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7화 〉 #185 퇴직
* * *
"같이 올 필요는 없었는데."
"방해였는가?"
"아니. 상관없어."
백록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이 하는 일을 보고 싶어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다만 기묘하게 느껴지는 점은 이전과는 상황이 정반대라는 점이었다.
"그립군. 자네를 등에 업고 달리던 때가 있었는데."
추억을 회상하듯 말하는 백록. 마침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물론 백록을 직접 등에 업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비슷한 상황이다.그림자와 마력이 받치고 있단 사실만 제외한다면.
슬슬 몽골 땅의 끝자락에 닿으려하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차고 싸늘한 공기가 찾아온다. 머잖아 동토가 드러나고 얼어붙은 땅이 보이리라.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넓게 펼쳐진 대초원의 끝이 하양으로 물들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한창 봄인 지금의 계절에도 불구하고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언덕이 이곳저곳에서 순백으로 물들어 방향감각을 상실케 한다.
하얀 초원 눈덮인 수풀이 바람에 흔들리자 그 아래서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싹이 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 결국 겨울이 오고 나면 다시 봄이 오는 게 세상의 이치 이듯이.
"따라오는 건 상관없지만 그래도 보기 썩 좋은 모습은 아닐 텐데."
"새삼 걱정해주는 겐가?"
"……."
"걱정 말게. 나도 나름대로 볼꼴 못 볼꼴 다 보았으니."
그 말에 늑대는 입맛을 다셨다. 그럴 의도는 없었겠지만 그 말이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 해서. 결국 어지간한 일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백록의 호언장담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 땅은 정말 평화롭군."
끌끌 혀를 찬 백록은 조금 낯익은 풍경이라고 했다. 오래전에 인간 세상을 다녀본 적이 있다고 했던가. 사람의 말을 할 줄 아는 이유는 바로 그래서였다고. 그래서 그립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기야, 천막집인 게르를 펼쳐놓고 가축을 기르는 모습은 21세기의 풍경이라 보긴 어려웠다.
"."
환수와 인류가 갈등을 빚고 있음에도 당연 저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바깥의 일에 대해선 까맣게 모르고 자신들만의 삶을 꿋꿋이 이어가는 이들이 있다. 그에 눈길을 빼앗긴 것처럼 백록은 한참동안이나 그들을 주시했다. 그 시선에는 분명 모든 인류가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담겨있는 듯했다.
'……그랬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겠지만.'
21세기의 기술력을 가지고도 멸망의 기로에 섰음인데 문명의 이기에서 벗어난다면 조금도 버티지 못했으리라. 다만, 그건 별개의 이야기. 백록이 안타까워하는 건 어디까지나 공존에 대해서이리라.
'가축이 아니라 동반자로써.'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길이 분명 있었을 터. 지금의 일방적인 기생, 포식과 같은 관계가 아니라 자신과 페리처럼 서로 다르더라도 함께할 수 있는 길 말이다. ……물론 그건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이미 관계성은 어그러지고 말았으니까. 설령 관계를 회복한다고 해도 있었던 일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흉터처럼 남고 화인처럼 각인돼 절대 사라지지 않으리라.
"슬슬 보이는군."
몽골을 가로질러 도착한 동토. 서리가 낀 찬 바람이 마주하는 가운데 늑대는 생각했다.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이 넓은 땅을 전부 나다니긴 힘들 터. 더 정확하게는 그전에 적어도 한번은 돌아가서 백소율의 마력을 흡수해주어야 하리라. 아마 내일이나 모래쯤. 그러기 위해서는 바삐 움직여야 할 터. 혼자서라면 문제는 없겠지만 백록의 체력이 따라줄지는 의문이었다.
"걸리적거리진 않을 테니 걱정 말게."
그 생각을 읽은 듯이 하는 말에 늑대는 더 말하지 않고 담담히 끄덕였다.
***
늑대가 달리고 있는 사이 여명 또한 바쁘게 움직였다. 알파를 돕기 위해 여론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클랜원 개인의 집까지 찾아와 귀찮게 만드는 악질인 기자들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홍유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중지를 들어올리며 이죽거렸을 정도로.
"뭘 야려. 안 꺼져?"
힘껏 눈을 부라리자 식겁한 기자들이 뒷걸음치다 못해 개중에는 엉덩방아를 찧는 이마저 나타났다. 비록 외관은 앳돼더라도 그 실체는 인간조차 아닌 반룡. 그리고 지고의 마법사이기도 하다. 정말 위압하겠다고 맘 먹으면 일반인이 아닌 헌터들조차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어야 하리라. 마치 동상처럼 얼어붙은 그네들이 턱을 달달 떨고 있자 홍유리는 코웃음치다말고 한숨쉬었다.
대체 지금 자신이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어차피 더는 볼 일도 없는 사람들인데 뭘 신경쓸 필요가 있단 말인가?
