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1화 〉 #179 대립 (4)
* * *
대구, 전쟁의 신전.
아까까지만 해도 사람들을 소집해 한껏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남자는 피곤하다는 듯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굴지의 클랜들. 그 수장격인 이들이 모인 자리에 서기에 자신은 한참이나 부족했으니. 네버랜드에서 신전장이 죽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이 자리에 오를 일은 없었을 터. 또한 이런 거추장스러운 자리를 이은 게 자신이 아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사람들을 떠보라니.'
이른바 여우짓을 하라는 지침에 남자는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 자신의 첫 대외 업무가 헌터들을 막으라는 거였으니까. 절대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경거망동하지 않게끔 생각을 유도할 것. 그게 위에서 내려온 지침이었다.
그리고 그 지령은 다행히도 성공리에 끝난 듯 하다. 물론 자신이 잘했다기보다는 그들 스스로 마랑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었던 탓이 크겠지만.
"이제 만족하십니까?"
"……흥."
"아무도 함께하지 않을 겁니다. 이미 다 알고 있잖습니까. 마랑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를."
사내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마랑을 잡는 일에 선뜻 나설 사람이 있다면 죽고싶어 환장한 사람이리라. 그를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도 가면 뒤에서 손가락질할 뿐이지 누구도 직접 나서려 하진 않는다.
"마랑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름의 합리가 있습니다. 그 원칙을 지키는 이상 무조건 날뛰는 괴물들과는 다르죠. 이번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랑은 어디까지나 환수 사냥에 관련된 이들을 물어뜯고 있을 뿐이다. 그건 그가 이미 예전부터 경고했던 일. 경고를 어긴 건 일부 헌터들이었고 그 대가를 치르고 있을뿐이다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지금 날 가르치겠단 거야?"
눈을 부라리는 도로시를 보며 황급히 손사래쳤다.
"설마요. 다만, 도로시님이 걱정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 말씀드리고 싶을뿐입니다. 조만간 환수 사냥꾼들은 전부 사라질 테고 그걸로 끝입니다."
"……알고 있어."
"……."
"알고 있는데도 불안해. 그냥 괴물이 아닌 건 알고 있다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하고 이성을 가졌다고는 해도 괴물은 괴물. 그것에게서 본능에 기인한 두려움을 가지는 게 과연 이상한 일일까. 머리로는 이해해도 태연하게 지내는 이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리고 그 괴물을 좋다고 끌어안고 함께하는 홍유리에 이르러서는.
"알고 있는데도…… 모르겠어."
고뇌에 빠진 도로시를 지켜보던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한 번도 먀랑과 대면한 적이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얘기만을 전해들은 주제에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는 건 오만에 불과할 테니까.
***
새벽이 되어 은자림은 산을 올랐다. 재건중인 서울 근처의 산. 수집한 목격담으로나마 백록이 이 근방에 자주 나타난다는 건 알 수 있었기에 이 산을 골랐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미 6번째 허탕이었다. 즉, 여섯번째 산이기도 했다. 어젯밤부터 계속 산중을 맴돌았지만 백록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하다못해 서로간의 깊은 골이 생긴 지금이라면 환수들이 자신에게 이를 드러내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얌전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환수들의 기척은 어렴풋이 안개처럼이나마 느껴지니까. 하지만 호시탐탐 자신을 살피기만 할 뿐 도무지 싸우려 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신 또한 싸울 생각은 없었지만 일단 만나기는 해야 대화를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저들 환수들에게서 듣고 백록이 찾아오기를 바랐다. 허나 여태 그러지 않았다는 건 백록은 여기에 없다는 것이리라. 혹은 그걸 바라지 않거나.
결국 이대로 있어봤자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상 괜히 섣불리 움직였다간 일이 더 꼬일지도 모르고.
'요정어라도 배워둘 걸 그랬나.'
그럼 하다못해 백록만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었을 터. 그게 못내 아쉽게 느껴졌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환수들을 찾아다니는 것보다 알파를 직접 만나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못했던 건……
"휴."
걸음을 멈춘 은자림은 어둑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잎사귀 사이로 보이는 달이 가려지는가 싶으면 바람이 구름과 실랑이하며 달빛을 가져오고는 했다.
……그를 만나지 못했던 건 면목이 없어서였다.
그렇게 잔뜩 도움받은 주제에 선뜻 나서서 미리부터 알고 있던 이런저런 것들을 숨기고만 있었으니까. 도대체 무슨 낯으로 그를 만날 수 있으랴.
