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6화 〉 #184 욕심
* * *
"학습은 참 빠른데."
고작 며칠만에 간단한 의사표현을 말로 할 수 있게 됐으니 천재라거나 두뇌가 명석하다고 표현할 정도가 아니다. 제 2외국어를 배우는 것과는 다르게 언어라는 개념 자체를 익히고 있는 셈이다.
다만 그걸 지루하다 느꼈는지 오래 집중하진 못했다. 특히 알파가 없어서 그래서인지 그런 모습이 더 도드라진다. 뛰어나단 걸 알고 있는 만큼금세 싫증내고 뒹굴거리는 게 아쉽게 느껴졌다.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사람이라면 다그쳐서 되겠지만 페리는…… 글쎄. 점멸로 도망가지나 않으면 다행이리라. 안 그래도 밖으로 나가지 못해 답답해하는 것 같았는데.
입맛을 다신 홍유리는 페리가 싫증내지 않을 방법을 궁리해보았지만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인간이라면 경쟁심이라던가 우월감, 성취감 혹은 사명감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유로 학습의 동기를 심어줄 순 있겠지만 애초부터 천성이 여유로운 환수들은 힘들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아쉽기 그지 없다.
뒤늦게 빤한 시선을 느낀 홍유리는 뚱하게 고개를 돌렸다.
"뭐. 왜."
"안달하시는 것 같아서요. 급하게 할 필요가 있나요?"
"없어. 없는데……"
어느새 입술을 깨물고 있었던 모양. 손가락을 튕긴 홍유리는 긴 한숨과 함께 속내를 털어놓았다.
"욕심나잖아. 넌 안 그래?"
보란듯이 요정과 어울리는 페리를 가리켰다.
"생각해 봐. 이미 시작점부터가 달라. 쟨 이미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그것도 보통 마력이 아니다. 영재 교육을 받고 천재 소리를 듣는 애들은 많았지만 페리는 이미 그런 영역은 한참 지나쳐있다.
요정용으로써 두 번이나 탈피를 겪고 지금의 모습이 된 것. 항상 알파와 함께 해서 그런 거였지 페리에게도 약한 몬스터 정도는 충분히 쓰러뜨릴 만한 힘이 있다. 다루는 법만 배우면 C등급 남짓한 몬스터 정도는 얼마든지 토벌할 수 있을 터.
"설마……"
"안될 거 없잖아."
인간 사회에 적응하는 것도 적응하는 거였지만 홍유리는 눈을 빛내며 가슴 어림을 가리키더니,
"안 그래도 마력에 친화도가 높은 환수. 그런데 여기가 아니라."
곧 그 손이 올라가 머리 옆을 콕콕 찔렀다.
"여기로 확실하게 알게 되면 어떨지…… 기대되잖아."
기대하는 바는 있다. 어쩌면 이은하의 재능과 백소율의 친화도가 섞인 괴물이 탄생할지도 모른다고. 물론 설마 거기까지 가겠느냐만은 기대되는 건 사실이었다.
"이렇게 보면 천상 마법사시네요."
"하, 누가 아니라고 했어?"
"……후후."
올린 손을 내린 홍유리는 눈 사이를 좁혔다. 평화가 찾아온 세상에 새삼 마법이 필요하진 않을 테니 어디까지나 자신의 욕심임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가르쳐보고 싶었다.
실패하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시도는 해보고 싶다. 그런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은 홍유리는 슬쩍 백소율을 보았다.
"그러니까, 뭔가 있음 말해보란 거야."
"저요?"
그럼 말고 누가 있는데?잠깐 오가는 말이 없어지자 조금 견디기 어려운 침묵이 찾아왔다.괜히 말했나 싶어 혀를 찬 홍유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지만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이런 건 어떨까요?"
***
정말로 깊이 뿌리박혀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환수와 몬스터에 차이를 두지 않는 거겠지. 별개의 존재가 아닌 거기서 거기인 무언가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리라.
"사, 살려……"
이미 발목 힘줄이 잘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을 테지만 남자는 있는 힘껏 발버둥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멀리 가려고 땅을 기고 있었다.
그래봤자 이 방 바깥으로도 갈 수 없을 텐데도.
"살려다오! 누군가! 아무도 없느냐!"
대부호의 차림이 이러할까. 영물의 털을 빚어 만든 털옷을 가운처럼 입고 그 위에 요정용의 빛가루가 뿌려져있다.
그 빛가루를 공급하기 위해서였는지 아크릴 판처럼 투명한 새장 안에 몇 마리 요정용이 갇혀있었다. 점멸도 사용하지 못할 만큼 잔여 마력이 남지 않아 힘겹게 낑낑거리는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늑대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환수의 가죽으로 만든 카펫. 뿔을 갈아서 만든 그릇. 요정의 날개를 장식으로 이빨을 꿰어 만든 목걸이. 신체의 일부를 잘라 장식해둔 박제에 이르기까지.
"아, 알고 있다. 너, 너! 너! 환수 사냥꾼들을 죽인다고 날뛰는 마랑이잖아?!"
고작 한 사람의 물건이 이다지도 많다. 환수 사냥으로 물건을 공급한다는 건 그만한 수요가 있다는 뜻.