'그럼 그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기분을 전환했다.뭐니뭐니해도 오늘은 역사적인 기념일. 바로 자신이 퇴직하는 날이었으니까. 더는 헌터가 아니게 된다는 뜻이다. 즉, 이제 알파가 돌아오기만하면 그토록 바랐던 평화로운 나날이 쭉 이어진다는 것. 아침에 일어나도 저녁에 잠들어도 항상 함께할 수 있는……
'물론 훼방꾼이 있긴 하지만…'
홍유리는 눈 사이를 좁혔다. 아무리 그래도 마정에 목숨이 걸린 이상 백소율을 내쫓을 순 없을 테니까. 누구보다 알파가 원하지 않을 터. 결국 마땅찮기는 하지만 그 때 들었던 대로 공유하는 수밖에 없다.
잠깐 고개를 들어올렸다. 거기에 있는 건 맑은 하늘 대신 거무튀튀한 천장. 그게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래. 그 졸업식 날, 그 때부터 이런 결과가 되리란 걸 사실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자신이 괜한 오지랖을 부린 대가였으니까.
'……뭐, 됐나.'
새삼 백소율과 싸우며 다투기에는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에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매번 실감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알파를 혼자 감당하는 건 무리인 것 같다고. 결국엔 미친 척하고 비약에 의존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따라갈 수 없었다. 마법사인 동시에 헌터로써 빠짐없이 심신을 단련했지만 알파의 체력을 따라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 증거로 매번 실신하지 않았던가.
"그래. 눈에만 안 보이면…"
눈에만 안 보이면, 그래. 어떻게든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혼자 생각에 끄덕거린 홍유리는 3팀의 문을 열었고 미리 기다리고 있던 구진하가 자신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모습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야. 내 자리거든?"
"원래 내 자리였지."
"오늘까진 내 자리니까 말로 할 때 비키시지?"
가만 자신을 쳐다보다 고개를 주억거린 구진하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홍유리는 등을 기댄 채로 눕듯이 앉았다.
"마지막인데 아쉽지는 않나? 난 돌아오니 감회가 새로운데."
왼팔의 어깻죽지를 쓰다듬으며 3팀의 팀원들을 둘러보며 하는 구진하의 말. 그 눈에는 깊은 감정이 담겨 있어 눈길이 닿는 팀원들은 쑥쓰러워하며 시선을 돌렸지만 홍유리는 코웃음쳤다.
왜냐하면, 그 속셈이 너무 뻔하게 보여서.
"감회가 새롭긴 개뿔이. 아주 정신나간 소리하고 앉아있네."
"……."
"왜? 이제 팀장으로 돌아오니까 이미지 관리하려고? 어차피 너 아넬라 고년이랑 물고 빨고 다 했던 거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거든?"
"……그런 적 없다."
"지이~랄하네."
입꼬리를 끌어올린 홍유리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다른 걸 볼 것도 없이 구진하의 프로필 사진만 보더라도 누군가와 함께 찍은 커플 사진인데다가 옆에는 하트와 함께 매일 갱신되는 숫자.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얼씨구. 1년이 넘으셨어? 그럼 그 전부터 서로 죽고 못사는 사이였다는 건데…… 이건 몰랐네."
"……."
"뭐라고 했지? "돌아오니 감회가 새로운데?" 지~랄. 이거라도 지우고 말하던가."
"……."
"얼씨구? 어차피 돌아온 것도 내가 등 떠밀어서 온 거면서."
실제로 팔이 회복된 건 그보다 훨씬 이전. 돌아오려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야."
작게 속삭이면서 구진하가 제발 그만하라는 표정으로 손을 모아 부탁했지만 홍유리는 코웃음치며 들어주지 않았다. 어차피 신입이 없는 이상, 여기에 있던 헌터들 전원이 구진하가 팀장으로 있던 때부터 함께해오던 팀원들. 새삼스레 근엄하게 있을 필요도 없으리라.
"근데…… 아쉽지는 않냐고? 이게 미쳤나 진짜."
그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건 아넬라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정말 즐거워서였으리라.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구진하의 입이 일자로 꾹 다물어지자 일부러 지어보이라고 해도 어려울 만큼 밉상인 표정을 지어보인 홍유리는 그럼 그렇지 하며 반대쪽 입꼬리마저 끌어올렸다.
"바통 터치. 이제 네가 개고생할 차례야. 그리고……"
홍유리는 구석 한 켠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가리켰다. 반드시 자신이 결재해야하는 일 외에는 전부 떠넘길 생각으로 모아둔 것. 질끈 눈을 감는 구진하의 모습에 그제야 통쾌함이 들었다.
그러게 누가 보란듯이 염장질하랬나. 누군 옆구리가 시려워 죽겠는데.
그나저나, 아쉽지 않냐고 한다면 마냥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조금이지만 시원한 감정 속에 섭섭함이 녹아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
'진짜 코딱지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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