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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72화 (372/407)

〈 372화 〉 #180 검은머리 짐승

* * *

인간이라고 지칭한 것 치고는 후운과 서화를 비롯한 환수들에게 생각했던 것보다 적의는 없어보인다. 아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환수들에게 있어 자신은 적이 아닐 테니까.

다만 의아한 건 자신은 그렇다쳐도 선자님에게도 적의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

'알파 때문에?'

알파가 나섰으니 굳이 자신들까지 움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고쳐먹은 걸까?

"왜 왔는질 묻지 않나. 바깥 인간까지 데리고."

바깥 인간. 그 말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디까지나 선자의 부탁으로 통역을 맡았을 뿐이나 이 대화가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 느껴져서였다. 아니, 이래서야 과연 대화를 시작할 수나 있을까?

적의가 없다는 게 호의를 가졌다는 뜻은 절대 아니란 걸 새삼스레 알아차려야 했다.

"이분이 대화를……"

"없다. 물러가도록."

아니나 다를까 대화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자마자 쌀쌀맞게 말을 자른 후운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탁 내리쳤다. 작은 땅울림과 함께 선이 그어진 듯하다. 아마 동행한 게 자신이 아니었다면 만날 수조차 없었으리라.

한쪽은 대화를 원하지만 한쪽은 바라지 않는다. 엇갈린 의견 사이에서 이은하는 난처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기색을 읽었는지 은자림이 물어왔다.

"뭐라고 하나요?"

"아… 잠깐만요."

잠깐 생각하다 좋지 않은 표정의 후운을 보았다. 어느새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돌린 것이 대화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옹골진 태도에 쉽지 않겠다 여긴 이은하는 차라리 타겟을 바꾸기로 했다.

환계에서 지낸 시간 동안 하나 알게 된 게 있다면 환수들간에 우열은 없다는 것.말을 할 수 있건 아니건 간에 모두가 평등한 여왕의 아이들. 그렇다면 굳이 후운이 아니라도 상관없으리라.

"음?"

천천히 다가간 이은하는 바닥에 엎드려 흙을 만끽하고 있는 서화의 콧잔등을 어루만졌다. 크게 돋아난 뿔을 더듬으며 교감을 시도하자 기분 좋은 울음을 토해내며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크릉거렸다.

폭주하고 있던 때와는 다르다. 아주 얌전하고 온순하게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다. 무겁게 내려간 눈꺼풀이 천천히 떠올랐을 때 맑은 눈과 마주할 수 있었다.

환수들끼리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교감할 수 있다지만 사람인 이은하는 거기까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환수어를 배운 거였으니까. 비록 환수들처럼 느끼진 못하더라도 알 수 있는 건 있다. 지금 서화는 분명 자신을 받이들이고 있노라고.

그렇다면.

"얘기 좀 들어줄래?"

커다란 바위덩어리같은 머리가 천천히 움직였다.

***

서화를 움직여 대화의 물꼬를 틀 수는 있었지만 결국 주체가 후운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환수가 대등하다지만 말하지 못하는 서화와 대화할 순 없으니까. 둘 사이에 끼어 동분서주 바쁘게 일했지만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고 있다.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후운은 처음의 태도를 옹골차게 고집하고 있다.

"우릴 지켜주고 영역을 인정해주겠다? 달콤한 얘기지만…… 그게 여태까지와 뭐가 다르다는 거냐."

후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랑의 언약으로도 지키지 못한 약속이다. 욕망에 지고 탐욕에 젖은 너희를 무슨 수로 믿으란 말이냐."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흥. 시덥잖은 소리."

멍청한 소리라며 들어볼 것도 없이 비웃는다.

"결국 선향(??)을 풍기는 이도 마찬가지인가."

작게 중얼거리며 실망했다는 듯한 말은 구태여 통역하지 않았지만 선도라는 말에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향? 선(?)?'

자연스레 선자와 창선의 이명이 떠오른다. 혹시 사람들이 지은 이명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하지만 환수인 후운이 거기까지 관심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머릿속 한구석에 잡념을 밀어넣은 이은하는 다시금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여왕께서는 도대체 왜."

탄식하는 후운. 여왕이 거론되자 이은하는 찔끔거릴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보면 환계가 사라진 것도 여왕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 것도 인류의 탓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잘 들어라. 만약 여왕께서 바라지 않는 게 아니었다면 그리고 마랑이 만류하지 않았더라면 우린 기꺼이 너희와 싸웠을 거다."

이글거리는 눈은 처음으로 적의를 드러낸다. 여태까지의 냉소적인 태도가 아니라 속에서부터 끓는 것을 토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 둘. 고작 그 정도였다. 하지만 들불처럼 번진 지금은 어떻게 됐나? 이 짧은 시간 사이에 얼마나 많은 환수들이, 영물들이 죽어갔는지!"