"나,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그럼! 난 죽을 이유가 없잖아! 내가 왜 죽는단 말이냐!"
그렇기에 뿌리뽑아야만 한다. 바라는 자가 있다면 언젠가 굶주린 자가 행하는 자로 변할 거란 건 확실하니까. 따라서, 누구도 그럴 생각을 품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하기로 한 이상 확실하게 공포를 심어주어야만 하리라.
"누군가 살려! 살려다… 아?"
바닥을 기던 부호는 드디어 문까지 도착해 급히 두드렸으나 손이 닿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는 그 사이를 가로막는 게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는 무언가.
부호는 그걸 알고 있었다.
비록 자신은 가지지 못했지만 가진 이들을 몇 번이나 부려먹어왔으니까. 신비하기 그지없는 마력이라는 힘. 이렇게나 소리치고 외쳤음에도 여태 아무도 오지 못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분명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나가지 못하리라. 그리고 밖에서도 아무도 오지 못하리라.
"내가, 내가 죽을…… 그 뒷감당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악에 받쳐 소리지른 부호는 쌍심지를 켜고 눈을 부라렸다.
"경제가 무너질 거다! 내가 투자한 사업이 대체 몇 개인지는 알고 있는 게야? 수도 없는 사람들이 길바닥에 나앉을 거다!어디 그뿐인 줄 알아?!날 죽이면 너도 죽는다! 수많은 헌터가 전부 다 네 뒤를 쫓을 거라고!"
협박의 말에도 늑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오연한 눈으로 부호를 내려다보았다.
"날 죽이면…… 죽, 죽이면."
아까까지의 활화산같던 분노는 차게 식어 스러지고 눈동자는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뒤늦게 머리가 이해하고 만 것이리라.뭘 어떻게 하더라도 죽고 말리라는 것을. 살아날 길 따위는 자신이 찾아온 순간부터 어디에도 없었다.
"아, 알았다. 얼마냐? 얼마를 주면 되겠어? 10억? 100억? 아, 아니 1000억?!"
터무니없는 액수에도 불구하고 늑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늑대에게 있어 돈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휴짓조각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욕망은 때때로 인간에게 있어 더없이 강한 원동력이 되곤 하지만 그 방향을 틀려선 안 된다.
"히, 히익! 어떻게, 어떻게 해 주면 살려줄 텐가?! 전부 들어주겠네! 목숨! 목숨만……!"
부호가 죽어야 할 이유는 오로지 그것뿐. 자신은 어디까지나 본보기를 보일 뿐이다. 그럴 필요가 있다. 어떠한 자비도 없이 누구에게도 평등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줘야만 한다.
그렇게 스멀스멀 그림자가 뻗기 시작했을 때,마지막으로 부호의 눈에 띄워진 감정은 결국 체념의 빛이었다.
늑대는 동아시아 일대를 가차없이 휩쓸었다.
***
……그게 어제까지 있었던 일이었다.
바라고 있던 대로 자신의 소문이 허다하게 퍼진 모양이었다. 추적자들이 늘어나고 숨거나 보호를 요청한 이들이 제법 많은 모양이었지만 정말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살해했다.
가장 우스운 경우는 섬으로 도주한 것. 외딴 섬에서라면 살아남을 수 있겠다 싶었던 거겠지만, 빈 섬에는 이미 환수들이 살아가고 있단 사실을 간과한 것이리라.
인과응보. 그런 경우엔 늑대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외딴 섬에서의 소문은 퍼지지 않을 테니까.적어도 이 소문이 이어지는 동안 환수 사냥은 멈추게 되리라.
"고맙네."
요 며칠간 바쁘게 달린 듯 피로에 젖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백록. 아마 환수들을 말리러 돌아다닌 것이리라. 자신이 본보기를 보이는 동안 만큼이라도 환수들의 분노를 잠깐이나마 억누를 수 있게끔 말이다.
"이렇게까지 해줄 거라곤…… 생각지 못했네."
하지만 괜찮겠느냐는 물음에 늑대는 백록을 빤히 쳐다보았다.
"좋든 싫든 자네는 앞으로도 저들과 살아갈 게 아닌가. 물론 자네만 괜찮다면 언제든 우린 자네를 환영하겠지만."
관계가 어그러질 것을 염려한 말이지만 늑대는 천천히 끄덕였다. 사실, 이미 그런 것따윈 신경쓰지 않으니까. 정확하게는 어쩔 도리도 없다는 게 맞으리라.
"……미안하네."
"그 반대겠지. 모르고 있어서 미안했다."
알고 있었다면 환수 사냥같은 행위는 절대 용납치 않았으리라. 여왕에게 깊은 은혜를 입은 몸으로써 그녀의 자식들만큼은 구해야만 한다.
강박도 뭣도 아닌 당연한 도리일뿐이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라."
모래바람을 맞으며 등을 돌렸다. 아직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었으니까. 여기서 멈추더라도 환수 사냥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두번 다시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게끔 만들어야 하리라.
"정말 조금만."
그건 백록에게 말하는 듯하면서도 자신에게. 그리고 아주 먼 곳에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곧 끝날 테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