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0화 〉 #187 사소한 문제
* * *
봄의 동토. 깨진 얼음 위를 내달리며 차디찬 공기가 입김을 서리게 만든다. 여전히 늑대가 달리는 것에 멋쩍게 딸려있을 뿐이었지만.
털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백록은 생각한 걸 그대로 말했다.
"겨울이었다면 어땠을지는."
"비슷한 생각을 했군."
"……자네도 춥나?"
눈을 끔뻑이는 백록이 그리 묻자 늑대는 고개를 흔들었다. 온도는 느낄 수 있지만 추위를 느끼는 몸은 아니다. 겨울의 주인이 대마법이라도 사용한다면 모를까.
"예전엔…… 그랬지."
몬스터 시절의 기억이 아니라 조금 더 이전. 사람이었을 때의 아주 희미한 기억이었다. 잠깐 곱씹어보던 늑대는 생각을 뒤로 미뤄두었다. 동토의 동쪽에서 심문으로 캐내 들었던 정보를 토대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직 그 장소까지는 한참 거리가 있다.
그런데도 늑대의 후각은 환수의 냄새를 감지했다. 한 번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를 잊지 않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잠깐 우회하겠다."
이곳으로부터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지만 고작 수십킬로미터. 3분도 채 되지 않아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방향을 꺾은 늑대는 자신의 다리에 바람을 둘렀다.
한 줄기 바람은 곧 거세져 돌풍으로, 폭풍으로 변했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사나운 폭풍은 날뛰는 광풍과 하나가 돼 다음 영역으로 뻗어나갔고 기어이 풍신(風?)의 영역에 이르렀다.얼마 전 근원을 가진 본신에 접속했던 때, 광풍 스킬을 가져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흐르는 듯하면서도 난폭한 바람의 흐름. 홀연히 빠져나가 결코 붙잡을 수 없지만 오히려 붙잡지 않으면 돌아오는 기묘한 흐름. 늑대를 중심으로 모든 기체의 흐름이 새로 짜이는 듯했다.
사용법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하는지 또한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결과가 펼쳐졌다.
"잠깐 숨 좀 참아."
백록이 끄덕임과 함께 늑대는 지배력을 한껏 발휘했다. 기체의 흐름을 지배한다는 것. 거기에 대기 또한 예외가 되진 못했다. 어느새 늑대가 가려는 길은 완전한 진공으로 변해있었다.
그럼에도 새로이 공기가 들어차기는커녕 완전히 격리된 공간처럼 둘 사이에 자리한 것은 무엇도 남아있지 않다.폭풍으로 대기를 찢어발기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진공. 공기의 저항 자체가 없는 바람이 열린 길을 기꺼이 달렸다.
"……."
발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공기조차 없어 무엇도 매질이 되지 못하기에 그저 허망히 사라질 뿐. 조금씩 시험해보고 있었지만 스킬 하나를 가져오는 건 이 세계에 큰 부담이 되지 않는 모양. 진작 결심했다면 훨씬 더 빨리 끝낼 수 있었을 텐데.
달리고 달려 머잖아외딴 숲에 자리한 어느 오두막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벽면에 걸린 건 분명 환수의 가죽.
늑대는 실소하고 말았다. 오두막의 주인은 집 뒤의 공터에서 도끼질을 하며 장작을 패고 있었으니까. 60 혹은 70정도로 보이는 노인…… 그래. 이런 경우도 있으리라.
욕심이 아니라 그저 생존을 위해 행동했을 뿐. 의아한 점은 노인은 헌터가 아닌데도 어떻게 환수를 쓰러뜨릴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게 의문이기는 했지만 늑대는 구태여 궁금증을 풀지 않았다. 관련돼 있는 자는 누구 하나 남기지 않고 죽일 생각이었으니. 백록의 말마따나 먼저 죄를 청하지도 않은 이상은 더더욱 살려둘 이유가 없다.
그리하여 뻗은 그림자는 이번에도 예외없이 일대를 집어삼켰다. 복잡한 사정이나 사연도 상관없다. 그 어떤 의문도 남기지 않은 채로 정적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
"징글징글하네."
잠옷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 어림을 긁적인 홍유리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이미 오후가 돼 해가 중천에 떠 있었지만 백소율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다. 늦잠자는 성격은 아니었을 텐데……
'그래. 힘들어보이긴 했지.'
본인은 숨겼다고 생각하겠지만 갈무리하지 못한 마력이 느껴지곤 했다. 빗지 않은 머리가 삐져나오는 게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허용량을 넘은 마력에 펑하고 터져죽지 않는 게 어디란 말인가. 마녀가 됐던 데에는 당연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 냅두자.'
혼자 생각에 끄덕거린 홍유리는 넓은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봤자 한동안은 같이 살게 될 테고 앞으로도 어떻게 될진 모른다.아니, 알파가 받아들인 이상 높은 확률로 앞으로도 함께이리라.마력을 갈무리하느라 피곤했던 건 당연한 일일 터. 그걸 탓하는 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쪼잔하다.
