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0화 〉 #172 마지막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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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일찍 나와버렸나 싶었지만 이미 내친 길. 헌터라는 직업은 참 신기해서 몸과 정신은 고되지만 하면 할수록 사람이 단련된다.
잠깐 생각해본 이은하는 최근 수면 시간이 부쩍 줄었음을 자각했지만, 피곤하지는 않았다. 고작 서너시간의 수면만 취하면 충분했으니까. 제 얼굴에 금칠하는 것 같지만 뛰어난 헌터일수록 이런 현상은 더 두드러진다고 들었다.
'물론 권장하진 않았지만.'
생활 패턴이 엉망이 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지만 글쎄…… 이은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직 이른 시간에 사람은 얼마 없었지만 이렇게나 좋은 날씨.완연한 봄의 그리 덥지도 않은 따뜻한 날에 여유롭게 걷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고작 며칠 전에 시끄러운 소동이 있었다고는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평화로운 날이었다.
'그 땐 난리도 아니었는데.'
팀장님은 송장이나 다름없는 꼴이었고 조금만 늦었어도 2팀장님은 죽고 말았으리라. 생각에 잠긴 이은하는 가만 강변을 바라보았다.
언뜻 멈춰있는 것 같지만 물살은 유유히 흐르고 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람도 불고 있다. 멈춰있는 듯이 전부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때는 그렇지 않았다.
세상이 멈춰있었다. 환상 혹은 꿈결같은 일이었지만 어렴풋하게 눈으로나마 쫓을 수 있었던 그 광경은 분명 모든 것이 멈춰있던 세계. 아래로는 치솟은 파도가 가라앉지 않고 위로는바람과 구름이 멈춰있었다.
색을 잃은 듯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알파뿐이었다. 마녀가 된 소율이도 검공이라 불리는 2팀장님도 아무도 움직이지도 깨닫지도 못했었는데.
"혹시 그것도 마법일까……"
이유는 몰라도 자신이 배우지도 않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
마법? 어쩌면 스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 시간을 멈춘다니 그야말로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그리고 왜 하필이면 자신만이 그 광경을 볼 수 있었을까.
직접 물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별 거 아니겠지 싶어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지웠다.
'평화로우면 됐지, 뭐.'
마녀로 인한 소동이 일어난 건 어디까지나 지구 반대편의 일. 여기까지 영향이 미칠 리 없다. 게다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으니까.
상념이 이어지는 중에도 걸음은 멈추지 않아 어느새 클랜까지 도착해있었다.
출근하자마자 이은하가 본 것은 홍유리의 자리. 습관적으로 인사하려다말고 꾹 입을 다물어야 했다. 책상에 엎드린 홍유리의 이마는 알게 모르게 찌푸려져 있었으니까. 저기압에 기분이 좋지 않은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었지만, 오늘은 건드리지 말라고 써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빨리 출근해 3팀에 자신과 팀장님밖에 없다는 점이 목을 죄여오는 듯하다.
'무슨 일 있었나?'
결국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인사하고서 자리로 간 이은하는 계속해 그녀의 눈치를 살폈지만, 여전히 미동도 없이 엎드려있을 뿐이었다.
'어디, 오늘은……'
없다.드물게 작성할 서류도 없고 해야할 일도 없다. 평소같았으면 희희낙락 좋아했겠지만 하필이면 왜 오늘? 이 분위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쭈뻣거리다가 꼬투리라도 잡힌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결국 하는 척이라도 하고 있어야겠다 생각한 이은하는 펜을 쥐었지만 계속해 홍유리의 눈치를 살피고만 있었다.
***
까득, 까드드득.
책상에 고개를 파묻은 채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이 갈리는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
마녀 소동으로부터 일주일. 즉, 백소율이 집에 머무르게 된지도 일주일이 흘렀다는 뜻이다. 처음 며칠간은 그래도 괜찮았지만… 자신이 출근한 동안 둘이서 꽁냥거리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속이 답답해진다.
둘 사이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애써 대범한 체 해보려해도 쉽지 않았다. 드라마 혹은 영화. 그리고 실제로 과거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일부다처제는 그리 드물지도 않았었는데……
"……죄다 정신병자 아냐?"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한번 과거로 돌아가 물어보고 싶을 만큼이나. 아니면…… 자신이 이상한 걸까? 연애 경험이 적으니까… 그렇다기보단, 알파가 전부 처음이었으니 이런 걸지도 모른다.
아침부터 괜히 마주쳤다간 신경질 부릴 것 같아 나왔건만…… 먼저 와 있어도 할 게 없다.
