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7화 〉 #170 일단락
* * *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마력의 해방. 만상의 주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마녀는 다음 영역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그 방식이 설령 잘못된 길. 학살로 이어지는 길이라한들 위업임에는 틀림 없다.
그 힘을 피난열에 합류한 시민들조차 느끼고 있었다. 비록 헌터는 아니지만 생물로서의 본능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문명을 쌓고 조금씩 벗어난 생명의 위기가, 두려움이 선뜻 다가와 전신을 쭈뼛거리게 만들었다.
마치 벽에 둘러쌓인 것만 같은 암담함. 답답함.그러나 그런 감정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착각이라도 했단 것처럼 사라진 감각. 다시금 유도에 따라 길게 행렬이 이어지는 와중에 헌터들은 저도 모르게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그들만큼은 알 수 있었으니까. 그건 착각도 뭣도 아니었다고.
다만, 더욱 커다란 무언가가 전부 집어삼켰을 뿐.
***
분명하고 명확하고 확실하게 마녀는 조금의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정신체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었으리라. 많은 이들을 학살하고 마력으로 삼아 발판을 만들어 ㅅ산계를 집어던지고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었으리라.
그 앞을 막아선 마랑이 아니었더라면.
"!"
귓가를 먹먹하게 하던 끔찍한 비명은 조금도 들리지 않는다. 행동으로만 몸부림칠 뿐 그 여파는 닿지 않았기에.아마도 바다의 재앙 혹은 자색의 흑호만이 가까스로 다다랐을 힘의 영역을 거침없이 풀어낸 것. 그런데도 거기에 걸린 시간은 일순간에 불과하다.
저만한 마력을 방출하는데 걸린 시간이 고작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그 말인즉, 전력이 아니라는 뜻.
"……."
그 사실에 좌중은 침묵했다.
1년이라는 시간은 길면서도 짧다. 그 사이에 평화에 젖어 잊고 있었던 이들도 있었고 처음부터 알지 못했던 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홀린듯이 발걸음과 시선은 진원지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어느새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두말할 것 없이 아까까지 허겁지던 도망치던 마랑회의 일원들이었다.
신이라 부르짖으며 구원을 원하고 기도한다.부디 저 마녀를 멈춰달라고 그리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이 자리에 누구도 바람이 이루어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설마하니, 저런 존재도 있었는가.
그저 있는 것만으로 검정으로 물들여 칠흑을 불러오는 존재. 네 발로 땅을 딛고 선 그는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마력을 뿜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실감나지 않는다. 마치 혼자만이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듯하다.
걸음걸음을 내딛어 결국 마녀의 앞에 섰을 때, 중압에 이기지 못한 마녀는 이미 무릎 꿇고 있었다. 압도적인 존재감에 짓눌려 싸울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굉장한……"
감탄을 뱉은 누군가의 말에 홍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높은 산을 보는 듯한 타인과는 달리 어렴풋하게나마 저게 얼마나 드높은 경지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이미 결착은 났고 싸울 이유가 없다.
결국, 발악하던 마녀는 제풀에 지친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그리고 실루엣처럼 보이던 모습은 조금씩 제 색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마녀가 마녀일 수 있었던 이유는 거대한 마력. 그리고 대기의 마력조차 불러들이는 압도적인 지배력으로 인한 것.달리 말하자면 그 원인 되는 마력을 빼앗는다면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늑대가 마음먹음에 따라마력을 끌어당기는 거대한 마력은 순식간에 줄어들어갔다.더한 지배력에 흡수되어 정신체의 영역에 오르고 있던 마녀의 근본이 된 힘을 송두리째 잃어가고 있었다.
***
한번 가지고 있던 것을 잃었을 때 느끼는 상실감은 언제나 상상보다 더하다. 하지만 이 순간, 백소율은 안도할 수 있었다.
마력이 줄어감에 따라 부상했던 의식이 가라앉아 육체에 정착해간다. 동시에 한계 이상의 마력을 가졌던 반동으로 이런저런 상처를 입은 몸에 느껴지는 아픔.
예상치 못한 일에 백소율은 자신의 팔을 쥐며 이를 악물었다. 신음을 참는 것만으로 신경을 쏟아야했지만 이내 그런 아픔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장막이 둘러지고 이 좁고도 넓은 공간에 그와 자신만이 남아있었다. 이미 주변의 소리따윈 들리지도 않는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백소율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멋대로 나섰다가 이렇게 되고 말았다. 맡겨달라고 한 주제에 뒷처리를 하게 해버렸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설령 입이 열개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리라.
