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8화 〉 #186 투쟁
* * *
누군가에게 말할 것도 없이 그림자에 녹아든 늑대는 당연하다는 듯이 현관문을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왔다. 돌아오기는 했지만 제법 늦은 시간이었기에 모두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지만 그렇지 않았다.
"수고하셨어요."
기다리고 있었단 듯이 쪼그려 앉아 있는 백소율이 자신을 반겼다. 기척을 숨긴 건 아니라지만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찾아냈단 사실이 제법 새롭게 다가왔다. 분명 마정이 만들어내는 마력에 젖어 과민해져있는 감각의 탓이리라.
어쩌면 잠들지 않았던 게 아니라 잠들지 못했던 건지도 모른다.
"방출하고 오지 그랬나."
"아침까지는 참을 만했는데… 죄송해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마력을 감당키 어려웠으리라.
피부에 손이 닿은 순간, 작게 소리가 터져나왔다. 굳이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을 만큼 상기된 그녀의 얼굴이 달뜬 숨을 뱉고 있었다.마침 외투를 입고 있는 게 외출하려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 엇갈리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 저……"
돌아오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으로부터 뻗은 마력이 스멀스멀 그녀의 안으로 향했고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마정을 확인했다.
폭주하는 엔진처럼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다. 친화력이 높은 백소율과의 궁합은 최상. 스킬로써의 효율은 더없을 만큼 최대치에 도달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래서는 몸이 버티질 못한다.
견딜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걸로 보아 분명 조금씩 적응하고 있었지만 아슬아슬한 선을 넘는 순간 분명 위험해지리라.
백소율이 가진 마력을 거둬들여감에 따라 계속 움찔거리던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자신에게 기대어 숨을 색색거리고 있었다. 달뜬 호흡이 조금씩 안정되어감에 따라 그녀를 받쳐 들어올렸다.
"……괜찮으세요?"
그녀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이상없냐고 묻는 말에 늑대는 담담히 끄덕였다. 마정의 마력은 분명 개인이 품고 있기에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일 테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대해에 물 한 바가지를 퍼부은 것이나 마찬가지.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
"든든하네요."
"시간이 많이 늦었다. 그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 했을테니…"
그녀를 방 안까지 옮겼지만 꼭 붙잡은 손이 놓지 않으려했다. 얼굴엔 분명 피로가 남아 깔려 있었지만 무언가를 갈구하듯 젖은 눈동자를 외면하기 어려웠다.
"……."
말보다도 확실하게 전해진 감정에 결국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일어난 홍유리는 어쩐지 덥다고 생각했다. 푹푹 찌는 것이 여름에 에어콘 없이 잠든 듯한 기분. 왜 이렇게 덥나 생각했더니 눈앞이 까맣다. 눈을 떴는데도 여전히 검다.
"……."
그런데, 어두워서 검게 보이는 게 아니라 검은 털뭉치가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 까만 털뭉치에 안겨있는 셈이다.눈을 끔뻑이다가 늑대가 돌아온 거라고 머리가 뒤늦게 이해했다.
그러자 덥고 갑갑한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털뭉치에 오히려 고개를 파묻었다.
"응… 다 끝났어?"
자연스레 웅얼거리듯 새어나온 말소리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투정부린다고 느껴졌다.
"아니. 다시 가야한다."
"진짜 바쁘게도 사네."
투덜투덜. 마치 불만 있는 강아지를 보는듯해 늑대는 속으로 웃었다.
"이제 마지막이니까. 그리고……"
잠깐 무어라 말하려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이미 시작하긴 했지만 이쪽은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까. 결과가 나온 다음에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다. 깨워서 미안하지만 아직 자고 있어도 괜찮다. 이른 시간이니까."
귓가에 아직 여섯 시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해주자 부르르 몸을 떠는 게 보였다. 눈살을 찌푸리지만 싫어서 찌푸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이게 진짜."
자고 일어나서 곧바로 듣기엔 너무 자극이 강해서. 자라고 한 주제에 잠을 깨우고 있다.그 점에 불만을 품었지만, 홍유리는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이 털뭉치에 안겨있으면 정말 언제라도 솔솔 몰려오는 잠에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마법도 아니고 스킬도 아니지만 정말 그 무엇보다도 마법같았다.……안심.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나 달라진다는 게 마법이 아니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미 파묻은 고개를 더욱 깊이 파묻으며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럼 조금만……"
***
백소율에 이어 홍유리가 잠든 것을 보고, 아직 깨어나지 않은 페리를 잠깐 지켜보던 늑대는 아직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백록을 보았다. 그러지 말고 안에서 기다렸어도 괜찮았을 텐데 한사코 거부한 것은 집이라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환계에도 건물은 많았을 텐데.'
