 몸이고 포션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누가 보면 과다복용이라고 혀를 내두르겠지만 지금의 자신에겐 적절한 조치. 하기야 포션 복용의 기준을 사람이 아닌 용종으로 맞춰두어야 할 테니까.제멋대로 나뒹구는 유리병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아무튼 상처가 꽤 회복된 것도 사실이니까……
"……휴."
시위에 집중하느라 말이 없는 이기준을 내버려두고 몸을 일으킨 홍유리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백문이 불여일견. 굳이 이기준에게 캐묻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더 나으리라.
그렇게 보게 된 광경은 다소 참담한 것이었다.
산발이 된 머리와 제어되지 않는 마력. 더는 우스갯소리로도 마법사라 부를 수 없다. 몬스터와도 다르다. 그저 제어할 수 없는, 갈무리할 수 없는 마력의 고삐를 놓고 힘으로써 행사하고 있다.
"폭주……?"
아니, 저게 정상이겠지. 과분한 마력의 댓가는 언제나 참혹한 것. 그것이 설령 자의가 아니더라도 힘에는 눈이 없다.
왜 갑자기 저렇게 됐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저대로 내버려두면 제멋대로 날뛰다가 오래지않아 자멸할 것이란 건 확신할 수 있었다.육체의 재생이 파괴를 따라가지 못한다. 분명 이 비명은 끔찍한 고통에 허덕이는 신음이리라.
순간, 한참 집중하고 있던 이기준이 시위를 놓았다.
한없이 직선에 가까운 궤적. 흔들림없는 화살은 고작 한 발임에도 불구하고 사수의 실력을 보여주는 듯하다. 바람을 가르고 들리는 한 줄기의 파공성. 기어이 모든 것을 꿰뚫고 마녀에게 닿기 직전, 홍유리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흘렸다.
혹시라도 잘못되는 게 아닐까하고.
하지만 화살은 덧없이 꺾이고 말았다. 거기에 안도하고 만 홍유리는 스스로를 한심스레 여겼다. 이 암담한 상황에 백소율이 다치지 않았다고 다행하다고 여긴 것인가. 명백히 뒤를 맡아줄 알파가 있기 때문이다. 탄식한홍유리는 기꺼이 그 자리에서 뛰어내렸다.
"이 씹어먹을 년."
아무리 계란에 바위치기라해도 가만 내버려둘 순 없다. 알파가 올 때까지 손가락만 빨고 있기는 싫었다. 무엇보다도 이제 다 죽어가는 숨으로 맞서는 강태호를 내버려둘 수도 없었으니까.
마녀가 꿈을 꾸는 사이, 마랑이 다가오는 사이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