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3화 〉 #181 할 수 있는 일
* * *
"……."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 눈을 부비적거리며 일어난 홍유리는 코를 간지럽히는 향기를 맡았다. 콧잔등에 맴돌아 깊게 파고드는 향기는 커피. 비몽사몽한 와중에도 이상할 정도로 잘 맡아진다.그게 하루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게 섞여있었다.
"유리! 유리!"
향에 이끌려 졸린 눈으로 거실로 나온 홍유리는 까르르 웃으며 자신을 반기는 요정들에게 하품하며 듣는둥 마는둥 인사했다. 컵을 든 요정과 커피 포트를 들어올린 요정들. 사이즈로 볼 때 아슬아슬하기 그지 없어 보였지만 떨어뜨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걱정하진 않았다.
뭐니뭐니해도 요정도 평범한 생물은 아니니까. 이미 테이블에 놓인 컵을 들어 정수기에 냉수를 받아마시자 머리가 짜르르 울리는 감각에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이제야 일어났다는 실감이 들어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고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을 떨쳐낼 수 있었다.
"후아."
그리고는 식탁 테이블에 놓인 쪽지 한 장. 유독 흔들림없는 글씨는 돋보기로 비춰 보아도 일정한 모양과 크기를 유지하고 있으리라. 누가 본다면 인쇄했다고 하겠지만 침을 바른 엄지로 글씨를 쓸어보자 아주 조금이지만 마른 잉크가 묻는다.
바로 이 인간미없는 글씨체가 알파의 것. 위에서부터 찬찬히 읽어내린 홍유리는 알듯 말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밤에 부린 투정이 통했는지 메모라도 남긴 게 어디란 말인가.
"자아~!"
요정이 건네는 커피를 받아든 홍유리는 거실 맞은편으로 향했다.
"……."
인테리어 공사로 꾸며는 놓았지만 잘 쓰진 않는 거실 한켠의 소파에 그녀가 앉아있었다.
"선생님."
"관둬. 언젯적 선생님이야."
핀잔주듯이 말하며 백소율이 앉은 옆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푹신푹신한 방석이 수마로 자신을 끌어들이는 듯하다. 커피 향을 맡으며 유혹에 저항하고는 백소율을 곁눈질했다.
"……메모는 읽었냐?"
대답 없이 끄덕이는 고개. 혹시하고 확인하러 온 거였지만 역시나 알파답게 마력은 전부 가져간 듯하다. 그 탓에 나른해보이긴 했지만 이 마력이 다시 차오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고작 이틀 남짓. 자리를 비운다고는 했지만 조만간 되돌아오리라.
"그래?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라는 걸까. 스스로 한 말에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걸 기뻐해야하는지 싫어해야하는지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애매하다.
"페리는요?"
"아직 꿈나라. 한참 더 지나야 일어날 걸."
"잠꾸러기네요."
가볍게 말한 백소율은 비스킷을 커피에 찍어먹고 있었다. 어디서 꿀처럼 달달한 냄새가 나는가 했더니 바로 이거였다. 어디서 공수해왔는진 몰라도 아침의 식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출근하시지 않나요?"
"조금 이따가."
시계를 쳐다본 홍유리는 이미 시침이 8을 지나가고 있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 데다가 사흘만 있으면 퇴직하는 셈이니까.
"으~ 나도 존나 빈둥거려야지."
안 그래도 구진하가 아넬라와 함께 보일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졌었다. 바퀴벌레같은 커플이 찰싹 달라붙어서는 과시하듯 즐기는 모습이 얼마나 꼴같잖던가. 하지만 이제 팀장 자리는 구진하에게 떠넘길 테고 자신은 살아생전 처음으로 백수가 된다. 팔을 이유로 띵가띵가 놀고 있던 호시절이 다 간 셈이니 얼마나 속이 시원한가? 그 생각에 키득거리고 있자니 옆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입은 가린 모양이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 없다. 뚫어지라 쳐다보니 곱게 휜 눈꼬리가 웃음짓고 있었다.
'……뭐 생각보단 괜찮네.'
어차피 반쯤 포기해서였을까. 아니면 더 궁상맞은 불쌍한 년이 있음을 깨달아서일까 지금은 그리 거슬리지 않았다.절대 말로는 꺼내지 않겠지만 종종 예전 그 때가 떠오르고는 한다.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그래도 상도덕은 있는지 부뚜막에 오르려하지도 않는 데다가 페리도 잘 따르는 모양이니까. 게다가 마정을 비롯한 마녀 사건 때문에 여기 있을 수밖에 없기도 하고.
마랑회에 대해서는 자업자득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 뭐 조금 딱하기는 하다.
그건 백소율이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속속들이 아는 홍유리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지만.