하기야, 되돌아 생각해보면 환계의 도시에 가득했던 환수나 요정들과는 달리 백록은 외딴 숲에 홀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생각해보면 도시가 거북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고맙네."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 해야 할 일이니까."
"음. 밖에서나마 잠깐 볼 수 있었네. 어린… 아니, 페리. 그 아이는 여전하더군. 그리고 참 많이 자랐어."
"……."
"중요한 건 형상이 아닌 본질이라지만 용이 형상을 버린 건 전례없는 일. 걱정도 했지만 자네 곁이라면 그럴 필요도 없었군. 역시 괜한 걱정이었네."
여전히 해맑고 순수한 이전 그대로였다며 백록은 끄덕거렸다. 그 말에 역시 환수는 환수처럼 살아가게 해야하는 게 아닌가 했던 일말의 불안이 녹아 사라지는 듯했다.
"오래된 용이 뭐라고 하진 않았나?"
"아무 말도. 오히려 자네가 움직일 걸 알았는지 환수들을 추스리고 있더군."
오랜 삶에서 이어진 지혜. 용의 그것이라면 예지와도 같은 것이리라. 스킬로 보는 미래가 아니라 경험에서부터 오는 예측.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는 당연히 알 수 있었을 터. 덕분에 백록이 세계 각지의 환수들이 준동하지 않는 데 한 몫 거들어 주었으니 다행한 일이리라.
"러시아의 서쪽. 그리고 중앙아시아."
그나마 다행인 건 추운 동토에선 환수 사냥이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일까. 추위에 적응한 환수도 많지 않았고 이상 기후로 북극의 바람이 불어오는 험난한 눈보라를 뚫고 굳이 목숨을 걸 필요는 없을 테니까.
이제 남은 건 기껏해야 그 정도. 끝은 그리 머지 않다. 그리고 이젠 숨길 여지도 없이 자신에 대한 소문이 허다하게 퍼지고 말았다.
여명이 발표했던 행위. 환수 사냥을 행했던 이들에게 마랑이 찾아가고 있노라고.
"기껏해야 사나흘이면 전부 정리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묘한 움직임도 있는 것 같고."
"음. 그것 말인가?"
"그래."
조금 일이 기묘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쫒으려했던 이들이 하나같이 자수해 수감돼 있었으니까. 경비를 뚫고 죽이는 것쯤은 전혀 어렵지 않겠지만……
"뉘우칠 기회는 줘야겠지. 방식은 다르지만 저 방에 들어가있는 게 인간들 나름의 벌이 아니던가?"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하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라며 백록은 머리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정말 그걸로 괜찮겠나?"
납득한 백록과는 달리 오히려 늑대는 한 줄기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뿌리를 뽑을 수 없으니까. 강박적으로 누구 하나 허튼 생각하지 못하도록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본보기를 보여야만 한다. 만약 그래서 안 된다면 더욱 가혹한 방식으로라도. 따라서, 이렇게 선처하는 건 오히려 안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고 그리 말했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자면 문명의 기나긴 세월동안 셀 수도 없이 있어왔던 일이다. 만약 지금 그들이 자수했다고 눈을 감아주었다가는 환수 사냥을 일삼고 난 뒤에 자수해 도망쳐버릴지도 모른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분명 언젠가는 자유의 몸이 돼 바깥을 나다니겠지.
그런 안 좋은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말에 잠깐 고민하는 듯했지만 깊고 맑은 눈 안쪽에 담긴 빛을 잃지 않은 무언가를 가지고 백록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언제까지나 자네에게만 기댈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
"분명 자네는 마지막까지 신의를 지키고 도리를 다하겠지. 하지만 그건 의무가 아닐세."
타이르는 말 같기도 했고 다짐하는 말 같기도 했다.
"자네에게는 자네의 삶이, 우리에게는 우리의 삶이 있네. 여왕으로부터 태어난 우린 비록 야생과는 거리가 멀지만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지는 잘 알고 있다네."
자신들이 변해야만 한다고 강한 의지를 보였다.
"저항한 걸세. 우릴 해치는 자들과 싸우고 맞서서. 상처도 늘고 흉터도 생기겠지. 그래도 자네에게 배운 게 있다면 우리 또한 그래야만 한다는 걸세."
바로 그게 투쟁이라고 백록은 이어 말했다.
"항상 감사하고 고맙네."
구태여 악한 선례를 남길 싹을 자르지 않는다. 누군가가 들으면 얼빠진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죄를 뉘우칠 기회를 준다는 것도 기꺼이 위협에 맞서 싸우겠다는 것도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았기에 늑대는 한참동안이나 백록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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