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1화 〉 #173 본신
* * *
"아~"
결국 페리의 교육은 집에서 가르치기로 했다. 앞으로도 계속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말은 할 수 있게끔 가르쳐야 할 테니까.
지난 며칠간 홍유리가 출근한 동안 늑대는 그 역할을 도맡았다. 그림을 가리키며 그 아래 적힌 사자라는 글자와 소리를 내면서.
"사자."
"사아자아~!"
어눌하지만 확실히 따라오는 모습. 애당초 요정용이었던 시절부터 어느정도 말은 알고 있었던 데다가 요정들의 말도 어느정도는 따라하고 있었으니 페리가 배울 거라곤 기껏해야 성대를 사용하는 방법과 단어를 익히는 정도뿐이었다.
그나마도 일상에서 배운 정도로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습득이 빠르다. 거기에 더해 환수다운 명석한 두뇌는 솜이 물을 흡수하듯 문자를 습득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페리가 성공할 때마다 요정과 감마가 박수치며 칭찬해주는 것. 그에 힘입어 학습은 어려움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누굴 가르쳐본 적은 없지만 빠른 속도란 건 분명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래가진 못했다. 집중력이 오래가지 않았서였다. 어린아이답게 금세 지루함을 표하며 페리의 흥미가 사라져가는 듯하자 늑대는 더 붙잡지 않기로 했다.원래 목표하던 만큼은 채웠던 데다가 이 이상은 다음 번에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처음이 싫은 기억으로 남으면 다음번에도 이어져 학습을 방해할 테니까.
"아쉽네요. 제대로 가르치면 분명……"
늑대는 고개를 흔들어 부정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으니까. 페리의 성장은 빠르겠지만 수명은 사람과 비할 바 아니다. 굳이 급하게 하는 것보다 천천히 첫 발을 떼고 싶었다.
"상냥하시네요."
웃으며 하는 말에 늑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대신 페리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요정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싶더니, 곧 자신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안겼다.
"피이~곤해."
작은 팔로 끌어안으며 하는 말에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홍유리에게도 종종 하는 행동이었지만 머리가 헝클어진다고 투덜거리는 그녀와 달리 오히려 달라붙으려하고 있다는 게 차이점일까.
한참이나 쓰다듬어지고 나서 그제야 만족한 듯이 엎드려있는자신을 베개삼아 새근새근 잠든 페리를 보고 늑대는 고개를 흔들었다. 원래도 잠꾸러기인 페리였지만 최근에는 한층 더 심해졌다 싶어서.어쩌면 위협이 사라져서일지도 모르고 부정을 먹을 수 없게 돼서일지도 모른다.
바닥이 아닌 침대에 눕히고 오자 백소율은 입을 가리고 웃어보였다.
"풋.완전 아빠같네요."
"……?"
"섭섭하진 않나요? 원래 거기서 잠들었는데."
자신의 머리 위를 가리키자 늑대는 그런때도 있었지 하며 그 때를 떠올렸다. 처음 환계에서 만났을 때는 위험해 함께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여태껏 인연이 이어질 수 있었단 것에 새삼스런 감정을 느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물론 이제 와서 페리가 없는 삶은 떠올릴 수조차 없지만 말이다. 그러다 자신을 바라보는 여전한 눈빛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달밤의 어느 날처럼 그 모습이 더없이 아름다워보여서.
"……."
분명, 감정의 영역이 강해진 탓이리라. 그럼에도 늑대는 그것을 싫다고 느끼진 않았다. 감정과 욕구가 옅어져 그저 목적만을 쫓던 이전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마음에 든다. 풍경을 바라보고 이것저것을 감상할 여유가 생겼으니까.
자연스레 둘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아련하고 깊은 감정을 품고 눈동자가 맞았을 때, 더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됐다. 숨이 천천히 멎고 서로만이 커져갈 때,
"한다! 한다!"
……재잘거리는 요정들의 목소리에 상념이 깨지고 말았다. 기대하는 반짝이는 눈빛들에 차마 이어갈 수 없었기에 늑대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
그런 것따윈 상관없다는 듯이 뺨에 닿은 감촉에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안하면 아쉬우니까요."
입맛을 다시는 모습에 늑대는 꼴깍 침을 삼켰다.아까까진 부추긴 주제에 까르르 입을 가리고 이곳저곳 날아다니는 요정들이 이리저리 흩어지자.
"……참고로, 전 낮이라도 좋아요."
귓가에 속삭이는 달콤한 말에 늑대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곤 언젠가의 경고가 떠올라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
"꾸, 꾸웩!"