두말할 것 없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그에 관해 철저하게 배제된 이은하가 알진 못했던 일들이나 거기에 대해선 설령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왜냐하면, 직접 보았지 않은가. 형언하기조차 어려운 그 끔찍한 참상을. 그런데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 영물 한 마리를 산중으로 되돌려보내는 것뿐이었다.

"앞으로는 더 죽을 거다. 결국 너희와 우리는 공존할 수 없다. 절대로!"

일방적인 관계. 결국 이런 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들은 순간, 목이 메는 듯했다.

'그래.'

이은하는 그 말에 공감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알파는 그 굴레를 자신이 직접 짊어지려 했다.

모든 원죄를 뒤집어쓰고 스스로 규탄받는 존재가 되더라도 망설이지 않는다. 설령 인류에게 재앙으로 불리게 될지 모른다 하더라도.

"마랑에게는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결국 언젠가는 파국이 온다."

후운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적나라한 어투로 인류의 어둠을 들추고 일갈하고 있었다. 송곳처럼 찌르는 말에 심장어림이 쿡쿡 아파왔다.

"딱한 노릇이지. 자신이 구한 이들에게 손가락질 받아야한다는 건."

더이상 이은하는 통역하지 못했다. 그저 후운이 하는 말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탐욕에 지고 타성에 젖고 결국 욕망에 눈이 멀어 십중팔구는마랑에게도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겠지. 너희 검은머리 짐승들은 언제나 그래."

다른 소리가 전부 사라지고 후운의 말이 빠르게 이어진다. 갈수록 날카로워지는 말에 집중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처음 너희에게 죽은 환수는 참 어리석었다. 뭐니뭐니해도 그 녀석을 사냥한 건 애송이였으니까. 그 애송이가 어설프게 나서 까불길래 혼쭐을 내주고 돌려보냈다지."

다신 오지 말라며 엉덩이를 걷어차주었다고 한다. 부리나케 산에서 도망친 애송이는 다신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한다.

"그런데, 그 애송이는 기어코 다시 산을 올랐다."

굶주려서였다.다만, 배를 곪은 게 아니라 욕망에 곪아있었다. 기어코 다시 찾아온 애송이는 저번보다 더 나은 솜씨로 움직였고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환수는 이번에도 그들을 격퇴해냈다. 그리곤 그들을 풀어주었다. 울고불며 이해하지 못할 말을 토해내는 모습에 차마 죽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몇 번이나 싸우고 풀어줌을 반복했을까. 결국 환수는 그 집요한 창칼에 숨을 거두고야 말았다. 후운마저도 뒤늦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운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베푼 은혜에 돌아온 건 죽음이라는 회답이었으니. 사냥당한 환수는 자비로웠다. 그리고 그 자비로운 성정이 죽음을 가져왔으니 이를 어리석다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해야할까.

"너희는 결국 그런 생물이다."

은혜는 잊고 원한은 사무치게 기억한다. 후운은 경멸을 담아 눈을 치떴다.

"조만간 우리는 떠날 것이다. 더 척박한 땅으로. 어쩌면 그늘진 숲과 자비로운 강이 없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너희가 없다면 만족한다. 후운은 그렇게 말했다. 어깨를 잡고 흔드는 은자림의 손길에도 이은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깊은 무저갱을,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고랑을 보는 듯했다.

마냥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한 원망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하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마랑만 아니었다면 우린 죽을 각오를 해서라도 너희와 싸웠을 거다."

설령 그 결과로 모두가 죽는다 하더라도. 환수들에게 그런 생각을 품게 만들 정도로 서로의 골은 깊다.

서화의 긴 날숨이 한숨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아래서 고양이가 튀어나와 후운의 품에 안겼을 때 이은하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됐다.

갸르릉거리며 머리를 비비는 영물. 상처는 전부 나아있었지만 오히려 그게 가슴을 헤집었다. 만약 자신이 조금만 늦었다면 저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애완동물이라고 했던가? 그나마 그런 용도가 아니었다면 분명 다른 환수들과도 마찬가지로……

"……이렇듯 말은 했지만 네게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인류와 우린 공존할 수 없다는 거다. 알아들었으면 돌아가라. 대화는 불필요하니까."

이제야 그 말뜻을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알파가 말했던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말이 선뜻 와닿고 말았다. 이미 깊어질대로 깊어진 고랑이, 절벽이, 낭떠러지가 아득히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은하 양?"

선자의 재촉에 희게 질린 얼굴로 이은하는 눈가를 덮었다. 자신을 보곤 눈을 반짝이며 친밀감을 드러내는 영물을 차마 바라볼 수 없어서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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