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68화 (368/407)

〈 368화 〉 #179 대립

* * *

콰작. 발 아래 밟힌 나뭇조각이 가볍게 으스러진다. 일렁이는 그림자가 나풀거리며 바람을 가라앉히고 소란을 잠재웠다.

슬슬 땅거미가 내려앉는 와중에 새빨간 두 눈동자가 정면을 직시했다.다소 뜬금없게도 커다란 천막이 펼쳐져있는 곳. 분명 놈들이 숨어있는 곳일 테지만 더는 천막을 보고있을 필요는 없다.

두꺼운 천 너머로도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쯤은 바로 알 수 있었으니까. 발자국은 한 사람의 것이었지만 그게 위장이라는 것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은하?'

모를 리가 없는 마력이었다. 다만 여명의 척살조에서 철저히 배제됐던 그녀가 왜 뜬금없이 여기에 있는가 생각하면 의문이 생긴다. 아무리 설마해봤자 이은하가 환수 사냥에 동참했었단 건 있을 수 없는 일일 테니.

물론 의문은 뒷전. 그걸 해결하는 건 나중으로도 괜찮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어디까지나 본보기를 세우는 것. 모조리 죽임으로써 손대어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다고 알리는 것이었다.

'바로 세우겠다.'

그렇게 해야만 일방적인 희생이 사라질 테니까. 환수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환수와 인류의 전쟁이 시작되고 말 테니까.

차라리 일이 꼬이더라도 자신이라면 괜찮다.

인류와 환수가 아닌 인류와 자신의 갈등으로 좁히는 게 훨씬 나은 일일 테니까.

발자국은 무시하고서 늑대는 마력을 뒤쫓았다.

***

수풀이 흔들린다. 초목 사이에서 뒤쫓아오는 게 알파라고 생각하자면 그를 실망시키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에 속이 답답해진다.

'역시 속이는 건 무리였어.'

당연한 일이다. 알파가 본심을 드러낸다면 전성기의 칠영웅과 스퀘어 마스터가 전부 모이더라도 10초도 견디지 못하리라. 혼자만이 이질적인 힘을 지닌 별격의 존재. 비록 방식은 잘못됐다지만 신으로 추앙받고 숭배되었던 마랑이라는 이름은 가볍게 오르내릴 만한 게 아니다.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역시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밀려오는 후회를 애써 누른 이은하는 남자를 먼저 보내기로 했다.

"계속 달려요!"

그러자 이미 보이는 게 없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그. 망설임따윈 추호도 없다는 듯한 행동에 이은하는 쓰게 웃어버렸다.

만약에 세 번째 겨울의 아이나 백록이 자신을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여왕님이 보셨다면 꾸짖어 주셨을까? 사실,본심대로라면 이런 사람쯤은 버려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알파가 하려는 일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런 방식으로는 안 된다. 그러자 이은하는 실소하고 말았다. 일의 전말도 내막도 모르는 자신이 대체 뭘 안다고 막아선단 말인가.

그야말로알량한 종잇장같은 도덕심이었지만 기왕 내친 걸음이라면 하기로 맘 먹었다.왜냐하면, 환수들이라고 알파가 인류와 척 지는 걸 바라진 않을 테니까.

손에 쥔 실타래를 풀어내며 이은하의 이마에 삐질 땀이 흘러내렸다. 알파를 막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술식이 필요하다. 피할 수조차 없이 터무니없는 규모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서도 필요한 것은 정교함. 개미 한 마리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촘촘한 벽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풀어진 실타래는 숲의 사방팔방 산천초목의 전부를 지지대로 삼아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계산한 건 아니었지만 바람이 부는 방향마저 본능적으로 느끼고 지지대로 삼은 재능은 두번 다시 없을 괴랄함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으리라.

"Embiggen!"

순식간에 펼쳐진 실타래의 벽은 주문에 힘입어 크기를 더했고 정말 일대를 뒤덮었다. 거미줄의 단백질 구조, 베타 시트의 원리를 더했으니 제아무리 알파라고 해도 쉽게 돌파하진 못하리라.

검은 선은 하얀 실타래에 붙잡혀 멈춰서고 말리라. 감촉이 닿은 순간, 일대의 실은 그물처럼 뭉쳐 알파를 뒤덮을 테니까. 무언가 감촉이 닿자 이은하는 마력을 집중했다. 왜곡이 작용하며 실타래는 단숨에 알파를 휘감기 시작했다.

성공, 성공이다 그게 두부처럼 무르고 초콜릿보다 달콤한 생각이라는 걸 깨달은 건 시간으로 셀 수조차 없는 짧은 시간이었다.

