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2화 〉 #189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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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며든다. 마치 고목나무의 뿌리처럼 비쩍 말라붙은 목구멍에 한 줌의 물을 들이켰을 땐 쾌감조차 느껴질 정도였다. 텅 빈 몸에 수분만 보충하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않지만 지금은 이게 구원과도 같다. 정말 최소한의 장비만 챙기고 매번 산을 새로 올랐기에 바닥난 체력이 아주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아니, 끌어올릴 힘도 없었다는 게 맞으리라.
"퓨하!"
앉은 자리에서 물병을 두 개나 비우자 머리가 띵해져왔다. 높은 고도의 찬 공기는 보온병에 담긴 물을 차디찬 얼음물로 만들기에 충분했으니까.
"이제 좀 괜찮아졌나요?"
"아, 넵."
자신과는 달리 천천히 양을 나눠서 들이켜는 모습에 이은하는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 왜 그러죠?"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속으로 떠올린 생각은 달랐다. 사욕은 극한까지 절제하면서도 효율을 중시하는데다가 하나의 클랜을 이끌고 있음에도 책임에 짓눌리지 않는다. 또한 상황보다 신념을 중시하면서도 결코 선을 넘지 않는 그 모습은 누군가와 제법 닮아있었다.
'알파.'
마치 기계처럼 묵묵히 일을 수행하는 모습은 그와 닮아있었다.잠깐 떠올린 생각이었지만 알파가 사람이었다면 이 사람과 비슷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망상이지만.'
그건 이루어질 리 없는 생각. 환수 사냥꾼들의 장비를 뺏고 잠깐 휴식을 취하자 이제야 좀 살만해졌다고 느꼈다. 그러자 뒤늦게 찾아오는 건 졸음. 스멀스멀 뻗어온 수마가 잠깐 잠드는 게 어떻겠냐고 손짓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며칠간 잠을 자지 못했으니까. 단순히 잠들지 않은 것뿐만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쳐 떨어져나갔을 강행군이 쭉 이어진 것.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잠깐 눈 좀 붙이는 게 어떤가요? 아직 2시간 정도는 잘 수 있을 텐데."
그 말에 이은하는 쓰게 웃었다. 정말 그게 효율적이라 생각하고 꺼낸 말일 테지만 거기까지 배려받아서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면목이 없었으니까.
"……."
은자림은 그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편한 길은 알려주었지만 걷거나 걷지 않거나 선택하는 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자유였으니. 대신, 잠깐 말을 물어보았다.
"그는 어떤가요? 잘 지내고 있었나요?"
"알파요?"
"안부를 물은 지도 제법 됐으니까."
"글쎄요. 워낙 바쁘니까요. 이젠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
"가장 최근에는……"
환수 사냥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사람을 살리겠답시고 알파를 가로막았다. 이미 몇 번이나 생각한 거였지만 정말 어리석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
"그렇겠죠. 그래서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닌가요."
"네.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서요."
자신이 발품을 파는 정도로 환수가 죽지 않고 알파의 손에 묻을 피가 한 방울이라도 줄어든다면 조금은 면목이 서지 않을까.그럴 생각으로 움직인 거였지만 고작 이래서야. 심적으로도 일적으로도 도움이 되질 않는다.
뭐라도 하고 싶어서 수련을 쌓았건만 그리 멀리 오지 못한 것 같다. 한숨이 마치 입김처럼 새어나왔다. 이걸로도 부족하면 다음엔 뭘 해야할까. 팀장님… 아니지. 전 팀장님이 보면 과연 뭐라고 말했을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네요. 나쁜 버릇이에요."
"……?"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요. 실패한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으니까."
"……."
"그는 그렇게 나약한가요? 당신이 실패한다고, 실수한다고 저버릴 정도로 냉담한가요?"
붕붕,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 없다. 비록 잘 표현하진 않지만 알고보면 알파만큼 다정한 사람은 없으니까. 분명 그 날의 일은 다시 꺼내지도 않고 불문에 붙일 게 분명하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태까지처럼 대해주리라.
"그래도 그건 뻔뻔한…"
"뻔뻔하면 좀 어때요?"
이은하는 멍하니 은자림을 올려다보았다. 도저히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운 말이었기에. 귀를 의심케하는 말에 과연 자신이 들은 게 진짜인지 긴가민가할 정도였다.
"마음 내키는 데까지 끝까지 해보세요."
"……그래도 될까요?"
"안 될 게 있나요."
남은 2시간. 더 오가는 말 없이 이은하는 계속 그 말을 곱씹어보았다.
***
"여길 지키면 되는 겐가?"
"그래. 만약을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 백록은 거부하지 않고 기꺼이 끄덕였다. 건물 벽 앞. 더 정확히는 하수구의 입구. 맨홀 뚜껑을 단단하게 밟고 있으란 게 늑대가 부탁한 유일한 일이었다.
