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4화 〉 #167 소녀의 꿈
* * *
소녀는 폐허를 달렸다.
있는 힘껏 폐를 쥐어짜내 주저앉아버릴 만큼 달리고 달리며 강박처럼 떠올렸다. 그럼에도 무엇 하나 떠올리지 못한 채 울면서 달리고 있었다.
소매는 진작 눈물로 범벅이 되고 말았다. 이곳이 가짜 세계라고 한다면 진짜 세계는 어떻게 됐을까?그거야 뻔하다.마녀에게, 아니 마녀가 된 자신에게 유린되고 있으리라.
'안 돼!'
생각만으로 다리가 흔들려 주저앉을 뻔했다. 혹시 마음까지 어린 아이가 되고 만 걸까. 이를 악물고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그저 무너졌다간 죽도 밥도 안 될 테니까.
"찾아야 해."
모순을 찾아서 탈출하는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찾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디서?'
달리고 달려도 어린 시절의 자신의 걸음으론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도시. 광활하게마저 느껴지는 이 도시의 어디에서 모순을 찾아야 하는 걸까.
마녀와 자신은 어디서부터 갈라진 걸까. 벗어날 수 없는 악몽은 어디서부터 달라졌을까. 과연 악몽과 운명의 분기점은 어디인가.엉망진창 섞인 기억 속에서 그것만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카데미."
하지만 분명 단서를 찾을 수 있다면 아카데미이리라.지식과 혼선을 빚은 기억. 그보다 더 어린 몸. 자신 또한 모순투성이인 이 세계에서 단서를 찾는다면 분명 그곳이리라.
왜냐하면, 떠오르는 기억의 마지막은 이곳이었으니까.
언제 쓰러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달렸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서기진맥진한 채로 아카데미로 도착한 백소율은 역시라고 생각했다.
……그래.이럴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현실이 아닌 꿈이라고 해도 이런 엉망진창의 폐허에서 아카데미가 남아 있을 리 없으니까. 아카데미가 있어야 할 장소에는 마찬가지로 엉망이 된 폐허만이 자리하고 있다.
"……."
백소율은 그 한가운데에 섰다.
항상 넓은 운동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따라 더 넓어보였다. 언제나 벽처럼 굳건히 서 있던 아카데미가 와르르 무너져있었다.
'이것도 마녀…… 아냐.'
악몽 속의 모습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폐허의 모습이 아니다. 애당초 아카데미가 맞긴 한 걸까? 건물의 재질이 다른 듯하다. 아니,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마치 '무너진 낡은 건물을 재건했지만 또 무너진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단순히 마녀가 여기서 조금 다른 일이 있었던 듯하다.
좀처럼 쉽게 떠오르지 않는 의문에 손톱을 깨물었다.
"알고 있을 거야……"
분명 알고 있을 거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기억보다 앞선 지식이 바로 그 증거.백소율은 그렇게 확신했다.
"난, 알고 있어."
확신한 순간,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사라졌던 기억이 아직 다음으로 이어져있었다.
백소율은 망설이지 않고 달렸다. 다음 기억의 발자취를 쫓아 달리는 그녀의 뒷모습은 조금이나마 성장해있었다.
***
홍유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기량은 어떨지 몰라도 비명지르는 마녀와 자신의 역량 차이는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설마하니 그 바다의 재앙만큼 절망적인 상대는 아니었지만 역병과 질병만큼이나 압도적인 존재감. 그런 적을 상대로 여유를 부릴 순 없다.
"기분 개같이 더럽네."
단순히 시간을 끌 생각이 아니라 죽일 생각으로 싸워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되려 죽는 건 자신이리라. 생각을 고쳐먹은 홍유리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미 한참이나 써버려 얼마 남지 않은…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보다도 더한 마력이 안에서 날뛰고 있었다. 야생마처럼 날뛰는 마력을 제어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만 했을 정도로.
"알아들어? 기분 더럽다고."
바득바득 이가 갈린다. 그리고 그 이빨 사이로 붉은 액체가 흘렀다. 피가 아니다. 포션이 아니다. 그저 확인차 가져왔던 마력의 용액. 병에 담겨 있던 마력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 인마…"
황당하다는 듯이 말하는 강태호는 그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은 듯 보였다. 그게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함께 본 그로서는 홍유리의 행동이 황당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아 뭐!"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홍유리를 보고 꾹 입을 다물었다. 지금 건들면 진짜로 터질지도 모르겠으니까. 대신 조용히 검을 들었을 때, 찌릿한 시선과 이어진 말에 강태호는 손가락을 관자놀이 옆에서 빙빙 돌려야 했다.
"됐으니까 찌그러져 있어요."
"머리 괜찮냐? 저걸 혼자 잡겠다고?"
"아 꺼지라고!"
던진 포션을 받은 강태호는 그게 진심이란 걸 깨닫고 얼떨떨해하면서도 물러났다. 열이 뻗쳐 있단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 머리 한 구석으론 항상 생각하고 입으로는 주문을 뱉는 족속이다.
설마하니 승산도 없이 싸우려들진 않으리라.
'……맞겠지?'
자신의 생각에 의심이 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홍유리는 쌍심지를 켜고 있었다.
마녀는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다. 갈수록 공격의 수단과 사고는 고차원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폭주하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그저 무한한 마력을 뿜어내는 불가해의 재앙…… 물론 그 덕분에 이렇게 얘기를 나눌 여유가 생기기는 했지만.
"어쩔 셈이냐?"
묻는 말에 홍유리는 불량한 모습으로 바닥에 침을 뱉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냥 확 죽여버려야지."