멧돼지 한 마리가 고꾸라짐과 함께 이은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몬스터가 사라지며 헌터들의 할 일이 줄었다지만 그 대신에 이런저런 잡무가 생기고 말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잘못된 제보를 받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번과 같은 경우. 몬스터로 분류되는 큰엄니멧돼지가 출몰했다는 말에 급히 나섰지만 역시 이번에도 허탕. 실제로 있는 건 큰엄니멧돼지가 아니라 그냥, 조금 커다란 멧돼지일뿐이었다.
'사실 알고 있었지만.'
발자국을 보았을 때부터 큰엄니멧돼지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과장 조금 보태어 아프리카 코끼리만한 놈의 발자국이라기엔 너무 작았으니까.
"그래도 뭐……"
동물치고는 제법 큰 크기이기는 했다. 이제와선 바다로 나가지 않는 이상 어디든지 몬스터를 보기 힘든 게 사실이었지만, 특히 한국은 더 그러했다.
그 이유로는 환수들이 많기 때문에. 산과 숲 그리고 계곡과 강을 비롯한 곳곳에 자리한 환수들이 몬스터를 가만 놔두진 않았으니까. 그나마 있는 몬스터라고 해봤자 아무 해도 끼치지 못하는 슬라임 정도가 아닐까.
즉, 몬스터가 있을 리 없다는 것.
그런데도 제보를 받고 직접 움직이는 이유는 정말로 혹시나하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헌터들이 실제로 한가하기도 했으니까.
"문자만 보내둘까."
곧바로 퇴근해도 괜찮다는 언질은 받아두었다. 문자를 전송한 이은하는 핸드폰을 집어넣고크게 기지개를 켰다. 멧돼지의 사체는 굳이 들고가지 않더라도 동물들이 알아서 처리해주리라. 이제 슬슬 돌아가야지 생각했지만, 주변에 어슴푸레 펼쳐진 마력에 동그랗게 눈을 뜨고 말았다. 아니, 펼쳐진 게 아니라 마치 눈송이처럼 떨어져내린다.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
거기엔 무수히 많은 용벌레들이 마치 양탄자처럼 가로로 길게 늘어진 채로 바람에 실려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 보기 드물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어째선지 도망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그건 살기 위해 날개짓하는 것처럼 급한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어째서? 이제 몬스터는 어디에도 없을 텐데?
용벌레가 요정용의 유충인 이상 환수들은 당연히 용벌레들을 지킬 터. 그런데 어째서 도망치는 걸까. 왜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혹시라도 정말 몬스터가 있는 걸까?
'혹시큰엄니멧돼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고작 그 정도 몬스터에 이렇게까지 도망칠 것 같진 않았으니까.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그 저반에는 설령 몬스터가 있더라도 지금의 자신에게 위협이 될 리 없다는 믿음이 강하게 깔려있었다.
'가장 가능성있는 건……'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는 거라면 해안가의 몬스터가 이곳까지 기어오른 것. 실제 그런 사례도 있었고 수륙양용을 가진 몬스터라면 그리 어렵지도 않을 터. 이은하는 더 깊은 산중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
다시 밤이 깊어 모두가 잠든 시각에 늑대는 홀로 바다를 달리고 있었다.
"……."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고 어느새 동이 트기까지 머지 않은 시간. 주변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 그리고 늑대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다름아닌 요 며칠 계속된 사냥 때문이리라. 의도치 않았지만 그 때문에 뜻밖에도 경계가 그어지고 있었다.
몬스터나 동물이라고 지능이 없는 게 아니다.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야생에 살아가는 만큼 사람보다도 몇 배나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계속 이어진 학살로 인해 인근 해역이 비어있을 정도였다. 어느정도 멀리가지 않으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을 만큼이나.
그것 자체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안타까운 건 이제 몬스터를 유인해오기 어렵다는 점일까. 적어도 한국의 영해에서는 쉽지 않으리라. 정말 후각이 예민한 몇몇만이 가까스로 찾아오지 않을까.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영역에서 몬스터를 쫓아낼 수 있으리라. 아직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언젠가는 전부 다 없앨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주 잠깐동안 늑대는 눈을 감아 자신의 안을 관조했다. 더 정확하게는 이곳에서 거리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있는 자신의 본신을. 정신만이 머나먼 곳으로 떠나 업으로써 새로이 빚어진 거대한 마랑의 육신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잠들었던 본신이 눈을 뜨자 외우주에 포함된 수많은 세계가 알게 모르게 요동쳤다. 아주 작은 흐름이었지만 분명한 변화가 생기고 말았다.
늑대는 속으로 한숨쉬었다. 지금만 해도 이러할진대 역시 본신을 여기에 둔 것은 정답이었다고. 그리고 어차피 목적은 이게 아니다.
본신의 안 무수한 업을 담은 자신의 안에서도 빛을 잃기는커녕 가장 찬란하게, 그럼에도 희미하게 빛나는 정수를 보고서 가볍게 묵념하였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여왕의 정수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