"맡겨두게나."
외곽이라곤 하나 도심 한복판에서 검은 늑대와 하얀 사슴이 버젓이 서 말을 나누는 걸 몇명이나 보고 있음에도 그냥 지나쳐버린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전혀 보고 있지를 않다.
가만 고개를 갸웃거린 백록은 그 앞에 대놓고 머리를 들이밀었으나 망막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이건 조금 놀랍군."
그동안 마법을 대단하다고 여긴 적은 없다. 굳이 그런 방식이 아니더라도 환수들은 원하는 대로 마력을 다룰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마력을 다루는 방식을 체계화하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가.
뚫어지라 보고 있음에도 전혀 알지 못하고 지나친다. 아마 닿지만 않으면 뭘 하든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맨홀 뚜껑을 단단히 밟은 채로 백록은 혀를 내둘렀다.
어느새 사라졌던 늑대가 벌써 빠르게도 돌아오고 있었으니까.
"허, 벌써 끝났는가?"
체감상 1분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그러자 돌아온 늑대는 건물 안을 잠깐 쳐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분명 건물 안을 확인한 것이리라. 그의 눈이라면 벽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을 테니까.
"……그래. 끝났어."
호언장담하는 말에 백록은 구태여 확인하려들지 않았다. 늑대가 그리 말했다면 분명 그렇게 이루어졌을 터. 구태여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었으니.다만, 유독 지쳐보이는 눈은 분명 무언가를 보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티내지 않기에 다른 누군가가 보았다면 몰랐으리라. 하지만 언어가 불필요할 만큼 감정을 읽는 데 능한 환수였기에 알 수 있었다. 눈동자 속의 눈동자. 아주 깊은 곳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감정의 요동침. 며칠간 함께하며 여러 참상을 보았음에도 여전하던 그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대체……"
정신은 금속이 아니다. 여러 사건을 겪으며 때때로 마모되고 닳기도 한다. 하지만 백록 자신이 아는 한에서 늑대보다 강한 정신을 가진 이는 없다시피 할 정도였다.
강철의 정신이라는 말은 누구보다도 그에게 어울리는 말이다.그런데, 그런 그를 조금이나마 흔들리게 만들 만한 일이 이 안에 있었단 말인가?
"……무슨 일이 있던 겐가?"
그 이유를 물었지만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깐이지만 안에 들어갔다 나오는 게 어떨까 생각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그럴 시간이 없다고 재촉하고 있었기에 백록은 결국 애써 마음을 접고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세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러시아의 서쪽 끝. 재앙에 의해 멸망한 유럽. 사람의 발길이 닿지 못하게 된 역병의 여파로부터 부정을 먹어치워 대지를 정화시키고 있던 건 누구였던가?
늑대가 보았을 광경을, 늑대가 보았을 참상을 유추할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한참이 더 지나서였다.
***
다시 시간이 흘렀을 때, 늑대는 남동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러시아의 일을 전부 마무리하고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오히려, 달과 밤을 쫓아 달리는 듯했다.
결국 본의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흐르는 것보다 더 빨리 시간 경계선을 달려 완연한 밤이 찾아온 자리에서 백록은 얼마간 중앙 아시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적군."
유난히 인구가 밀집해있던 도시들과는 달리 여태 본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의문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남기 힘들었을 테니까."
몬스터의 침공은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역병과 질병이라는 재앙까지는 아니었겠지만 운이 나쁘다면 A등급 이상의 몬스터를 맞닦뜨려야 했다.
그게 초기에 벌어진 일. 헌터도 마법사도 그 어떤 체계도 잡히지 않았던 대혼돈의 초기에 벌어진 일이다. 만약 도시 한복판에 던전이 열렸다면 대체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을까.
경화기. 중화기. 화약. 폭탄. 전차. 폭격기에 이르기까지 국력을 쏟아부어야만 가까스로 대항할 수 있었을 터. 그마저도 도시의 기능이 정지될 테니 국가가 운영될 수 있을 리 없다.
즉, 국력이 약한 국가라면 나라가 무너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는 뜻이다. 그 과정에서 사망자는 셀 수도 없었을 테고.
"……음. 어렴풋이 이해는 가네."
끄덕거린 백록은 그럼에도 주변 풍경이 어색한지 연신 두리번거렸다. 추운 동토에서도 인류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버텼거늘 유독 이곳은 을씨년스러운 폐허가 많았으니까.
그리고 이런 곳에서마저 환수 사냥이 이루어졌단 것이리라. 아니, 어쩌면 이런 곳이기에 더더욱.
"얼마 남지 않았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늑대를 뒤따라 백록은 반쯤 폐허가 된 도시를 거닐었다.
* * *