끌어올린 마력은 계속해 한 곳에 집중되고 있다. 어느샌가 그녀의 눈동자와 손끝이 진홍으로 물들어있었다.그래봤자 마녀에 비하자면 하잘 것 없는 힘. 그러나
"뭐? 야! 야 인마!"
"넌 뒈졌어!"
강태호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홍유리가 달려나갔다.
***
기억이 이어진 곳은 강변이었다. 그리 익숙한 장소는 아니지만 어쩐지 이곳에 발을 디디자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다.
"여기서부터……"
분기점의 시작은 바로 이곳.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 자신을 마녀가 아닌 백소율으로 남게끔 만들었다. 느낌 혹은 감에 불과하지만 분명히.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어김없이 폐허로 변해있는 강변. 대로가 무너지고 물의 색은 더없이 탁해보인다. 마치 하수구의 오수가 흘러넘쳐 하나로 된 듯하다.
물론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장소가 아니라 있었던 일이 중요한 거였으니까. 백소율은 강변의 모래를 들어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은 마치거대한 화재가 있었던 것처럼 그슬려져 있다. 그건 악몽의 기억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듯하다.
그리고 그슬린 모래알 속에서 더욱 검은 그것을 찾았을 때 마침내 깨달았다.
'마녀의 꿈이 아니야…?'
여태껏 모순을 찾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어 깨닫지 못했던 또 하나의 모순이 떠올랐다. 문제 삼지 않고 있었던 그것이야말로 문제이자 모순.자신이 마녀가 됐고 기억에 혼선을 빚었다. 그 때문에 가라앉은 의식이 이곳에 갇혔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마 사실이리라.
하지만…… 이곳은 정말 마녀의 꿈일까? 정말 그렇다면 왜 악몽 속의 모습과는 조금씩 다른 모습이 돼 있는 걸까? 단순히 꿈이기 때문에?
'틀렸어.'
……그래. 마녀의 꿈이 아니다.
"나였어."
마녀의 꿈이 아니라 자신의 꿈. 누구도 아닌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일. 폐허가 된 서울의 광경은 달라진 미래의 자신이 겪었던 일에 발로한 결과였다.
모순을 깨닫고 단서를 손에 쥔 순간, 백소율은 이곳에서 나가야겠다고 맘 먹었다. 어린 시절의 자신은 사라지고 기억은 되돌아온다.
온전한 모습을 되찾은 순간, 바깥의 풍경이 떠올랐다.
더는 꿈속에 머물러있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몸은 움직일 수 없는 채였다.
'유체이탈?'
가장 비슷한 현상을 떠올리자면 그것이리라. 높은 곳에 부상한 의식으로나마 3인칭의 시점으로 자신을. 마녀가 된 자신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 순간, 백소율은 헛숨을 삼켰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정면으로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아무리봐도 계란으로 바위치기. 무리한 일이었지만 결코 멈추지 않고.
그래. 저 사람도 그랬다. 항상 무모한 일을 한다. 그만두라고 소리쳤지만 의식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다. 결국 마녀에게 접촉한 그녀는.
"……!"
자신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
전신으로 마력을 운용하는 것. 그건 어렵지도 않은 가장 기초적인 마력의 사용법. 헌터나 몬스터들이 자주 애용하는 방식으로 알게 모르게 마법사들이 꺼리는 방식이었다.마법사의 입장에서는 굳이 몸으로 부딪치며 위험 부담을 끌어안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만큼 묘한 일이었다. 그 정점에 있다할 수 있는 홍유리가 그럴 필요는 없으니까.
마구잡이로 방출하는 마력에 전신이 저릿저릿해짐을 느끼면서도 홍유리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선불맞은 맷돼지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정도 거리가 좁혀진 순간, 접근하는 그녀를 인식한 마녀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대양을 떠올리게하는 거대한 마력. 홍유리는 몰랐지만 그것이야말로 오직 마력 하나만으로 재앙의 이름을 가졌던 존재의 힘이었다.온전하지 않은 채로도 평행 세계의 고원과 여명의 전원이 도시가 반파된 뒤에야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던 존재.
허나, 달리 말하자면.
"그거 원툴이라는 거잖아!"
진각을 밟았다. 깊게 파고든 발은 지하 깊숙한 곳까지를 굳건한 지지대로 삼아 흔들리지 않는 중심으로 만들었고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허리가 비틀어진다.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동작은 헌터로서의 경험만이 아니라 무술에도 문외한이 아님을 알리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이기준과 전우택을 가르쳤지만, 그 둘은 마법사가 아니었으니까.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다리에서 허리로 이어진 동작. 전해진 힘은 이윽고 어깨를 타고 주먹으로 깃들어간다.
그 끝은 기이하게도 검게 물들어 있다. 마치 글러브를 끼기라도 했다는 듯이.붉었어야 할 마력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여러 색의 물감을 겹치고 겹치면 결국 검정이 되는 것처럼 마력만이 아닌 악의 또한 이곳에. 오직 이 한순간만을 위해 모으고 또 모아둔 힘이었다.
마녀의 근원이 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마력을 들이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녀가 가만히 기다려줄 리는 없다.존재하는 것만으로 저리게 만들던 마력은 이미 끔찍할 정도로 강하게 자신을 밀어내고 있었다. 1초도 되지 않는 미래에 수십 미터나 밀려나고 있을 터.
그럼에도 홍유리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럴 수 있었다. 왜냐하면, 먼저 닿은 건 자신이었으니까.
"어때? 이 개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