질척거린다고 싫어하면 어쩌나… 괜히 뒤척거리던 홍유리는 문득 자리 한 구석에서 삐쭉거리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무척이나 바쁜 모습이었지만 홍유리는 코웃음쳤다. 왜냐하면, 오늘 할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저게 하는 척이란 걸 모를 리 없다. 항상 모른 척하는 것뿐이지. 그러게 왜 빨리 와서 난리람.
'그러고보니……'
한명 더 있었다는 생각에 혀를 찼더니 화들짝 놀라 움찔거리는 모습이 참 가관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제 짬 좀 먹었을 텐데도 뭘 그리 겁내는 건지.
'……많이 갈구긴 했지.'
입맛을 다신 홍유리는 잠깐 이은하의 입장이 돼 보기로 했다. 그러면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서.
먼저 임자가 둘이나 있다. 게다가 상대는 사람도 아닌 알파. 그런 주제에 이성의 화신같은 존재라 돌아봐주지도 않는데 정작 본인도 답답한 성격이라 백소율처럼 밀어붙이지도 못한다……?
"하여간에 기구한 년."
홍유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만약 자신이었더라면 죽자고 달려들었을 텐데. 태생이 초식동물이나 다름없는 모습에 조금이나마 연민이 들었다.
쭈뼛거리는 뒷모습을 뚫어지라 쳐다만보고 있으니 오히려 답답해지는 기분에 한숨을 뱉은 홍유리는 달력을 쳐다보았다.
하기야, 이제 이렇게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마랑회도 사라졌고 이젠 정말 아무 일 없이 지내다가 퇴직할 수 있으리라. 팀장 자리는 곧 복귀할 구진하에게 떠넘기고 백수 노릇을 하면 되리라. 껌딱지처럼 옆에 붙어있으면 백소율이라고 뭘 하지는 못할 테니까.
……그러고보면 페리도 어떻게든 해야하는데.
"골치아프네."
그 본질은 사람도 아닌 용. 하지만 사람의 모습으로 있는 이상 좋건 싫건 사회를 배워야만 한다. 문제는 이게 전례가 없는 일이라는 것. 가짜 신분을 만드는 건 어렵지도 않겠지만…… 정말 그래도 될까하는 생각이 든다.
일단, 사람과는 성장속도부터가 다를 테니까. 차라리 학교같은 데 보내지 말고 직접 가르치는 게 나을까? 하지만 그랬다가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사춘기도 있으려나."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결국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금 고개를 파묻고 말았다.
***
"이렇게 걷는 것도 좋네요."
백소율의 환영 마법에 힘입어 주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잔뜩 신난 페리와 감마는 저만치 앞서나가 있었고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가고 있는 형국이었다.
"익숙해질 기미는 좀 있나?"
"글쎄요…… 아직은 무리인 것 같아요."
예상했던 답변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아침에 될 거라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그나마도 백소율이 아닌 다른 이가 마정을 얻었더라면 이렇게 걷고 있지도 못했으리라.
'아니, 그럴 일 자체가 없었겠지.'
마녀가 될 수 없었을 테니까. 바로 옆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마법. 하기야,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봤자 소수에 불과하다. 이렇게 산책하다가 마주칠 일도 없거니와 그렇다한들 마법을 꿰뚫고 알아볼 리 없다.
"새벽에 자꾸 나가시던데요. 계속 그랬나요?"
묻는 말에 늑대는 순순히 답해주었다. 바닷속 몬스터를 전부 없애버릴 생각이라고. 그런 다음에 여왕을 부활시키면 모든 게 원래대로 바로잡힐 거라고.
"여왕님이요…… 가능한 건가요?"
"지금 당장에라도 할 수 있지만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가 없다."
강한 힘은 주변에 영향을 끼치기 마련. 그런 면에서 본신의 힘은 너무나도 규격 밖에 있었다. 고작 일부에 불과한 정신체의 자신만 하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 없다고 여겨질 정도인데 초월을 넘어 신역에 다다른 몸은 어떠하랴.
더욱이…… 기왕 부활시킬 거라면 온전한 모습으로 되살리고 싶었다. 영락하고 몰락한 그녀가 아니라 자색의 흑호와의 사투 이후에 엿보았던 기억 속의 그녀를.
초월의 영역에 선 이를 되살리겠다는 건 어쩌면 위험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녀로 인해 무슨 일이 생긴다면 누구도 처리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늑대는 믿고 있었다.
자신이 보아온 여왕이, 자신이 알고 있는 그녀가 그럴 리 없다고. 하물며 그녀 자신의 아이들의 새로운 터전이 된 이 땅에서는 더더욱.
"……그런가요."
이야기를 들은 백소율은 알듯 말듯한 미소를 띠어보였다. 모든 일이 일단락 된 지금 그녀를 되살리는 건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바로잡을 일이 성큼 다가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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