그럼 그동안…
…….
백소율이 눈을 뜬 건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눈을 비비며 요정들이 가져다준 물을 마셨을 때 조금은 정신이 들었다. 이미 정리가 끝나 새벽에 있었던 일이 꿈처럼 여겨졌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휴. 고작 그 사이에.'
잠들고 일어났을 뿐인데 비어있던 마력이 다시 차올라있다. 발목을 적시는 물결처럼 유유하게 흐르고 있었다. 한 컵의 물로 속을 가라앉힌 백소율은 순순히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응!"
"고맙대! 고맙대~!"
활기차게 웃는 요정들이 까르르 거리며 함께 따라붙어있는 감마를 타고 오르고 뛰논다. 쪼꼬미들이 줄줄이 붙어있는 게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기에 보기에도 말랑말랑한 뺨을 콕 찔러보았다.
"?"
그러자, 갸웃거리는 고개가 의문을 표한다. 더 필요한 게 있냐는 말에 완전 집요정이 다 됐다며 쓴웃음을 지은백소율은 홍유리의 행방을 물었다.
"선생님은?"
그러자 떨떠름한 얼굴로 방 밖을 가리킨다. 창밖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기에 상당히 시간이 흘렀음은 알 수 있었지만 혹시 알파가 아직 가지 않았나하는 생각에 얼른 밖으로 나왔을 땐 커다란 TV 앞에 두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엎치락뒤치락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거! 저거 놓치지 마!"
물빛처럼 푸르고 아름다운 머리칼을 가진 페리와 정열적이고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의 홍유리. 서로 상반되는 색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어울린다고 느꼈다.
친구처럼 가깝게 보이기도 하고 부모자식처럼 정다운 모습. 거기까지는 더할 나위 없이 좋게 보였지만……
"……."
백소율은 들리지 않을 한숨과 함께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페리에게 새로운 재미를 가져다주기 위해 가져온 물건이었지만 그 효과가 예상을 넘어서고 말았다. TV와 연결할 수 있는 콘솔 게임의재미에 푹 빠져 하루에 3시간이 넘도록 즐기고 있을 정도였으니.
"밟아! 밟아버려!"
아이가 듣기엔 다소 과격한 말. 물론 페리가 그저 어린아이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홍유리의 말에 응하며 컨트롤러를 조작한 페리는 마구 버튼을 난타했다. 처음엔 그렇게 어색해하더니 이젠 완전히 적응해 눈으로 쫓기 어려운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곤 두 사람의 캐릭터가 장애물을 넘어 점프했다. 때때로 길을 막아서는 적들의 머리를 밟아 쓰러뜨리기도 했고 벽돌에 머리를 부딪쳐 금화를 얻거나 버섯을 먹어 강한 힘을 얻기도 했다.페리의 캐릭터가 버섯을 먹고 한참이나 커지자 부딪치는 족족 몬스터들을 날려버렸다.
아주 오래된 게임의 리메이크판이었지만 게임 자체가 처음인 페리에게 있어선 정말 새로운 자극이었을 터. 이렇게 된 건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생님. 선생님까지 이러시면 대체 어떡하자고……"
페리 이상으로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게 홍유리였다. 마법사로서 아득한 경지에 있고 수양을 쌓은 그녀였지만 불을 다루는 마법사답게 타고난 승부욕이 게이머의 기질에 더없이 부합하고 있다. 하필이면 그 점을 망각하고 만 것이다.
'같잖다고 코웃음치실 땐 언제고.'
매일같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긴 했다. 그래도 설마설마했었다. 평소의 그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페리 이상으로 게임에 빠지게 될 거라곤 누구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이젠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몰두해있다. 분명 중독이었다.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부르는 소리마저 듣고 있지 않았으니까. 이 또한 마법사의 소양. 감탄이 나올만큼 놀랍고 뛰어난 집중력이었지만 하필이면 그게 이런 곳에서 발휘될 줄은 몰랐다.
"옆! 옆에!"
급히 소리치는 말에 눈을 돌린 페리는 화면 구석을 주시했고 손에 든 컨트롤러의 버튼을 몇 번이고 연타한다. 자신이 자고 일어난 사이에 또 한층 실력이 늘어있었다.
"……."
다시 한 번 들리지 않을 한숨을 내쉰 백소율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일상속에서 생긴 자그마한 문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TV의 전원을 차단할 순 없었으니까. 원두를 갈아 커피 한 잔을 들이킨 백소율은 두 사람의 게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알파가 돌아올 때까지 고쳐지지 않는다면 다 함께 머리를 맞대보는 수밖에 없을 터. 그러다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런 일상속의 사소한 문제로 고민할 수 있었던 적이 도대체 언제인가 싶어서. 기분좋은 웃음을 흘린 백소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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