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69화 (369/407)

〈 369화 〉 #179 대립 (2)

* * *

산을 올려다보며 어쩐지 아까보다도 공기가 무거워진 듯한 착각을 느꼈다. 왠지 여기에 있어선 안 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아니, 오히려 초목이 돌아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어쩐지 나쁜 예감이 들었다. 감정에 파고드는 듯한 불쾌한 감각.되돌려보내지는 듯한 길. 그럼에도 이은하는 꿋꿋하게 걸어 더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갔다.

"……."

그렇게 산의 중턱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을 때, 품속의 영물은 쫑긋 귀를 세웠다. 이제까지 조용히 잠들어있던 녀석이 무언가에 반응한 것처럼 홱 고개를 돌리더니 마구 몸부림쳤다. 빠져나가려는 움직임에 다치지 않게끔 살포시 바닥에 내려놓아주자 쏜살처럼 달려나갔다.

그러자 자신을 대신해 누군가가 영물을 안아들었다.

원숭이를 닮은 환수, 후운. 한 손으로는 영물을 안아들고 다른 한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몇 쌍의 눈동자들.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가 마치 자신과 그들을 가로막는 벽처럼 느껴져서 그게 정말 싫었다.싫었지만, 천천히 고개 숙여보인 후운이 저편으로 멀어져갈 때조차 붙잡지 못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채 이은하는 다시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오~ 못 참겠구만. 이 민둥머리!"

누가 감히 허락도 없이 쓰다듬는가?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본 이회명은 건치를 드러내며 씩 웃고 있는 거한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이 사람 말고 이런 짓을 할 사람이 또 있겠는가.

"검공이시구려."

"저번에 그 때 이후지? 거 존나 오랜만이네 그려."

"여전하구려. 그래서 검성 공은 어떡하고?"

"형님은 바쁘고 내가 대신 나왔수다. 그쪽도 비슷한 거 아뇨?"

정확히 말하자면 형인 이회광과 함께 클랜장의 위치에 있는 거였지만 이회명은 굳이 부정하지 않고 끄덕거렸다. 어차피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검공이라면 이 회담에 자리할 자격이 충분하고도 남는 인물이었으니.

"그나저나 대체 얼마만이오? 이렇게 다급하게 소집하는 게."

"뭐, 고원이 없으니까."

대부분의 소집은 고원에서 행해졌다. 무릇 클랜을 끌어모을만한 영향력이 없다면 바쁜 사람들을 한데 모으긴 힘드니까. 그에 있어서 최고의 클랜이라는 이름은 헌터들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햐, 거 신박하긴 하네. 전쟁의 신전이 소집이라니."

클랜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하지만 그 어느 곳보다 더 클랜이라 부를만한 곳. 그 네버랜드 토벌도 수없이 참전한 데다가 각국에 지부를 두고 있는 다국적 클랜, 전쟁의 신전의 소집이라면 당연 응할 가치가 있다.

"무슨 일인지는 얼추 들어 알고 있을거라 생각하오."

"엉. 다 뒤졌다던데. 아주 그냥 속이 시원하더라고."

"……가볍게 치부할 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동감이오."

암암리에 환수를 사냥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탕아들의 서울 공습 이후로 어디에선가부터 홀연히 나타난 환수들이 산천초목에 자리잡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해 나쁠 것 하나 없는 이야기였다. 환수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산중이나 숲속을 신경쓸 필요는 없어지니까. 솔직하게 말해 귀찮은 일이 줄었다는 느낌이었지만……

"약소 세력의 헌터들은 다른 느낌이었겠지."

클랜에 들지도 못하는 이들. 혹은 클랜에 들었어도 힘이 없는 이들이라면 던전이 아닌 산이나 숲속에서 자연 발생한 몬스터를 차지하는 것으로 생업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분명, 일자리를 뺏긴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회명이 그렇게 말하자 강태호는 턱 아래를 긁었다.

"별로 납득은 안 되는데."

헌터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많다. 그런데도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알파의 경고를 어기고 환수들을 사냥해버린 걸까.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모르고 있어서가 아니겠소?"

무지는 죄가 아니다. 이회명으로서는 죽은 자신마저 부활시킨 그 권능과 힘에 도저히 대적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건 자신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마랑에 대해 모르고 있던 그들은 고작 1년 남짓한 사이에 경고를 어기고 환수를 사냥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른 것이다 그렇게 치부하고 넘길 수 있는 문제였다면 세상살이는 얼마나 편할까.

"다 왔구려. 어서 들어갑시다."

회의실의 문을 당겨 열었을 땐, 이미 많은 면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

직접 참석하지 못해 화면 너머로 얼굴을 비추는 이들도 있었고 자리에 앉아있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 하나하나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헌터로써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이들. 어줍짢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다.