사과하는 것마저 쉽지 않았다. 조용한 고요함에 턱턱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괜찮나?"
그런데도,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의 안부를 물었다.
누군가에게는 흉흉하기 그지없는 붉은 눈이 그처럼 따스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욱 미어지는 듯했다.
"이제 아픈 곳은 없나?"
백소율은 천천히 자신을 더듬었다. 면목없음에 느끼지 못하고 있다 여겼던 아픔은 어느새 모두 사라져 있었다. 상처는 아물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으니까.
황망해하던 백소율은 가장 먼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마지막 순간에나마 볼 수 있었다. 자신으로 인해 바깥이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를.
비록 외곽이라고 하나 도시 일부가 폐허가 됐다. 마랑회의 일원이라고 해도 사람을 마력원으로 삼아버리고 말았다.반목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신과 뜻을 함께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모두 삼켜버리고 말았다.
마력에 취해버려서 제멋대로 풀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을 누르지 못하고 마녀가 돼버렸다. 그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차라리…'
차라리 그냥, 죽을 걸 그랬나.
철인을 죽이고 그 자리에서 자결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으리라. 백소율은 이마를 짚고 자괴했다. 이런저런 말을 붙여봤자 결국엔 각오가 부족했고 생각이 짧았다는 걸로 귀결되고 말 테니까.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가, 선생님을."
직접 보아 알고 있다. 그녀가 어떤 꼴이 되었는지를. 하마터면, 알파가 조금 늦게 왔더라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았으리라.
그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는 듯하다. 떨리는 손가락을 모두 으스러뜨리고 씹어먹으면 사라지지 않을까하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은 이렇게 되고 말았지만 누구보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엇갈리기 전에 그녀는 오갈 데 없는 자신을 지켜준 사람이자 가르쳐준 선생이었고 친구이자 가족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알파에게 말이다.
그런 사람을 죽일뻔했다. 오한과 죄의식에 짓눌려오슬오슬 떨던 백소율은 결국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죄송해요."
그 말밖에 더 할 말이 뭐가 있으랴. 최악으로 자꾸만 치닫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미안해하지 마라."
그리고 복잡한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건 그의 말이었다.
"내가 했어야하는 일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단 걸 알 수 있어서.
"맡기는 것보다 내가 나섰다면…… 이럴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 따뜻한 말이 오히려 자신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집어넣는 듯하다. 여전한 눈길로 봐주는데도 거기에 마땅히 있어야 할 무언가가사라진 것만 같아서 가슴이 메어왔다.
핑, 하고 눈물샘에서 마구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픈 경험을 하게 해서, 미안하다."
입장이 뒤바뀐 말이었다. 백소율은 있는 힘껏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서 그를 붙잡지 못하면 정말,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정말 소중한 걸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신뢰라는 이름의 연결고리가……망가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
이미 그는 자신의 전부였으니까.
"그래도 이제는."
그래서 백소율은 늑대가 하는 이어진 말을 끊어버렸다. 그리곤 울고불고 말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횡설수설 소리친 말은 스스로도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제정신을 차렸을 때, 그에게 안겨있었다. 품 속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한참이나 감정을 쏟아내고제멋대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너무 뜻밖이어서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고마워요."
……고맙다고?
뭘 고맙다고 한 걸까. 자신을 구해줘서? 선생님을 살려줘서? 아니면……
"……그래."
많은 감정이 담긴 수긍의 말에 백소율은 조금씩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다시 깨어나면 그를 볼 수 있을까. 혹은 이 모든 게 꿈인 건 아닐까. 불안속에서 조금씩 의식은 가라앉고 수마가 찾아온다.
그제서야 자신이 무엇에 고마워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도.……그렇게나 두려워했었는데 옆에 있단 것만으로 이렇게나 안심할 수 있었다.그가 말했던 미안하다는 것은 약속에 대한 것일 테니까.
그 때의 말을 떠올리며 천천히 잠에 들었다.
"고마워요……"
약속을 지켜줘서. 나의 재앙을 막아주어서. 몇 번이고 막아주겠다는 그 때의 약속을 그는 기꺼이 지켜주었으니까. 말뿐인 약속이 아닌 걸 증명해주어서.
"……미안해요."
조금 잠들었다가 일어나겠다고 말한 백소율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
그림자를 거둔 늑대는 사람들의 중앙으로 걸었다.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마랑의 존재를 목도했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속으로나마 마녀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중앙을 지나쳐 그 스스로 걸음을 멈출 때까지 아무도 막아서지 못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돌아가자."
잠든 백소율을 업은 채로 그렇게 말하는 늑대에게 홍유리는 천천히 끄덕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