하다못해 이런 식으로라도. 어떻게든 환수들을 설득해 그의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 그것만이 은공을 떳떳이 배알할 수 있는 방법이리라.
달빛에 반사된 창날. 붉은 빛이 번뜩이자 수풀 사이로 분주히 숨어 도망치는 환수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결국 백록을 찾을 수 없다면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을 터. 방법이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정말 없나?'
그렇게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은자림은 문득 언젠가의 일이 떠올랐다.
'있지… 않나?'
자신이 아는 한 사람의 말을 할 줄 아는 환수는 백록이 유일하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환수와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자신과는 달리 요정어를 알고 있는…… 머릿속에 전구가 번뜩이는 듯하다. 대체 왜 이제서야 떠올렸는지 의문일 정도로. 비록 시간은 오밤중의 새벽이었지만 은자림은 기꺼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
9724. 일만번에 가까운 가상 세계에서의 시뮬레이션은 단 한번의 실패도 없이 전부 성공으로 끝났다. 병적인 집착이라 해도 할말은 없지만 늑대에게 있어 이번 일만큼은 절대 실패해선 안 될 일이었다.그런만큼 확인은 몇 번을 거듭해도 부족하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과는 달리 오로지 변수를 없애고 싶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래도 이걸로 충분하다.'
더 이상의 검증은 필요없다. 이제 남은 건 직접 실행에 옮겨 여왕을 되살리는 것뿐이다. 새벽이 깊어 모두가 잠들었음을 확인한 늑대는 조심스레 이불 밖으로 빠져나왔다.
당장 실행에 옮겨도 괜찮겠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직접 약속했던 것처럼 환수 사냥에 연루된 모든 이들을 철저히 없애고 말리라.환수와 인류의 분리. 공존아닌 공존은 그 뒤에서야 가까스로 이루어지리라. 자신이 되살릴 여왕의 손에 의해.
'일주일.'
그 안에 모든 일을 끝마치겠다. 검은 터럭을 가진 짐승이 야음에 숨어들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런 시간에 불러내서 미안해요. 클랜에는 나중에 제가 직접 연락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차피 계속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뿐이다. 영물을 구한 날 이후로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알파가 나선 이상 자신이 낄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았고 환수들과 자신 사이의 거리가 알게 모르게 벌어져있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자신 따위가 나선다고 어떻게 할 도리도 없으리라. 그럼에도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 그 정도뿐이었으니까.
"그나저나, 못본 사이에 또 한층 성장했군요."
현기가 서린 깊은 눈. 마치 백록을 보는 듯하다. 얼떨결에 끄덕이기는 했지만 그런 그녀야말로 자신의 성장따위는 꿰뚫어볼 만큼 높은 곳에 있었다. 아직 따라잡지 못했는가를 생각하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단아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그녀가 자신에게 말했다.
"미리 말했다시피 통역을 부탁하고 싶어요. 아무래도 전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아, 네."
와달라는 말에 왔고 해달라고 해서 끄덕이기는 했지만 솔직히 회의적인 심정이었다. 이미 몇 시간이나 산과 숲을 뒤졌지만 환수들과 대면한 적 없다는 점에서 기피당하고 있는 셈이었으니.
"그래도 위험할지도 몰라요. 조금 떨어져 계시는 게."
자신이라면 환수들과 안면을 텄으니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아니다. 저번의 때를 떠올리자면 당장 환수들이 공격해와도 이상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에 말했지만 은자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옆에 있겠어요. 위협당해도 반격은 하지 않을 테니."
그 말마따나 기어이 창을 등 뒤에 메어놓자 작게 끄덕인 이은하는 숲 속의 한 곳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눈이 따갑다고 느낄만큼 지그시 바라보자 머잖아 나무옹이에서 무언가가 뿅하고 튀어나왔다. 미약한 마력을 담은 시선을 위협이라 느꼈는지 뽈뽈거리며 날갯짓하는작디작은 용벌레. 말은커녕 환수조차도 아닌 영물에 불과하지만.
"따라가요! 가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용벌레를 괴롭힐 생각은 아니지만 환수들이 만나주지 않으려하는 이상이러는 수밖에 없다. 그리 오래지 않아 날갯짓을 멈춘 용벌레는 누군가의 머리 위에 살포시 내려앉아 날개를 접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냐. 인간."
잠들어있는 거암과도 같은 커다란 코뿔소. 그리고 그 앞에 어눌하게나마 말을 하는 원숭이를 닮은 환수. 서화와 후운이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