서서히, 세상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술렁이던 숲은 침묵하고 급히 흐르던 바람은 멎어간다. 또한 자신이 펼친 실타래의 벽은 아주 잠시도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게 세상의 이치라는 것처럼 너무도 당연한 반응에 이은하는 두 눈을 부릅떴다.그것이었다. 얼마 전 마녀가 된 소율이 때와 마찬가지로 시간을 멈추는 힘. 의문이라면 어째서 자신은 어색하게나마 그리고 불편하게나마 움직일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지만……

이은하는 결국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알파!"

품에 안은 새근새근 잠든 어린 영물을 들어올리며.

"도와줘!"

***

결과부터 말하자면 막지 못했다. 아무리 꾀를 부리고 수를 써봤자 알파를 막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설령 이 자리에서 도망치게 할 수 있었더라도 마찬가지. 세상 어디까지라도 쫓아가 용서치 않았으리라.

'…….'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게 되길 마음 한 구석에서 바라고 있던 것도 사실이니까.

'나도 참.'

성격 파탄자가 돼 버린 듯하다. 깊게 한숨 쉰 이은하는 짧게나마 그를 위한 명복을 빌어주었다.

"이제 지장은 없을 거다."

짤막하게 말한 알파는 잠든 영물을 내려다보았다. 지독한 약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마력을 깃들게 해 모두 몰아냈으니 몸에 지장은 없으리라.처음부터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워낙 다급하게 외치는 바람에 당황했을 뿐이지.

"……."

그래. 당황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그것이 영원의 굴레였다는 점. 모든 것이 멈춰가는 시간속에서 오직 그녀만이 자신을 보고 느끼고 소리치기까지 했으니까. 아마 그 이유는 이 힘이 만상의 주인에게서 비롯됐다는 점.혼무로 먹어치운,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닌 권능이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영원을 깨달은 일은 없겠지만…'

그 편린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과거에 공허를 보고 안목이 생겼듯 다른 종류의 힘에 각성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더는 방해하지 마라."

경고처럼 말한 늑대는 이은하의 품 속에 영물을 안겨주었다. 이번에야말로 깊은 잠에 든 영물이 다시 깨어났을 땐 분명 환수들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되리라.그걸 대신해 하는 게 자신의 역할. 이은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늑대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알겠다고 끄덕인 것과는 달리 입으로 나온 말이 달랐으니까.

"꼭 이럴 필요는 없잖아. 다, 다 죽일 필요는."

"천막 안을 보지 못했나."

천막 안. 이은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떠올리기도 싫은 그 광경은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것. 환수뿐만 아니라 요정들까지도 탐욕의 대상에선 벗어나지 못했다.

"봤어. 봤는데…"

그래도 이런 방식은 아니지 않을까. 피를 피로 씻는다면 결국 몬스터와 인류처럼 증오의 고리에 갇힐 수밖에 없다. 공존할 수 없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리라.

"그건 네가 제일 싫어했던 거잖아."

오해받고 다치더라도 변절자를 제외한 누구도 죽이지 않았던 그 행동이 알리고 있다. 허나, 아무리 고결한 이라고 한들 그 어떤 이유에서든지 만들어지고 만 단 하나의 예외가 모든 것을 더럽힐 오점이 되고 만다.

이번 일이 분명 그렇게 만들고 말리라.

"알고 있다."

"그러면!"

"그래도 한다."

늑대는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한결같은 걱정이 담긴 그 눈은 오래전 페리의 그것과도 비슷했다. 정말, 순수한 걱정이었다.

"건드려서는 안 되는 걸 건드린 이상, 본보기를 세울 수밖에 없다."

"……."

"대립하게 돼도 상관없다. 어차피…… 소용없을 테니까."

차라리 그걸 바라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흐른 피가 환수의 분노를 삭히고 그들을 보호하는 넘을 수 없는 강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더 이상의 희생이 생겨나지 않을 테니까.

"나라면 괜찮다. 나라면… 상관없다."

인류의 악의가 어떻게 뭉치더라도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용서하겠노라. 늑대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내가 자초한 일이다. 어리석었다. 공존같은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스스로 자초한 일을 수습하는 것에 불과하다. 늑대는 그리 말했다. 그 말에 아까보다도 가슴이 죄어왔다. 선을 넘은 건 헌터들이었는데 왜 책임을 지는 건 그여야만 하는 걸까.납득하기 어려운, 자기희생적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는 행위는 일견 강자이기에 할 수 있는 오만으로조차 느껴졌지만 분명 하나의 답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러니까, 막지마라."

막으려거든 답을 제시해야할 터. 문제라는 건 해결할 방법이 뒤따르지 않는 이상 모두 소용없는 것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이 어린 영물을 환수들의 곁으로 되돌려보내는 것뿐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