강태호는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헌터뿐만이 아니다. 마법사로서 대성을 이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마력을 품고서 팔짱을 끼고 있는 앳된 소녀. 홍유리와도 비슷한 분위기였지만 머리칼이 금발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분명 도로시였던가?'

그녀가 언짢은 기색으로 자리해있었다.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레드 스퀘어의 후계자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스승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무언가 일이 있어서 자신처럼 대신 이 자리에 오게 된 것겠지. 즉, 전쟁의 신전이 소집한 건 헌터들뿐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쩐지 껄끄러운 기분에 강태호가 뒷목을 주무르고 있던 와중에 누군가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그럼 곧바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렇게 모여주신 분들께 죄송하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그가 리모컨을 조작하자스크린이 조금씩 내려오기 시작하더니 영사기의 화면이 천천히 투영되어갔다. 곧 스크린에 비친 풍경은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끔찍한 장소. 피로 범벅이 된, 엽기 살인마가 범행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 같은 광경이었다.

"이미 알고 계신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소집을 부탁드린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많은 헌터들이 죽었기 때문이죠. 바로 이 땅에서 고작 하룻밤 사이에."

흥건하게 바닥을 적신 피가 그것을 증명한다. 우스운 건 그렇게 피로 범벅이 돼 있으면서도 한 사람의 시체도 심지어 육편조차 남지 않다는 점이었다.

"저희가 처리한 게 아닙니다. 이미 이렇게 돼 있었던 거죠."

그 말인즉, 시체를 처리했다는 소리.

"문제는 이들 전부가 헌터들이라는 점입니다. 헌터들이 이렇다할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전부 살해당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게 고작 하룻밤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 말대로 고작 하룻밤사이의 소동. 고작 하룻밤사이의 일. 그렇게 생각하기엔 너무 커다란 여파였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범인은 사람이 아닙니다. 몬스터… 아니, 환수입니다."

웅성거림이 커졌음에도 제지하지 않은 남자는 신경쓰지 않고 들고 있던 서류를 읽어나갔다.

"사망자 78. 생존자는 전무… 아니, 한 사람 있었습니다."

"한 사람?"

"살아남은 게 아니라 살려 보내졌다고 하는 게 맞겠죠. 자신의 말을 전하기 위해 일부러 죽이지 않은 겁니다."

"……."

불편한 침묵이 장내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언제부터 있었는지 구석에서 떨던 남자가 일어나 단상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도 넋이 나간 얼굴. 무엇보다 그에게선 조금도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태호의 눈에는 이곳저곳 단련한 흔적들이 엿보였다.

아마 C랭크 정도 되는 헌터가 아닐까. 그렇다면 마력을 가지고 있단 건 너무도 당연한 일. 그런데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력이 고갈된 게 아니라 그 원천까지 뿌리째 뽑혀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자. 말씀해주시죠."

잠깐 그를 진정시킨 남자의 말에 생존자는 어수룩히 끄덕였다. 그의 소개를 듣는둥 마는둥 한 귀로 흘린 강태호는 이어진 말에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조만간, 조만간 환수 사냥꾼들을 몰살시킬 거라 했습니다! 그 땐 저도 예외가 아닐 거라고……!"

그 말을 떠올렸는지 부르르 몸을 떨던 생존자는 곧 축 늘어지고 말았다. 결국 그로부터 코를 찌르는 알싸한 냄새가 흘러나오자 남자는 그를 내보내곤 말을 이었다.

"……잠깐 소란이 있었군요. 이야기를 이어나가죠. 아무튼, 이처럼 끔찍한 일을 저지른 환수는 다름이 아닙니다. 몇몇 이들은 신처럼 떠받들었고 실제로 재앙을 막기까지 한 존재. 저희 신전에서도 그를 지지했었죠.…예. 이젠마랑이라 불리우며 알파라는 이름을 가진 환수입니다."

"……."

"바로 그가 이 사건의 범인입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을만큼 증거는 많습니다. 무엇보다, 본인이 숨기지 않고 있으니까요. 78… 어쩌면 고작 78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절대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뒤에서 그가 얼마나 죽였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마랑회. 정말 그들이 마랑 본인과 커넥션이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남자의 화법은 교묘했다. 무엇 하나도 확신을 주지 않는 의문형이지만 술렁임을 끌어내고 있었으니까. 일이 이렇게 굴러갈 거라 어림짐작하고 있었기에 강태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하고싶은 말은 간단합니다."

"……."

"그를 이 자리에 부르는 것. 그리고 학살을 멈추게 하는 것. 그것만이 저희 전쟁의 신전이 바라는 일입니다. 설령 최악의 경우에 마랑과 싸우게 되더라도."

차가운 선고와도 같은 말에 웅성거림이 번져나갔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