"……그래. 뭐."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한다면 차라리 이쪽이 나으리라. 워낙 변덕이 심해 막상 닥치면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십중팔구는 또 싫어질 것도 같지만.
"커피는 맛있네."
***
"드우우…"
바닥의 풀을 질겅거린 서화가 불만이라는 듯 콧김을 뿜어냈지만 후운은 애써 무시했다. 아니, 무시하려했지만 두번이고 세번이고 들을 때까지 반복하니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나도 알고 있다."
검은 머리 짐승이라고 다 같은 검은 머리 짐승들이 아니라는 걸. 세상은 흑백이 아니다. 인류라고 하나같이 나쁜 이들만 있는 게 아니란 건 손바닥에 훤하듯 잘 알고 있다.
저 소녀를 보라. 폭주하는 서화를 돕고 어린 영물을 구해온 것에 그치지 않고 환계에서도 몇 번이나 도와주었지 않았던가. 물론 환계와 연결고리가 있어서 가능한 행동이었을 테지만, 이렇듯 관계라는 건 첫 매듭이 중요한 법이다.
제법 오랫동안 살아온 후운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개인이 아닌 인류와 환수라는 종의 시점에서는 다르다. 첫 매듭은 모르겠지만 이미 엇나갈대로 엇나가 도저히 수습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갈라놓는게 낫다. 어영부영 회색으로 나둘 바에야 저쪽으로 밀어두는 게 나으리라.괜히 중간에 끼어 마음 고생하기에는 너무 여리니까.
"이게 더 낫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건 후운 나름의 배려였다. 고집불통처럼 팔짱을 낀 후운은 서화에 기대어 마랑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양과 검정 사이 회색으로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견딜 수 있는 건 분명 그처럼 강인한 이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한 귀로 흘렸음 하는데."
중얼거린 말이 바람에 실려 날아가자 서화는 풀을 질겅거리는 와중에 뿔로 후운을 툭툭 건드려 찔렀다.
"이 놈이?"
***
"그랬군요. 이제 좀 괜찮아졌나요."
"죄송해요… 기껏 불러주셨는데."
어떻게 산을 내려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그냥 머릿속에 자꾸 떠오르는 그림들에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말았다.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일념에 허겁지겁 도망치고 말았다.
'도망……'
그래. 도망이다.
신념이나 신앙, 이념이나 명예같은 문제보다도 훨씬 더 근본적인 것. 환수들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협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앞에서 도대체 뭐라고 하란 말인가.
송곳이나 화살촉처럼 날카로운 말들은 한 치의 틀림도 없는 사실들이었다. 고작 자신따위가 끼어들어선 안 된다는 말이다.
그들을 돕기는커녕 같은 인간이랍시고 다른 사람을 데려갔다는 게 얼마나 멍청하고 아둔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는지를 이젠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자칫 잘못하면 그들의 근거지를 빤히 알려주는 셈이니까.
물론 선자님에 한해 그럴 일은 없겠지만 환수들이 고려할 사항은 아니다.
'대체 뭐라고 생각했을까.'
그나마 자신들의 편이라 생각했을 자신에게마저 배신당한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입이 수천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있으랴. 이은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전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거네요."
응. 정말 그렇다. 그런 주제에 아무 각오도 없이 알파의 발목만 붙잡았다. 그를 위한답시고 어줍짢게 나서 방해나 했으니 대체 무슨 짓을 해버린 걸까.
알파라고 좋아서 사람들을 죽이는 게 아닌데.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닌데. 그럴 수밖에 없어서 하는 일이었는데…… 만약 자신이 알파였다고 생각하면, 환수들이라 생각하면 대체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
정말이지, 최악이다. 깊은 자괴속에 빠져 어두컴컴한 미궁 속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주저앉을 생각인가요."
한 줄기 목소리가 광명처럼 비춰오자 이은하는 홀린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뒤늦게나마 이야기는 전부 알렸을 텐데도 여전한 태도였다.
"반성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요. 그걸로 시간을 낭비하느니 지금 뭘 할 수 있는지를 찾는 게 더 낫겠죠."
"……."
"생각보다 상황이 안 좋은 건 사실이에요. 이미 대화로 풀어나갈 만한 상황도 아닌 것 같네요.……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할 일이 사라졌나요?"
"……."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나요?"
하나같이 정론이었다. 교과서나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말들을 뱉는데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그건 분명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이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어떤가요?"
화두를 던지는 듯한 물음. 이은하는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로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의 자신이 조금이라도 좋으니 환수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알파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한참이나 궁리하고 고민한 끝에 차는 이미 식어버렸지만 그 열기가 옮겨간 듯이 눈을 빛냈다.
"있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